적당한 유머와 액션... 그리고 무엇보다 드넓은 우주... ★★★★
우리는 잘 모르지만, 미국에서 가장 강력하고 가장 두터운 팬 집단이 도사리고 있는 게 바로 <스타트렉>이라고 한다. 이들을 지칭해 트레키(Trekkie : 열광적인 스타트렉 팬)라고 한다는데, 원작에서 스팍을 맡았던 배우에게 오바마 대통령이 불칸족의 인사(손가락을 두 개씩 붙여서 드는 인사)를 했다는 것으로 보아, 오바마 대통령도 트레키일 것이라는 짐작이 간다. 나의 경우, 그 동안 10편이나 나왔다는 <스타트렉> 영화 버전을 단 한 편도 보질 못했다.(어쩌면 한두 편은 봤을 것이다) 다만, 언제 봤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드라마 시리즈를 본 기억은 있다. 열심히는 아니지만 때때로 봤으며, 엔터프라이즈호의 외관이라든가 독특한 스팍의 얼굴 모습은 뚜렷이 인장처럼 새겨져 있다.
그러니깐, 나에겐, 그리고 아마도 많은 한국인에겐 <스타트렉>의 11번째 영화인 <스타트렉 : 더 비기닝>이 과거의 추억을 되살린다든가, 아니면 팬덤의 열정으로 가슴이 설렌다든가 하는 경험은 아닐 것이란 얘기다. 이것은 그저 거대한 낚시의 원흉이자 헐리웃의 새로운 기류를 대변하는 J.J. 에이브람스 감독의 거대한 SF 블록버스터로서 가치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의 세계 최초 시사회에 당첨되어 주위 사람에게 같이 가자고 했더니 가장 먼저 나온 얘기가 “<스타트렉>을 잘 모르는데 봐도 괜찮은 건가”하는 걱정이었다. 하지만 걱정할 일은 아니다. 영화제목에 나와 있는 것처럼 이 새로운 영화는 <스타트렉>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는 얘기다. 원래 오리지널엔 없는 제임스 커크와 스팍의 어린 시절 얘기라든가, 왜 볼칸족이 멸망하는 종족이 되었는지, 어떻게 그들이 만났으며, 어떻게 엔터프라이즈호의 승무원이 됐는지 등등의 의문들을 해소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리즈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봐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영화다.(오래된 팬들이 봤을 때는 어떤 평가를 내릴지는 잘 모르겠다.)
영화는 엔터프라이즈호의 함장이 되는 제임스 커크(크리스 파인)의 태어나던 시점에서 시작한다. 800명을 살린 아버지의 용기를 이어 받았는지, 어릴 때부터 제임스 커크는 대책 없는 무모함과 용기를 과시한다. 말썽만 부리던 제임스 커크는 엔터프라이즈호 파이크 함장(브루스 그린우드)의 권유를 받아들여, 아카데미의 생도가 되고, 이곳에서 앞으로 오랜 친구 사이가 될 인간과 불칸의 혼혈 스팍(잭커리 퀸토)과 치열한 경쟁을 펼친다. 우연히 엔터프라이즈호에 탑승하게 된 커크는 스팍, 술루(존 조), 우후라(조이 살다나), 스콧(사이몬 페그)과 함께 아버지를 죽인 네로(에릭 바나)에 대항해 지구를 지키기 위한 일대 결전을 준비한다.
광활한 우주를 무대로 펼쳐지는 <스타트렉 : 더 비기닝>은 우선 적당한 유머로 관객의 숨통을 트게 해준다. 대책 없이 무모하고 감정적인 커크와 냉혈한이라고 불릴 정도로 이성적이지만 속 깊은 스팍의 대립에서 웃음은 자주 유발되고, 특히 강한 러시아 액센트 영어를 사용하는 체코프(안톤 옐친)가 입을 열 때마다 객석에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런 개인적 캐릭터뿐만 아니라 상황 - 적이 우글대는 곳으로 공간이동을 한다든가 - 에서도 웃음은 계속 유발된다.
그리고 대단히 거대하다거나 장쾌하진 않아도 우주 공간에서 펼쳐지는 액션도 충분히 볼만하다. 오히려 액션 그 자체보다는 액션 과정에서 잠깐씩 보여지는 영상이 상당히 매혹적이다. 초반부 커크의 아버지가 탄 함선이 공격 받을 때, 카메라가 함선 내에서 우주공간으로 나가면서 모든 소리를 순간적으로 소거시키는 부분이라든가, 네로가 탄 로뮬란 족의 우주선이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 시간 여행을 하게 되는 장면 등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그리고 이런 우주 액션 장면에서 역으로 클래시컬한 음악을 배경으로 넣은 것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부분이다.
무엇보다 <스타트렉 : 더 비기닝>은 최근 SF 영화들이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린 것과는 달리 평화와 화합의 미래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게다가 인류가 그 동안 정신 차린 것인지, 수백 년이 지난 미래의 지구는 여전히 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을 가지고 있다. 이것만큼 현재 우리에게 희망적인 미래가 어디 있겠는가.
또한 대부분의 SF가 지구를 침공하는 외계와의 전쟁을 그린 것이라면, 엔터프라이즈호의 항해 목적에서 알 수 있듯이(아무도 가지 않은 우주를 탐험, 새로운 생명과 문명의 발견, 그들과의 평화) 미래 지구는 다양한 외계 생명체와 평화ㆍ공존을 모색하고 있다. 이는 어쩌면 지구 안에서조차 화합하지 못하고 있는 현세 인류에 대한 따끔한 질책으로도 받아들여진다.(처음 스타트렉이 미국 TV에 방영되었을 때, 백인, 흑인, 아시아인이 함께 승무원으로 등장했고,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불러왔다고 한다. 당시 인종 문제가 심각했던 시절에 보인 인종 화합적 장면은, 그 자체만으로도 진보적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며,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엔터프라이즈호가 항해하는 광활한 우주야말로 이 영화의 가장 큰 볼거리이자 이상이다. <스타트렉>은 단지 드라마와 영화로서만 위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실제 과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어릴 때 <스타트렉>을 보며 자란 많은 미국 어린이들이 광활한 우주에 대한 꿈과 이상으로 <스타트렉>에서 보여준 미래형 장비라든가 기이한 현상을 주제로 연구를 하였고, 이 과정에서 ‘반물질’(댄 브라운 원작으로 곧 영화로 공개된 <천사와 악마>에 반물질이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한다)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와 증거들이 찾아지기도 했다 한다. 안타깝게도 우주산업에서 열악한 우리에게는 이런 과거가 공백으로 남아있다. 60년대 많은 미국 어린이들이 <스타트렉>을 보며 우주를 향한 꿈을 키웠다고 한다. 그렇게 많이 늦은 것 같지는 않다. 여전히 우주는 넓고 할 일은 많다.
※ <스타트렉>이 과학 발전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해서, <스타트렉 : 더 비기닝>이 과학적 영화인 것은 아니다. 특히 진공상태인 우주 공간에서 비행선이 날아갈 때 ‘휙~~’하는 소리가 난다든가, 날아가는 방향을 바꿀 때 한 쪽 날개를 들어주는 장면 등은 대표적인 비과학적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 커크와 스팍의 어린 시절과 그들이 다투고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만큼 <스타트렉 : 더 비기닝>은 소년이 어른이 되는 성장영화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 전반적으로 볼거리도 많은 SF 영화긴 해도, 공을 한 번 세웠다고 해서 갓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애송이에게 거대한 함선, 엔터프라이즈호의 함장을 맡긴다는 건 좀 오버스럽긴 하다.
※ 이 영화는 정말 큰 화면으로 봐야 제대로 만끽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내가 본 상영관은 상대적으로 스크린 크기가 작아 좀 답답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