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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애에 대한 증명 용의자 X의 헌신
jimmani 2009-04-10 오전 9:12:27 1487   [0]
 

같은 추리라도 그 타겟이 어느 곳에 맞춰지느냐에 따라 뉘앙스는 굉장히 달라진다. 일반적인 추리소설이나 추리영화에 등장하는 추리의 목적은 '누가 그랬는가'이다. 제한된 공간 또는 제한된 시간 속에서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터지고, 등장인물들은 대개의 경우 제한된 인물들 속에서 과연 누가 그 사건의 주범일지를 찾아내는 데 골몰한다. 등장인물들의 알리바이를 추적하고 시간적, 공간적 관계에 적확하게 들어맞는 사건의 흐름을 잡아내는 것이 중요한 이런 경우는 감성보단 이성이 더 많이 작용하는 경우다. 누가 그랬는지를 먼저 찾아내는 게 급선무가 그 누군가가 왜 그랬는지는 그냥 덤으로 알아두어도 좋을 보너스 수준이다.

 

그러나 추리의 목적이 '누가 그랬는가'가 아닌 '왜 그랬는가'로 넘어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 경우 범인이 누구인지는 보통 처음부터 알려지거나 설사 미지의 상태라 해도 금방 쉽사리 드러난다. 중요한 것은 그 뒤에 범인이 왜 그런 일을 벌였는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이것은 알리바이와 증거물들에 대한 치밀하고 논리적인 추적보다, 범인의 심리 밑바닥에 어떤 감정이 깔려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머리를 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추리로 시작하지만 이것은 결국 가슴으로 느껴야 해결되는 문제다. 대표적으로 우리나라 영화인 <오로라공주>가 그랬다. 스릴러로 시작했지만 결국 초장에 알려진 범인이 '왜 그랬는가'에 집중하면서 영화는 비극적인 드라마로 전개되었으니까. 그런 점에서 이 영화 <용의자 X의 헌신>도 유사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겠다. 추리극인 양 위장했지만, 사실 이 영화는 인간 감정의 어떤 지독한 단면을 품고 있는 드라마다.

 

어느 운동장 언저리에서 온통 발가벗겨진 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이 발견된다. 남자의 신원은 무직의 토가시 신지로 밝혀지고, 유력한 용의자로 그의 전처인 하나오카 야스코(마츠유키 야스코)가 지목된다. 야스코가 과거에 호스티스였다가 독립해 도시락 가게를 차렸고, 신지가 살해당하기 며칠 전부터 이러한 야스코의 흔적을 밟았다는 점에서 야스코는 뗄려야 뗄 수 없는 용의선상의 인물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신지가 살해당했을 시각에 딸과 함께 영화를 보고 저녁을 먹었다는 야스코의 알리바이는 어딜 봐도 완벽하다. 이러한 완벽한 알리바이로 인해 난관에 부딪힌 담당 형사 우츠미(시바사키 코우)와 쿠도(단칸)는 쿠도의 대학 동창이자 '갈릴레오'라는 별명의 탐정으로 유명한 물리학자 유카와 마나부(후쿠야마 마사히루)를 찾아간다. 사건의 이면을 파헤치던 중 유카와는 야스코의 이웃에 자신의 대학 동창이자 천재 수학자인 이시가미 테츠야(츠츠미 신이치)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가 이번 사건에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이윽고 오랜만에 재회하게 된 두 사람. 이시가미는 유카와에게 '아무도 풀 수 없는 문제를 만드는 것과, 그 문제를 푸는 것 중 무엇이 더 어려울까?'라는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며 모종의 게임을 제안한다. 과연 이시가미가 만든 이 문제들의 답은 대체 무엇이며, 이시가미는 왜 야스코를 위해 이런 일들을 벌이는 것일까.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영화는 원작자의 성격을 고루 갖고 있다. 이성적 추리력과 감성적 호소력을 모두 곤두세우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얘기다. 미야베 미유키, 온다 리쿠, 기시 유스케 등과 함께 일본 미스터리 문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 영화의 원작자 히가시노 게이고는 미스터리물을 표방하고 있으면서도 그 활용 범위가 매우 넓기 때문에 그만큼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반영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의 소설 원작 영화 중 가장 알려진 편인 <비밀>만 해도 애틋한 로맨스를 밑바탕에 깔고 있으면서도 빙의라는 소재를 가져와 끊임없이 미스터리적인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 단지 추리의 쾌감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전말이 드러내는 인간의 많은 단면들로부터 감정적인 동요까지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용의자 X의 헌신>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난다. 아니, 어쩌면 가장 잘 드러난다고 해도 될 것이다.

 

영화는 초반부터 사건을 별다른 숨김의 구석 없이 웬만한 기본 정보를 다 알려주고, 누가 그랬는지도 버젓이 보여준다. 때문에 범인이 토가시 신지의 전처인 야스코라는 사실은 스포일러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영화가 정작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이 사건을 두고 야스코의 이웃인 이시가미의 태도이다. 이시가미는 천부적인 논리력으로 사건의 알리바이를 완벽하게 만들어나가는데, 도대체 야스코의 이웃에 사는 것 외에는 사건과 별다른 관련이 없는 것같은 그가 왜 이렇게까지 야스코를 도와주느냐가 문제의 핵심이다. 때문에 관객은 1차적으로 알리바이를 끊임없이 만들어나가는 이시가미와 이를 풀려고 안간힘을 쓰는 유카와의 두뇌대결에 집중하면서 2차적으로 그 배경에 깔려있는 이시가미의 심리는 과연 어떤 색을 띠고 있을지에 대한 궁금증을 품게 된다. 이성적 추리 대결로 겉을 포장해 놓고, 사실 중요한 알맹이는 이성과 논리로 다 설명이 되지 않는 인간의 심리 탐구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이에 걸맞게 영화는 탄탄한 대본과 연기력을 고루 갖추고 있다. 물론 워낙에 원작 소설의 밀도가 탄탄하긴 하지만 뛰어난 원작을 영 헐겁게 옮기는 경우가 어디 한 두번이었던가. 그런 점을 비교해 볼 때 영화는 상당히 침착하면서도 분명하게 원작의 매력을 재현한 것 같아 다행이다. 오버하지 않고 어떨 때는 굉장히 자제하는 듯한 영화음악으로 영화의 긴장감을 품격 있게 유지시켜주면서 다른 외적 요소에 휘둘리지 않고 단지 이야기의 팽팽함과 배우들의 꽉 짜여진 감정 연기에 몰두하게 해 준다. 뿐만 아니라 배우들의 연기 또한 이에 부끄럽지 않게 훌륭한데, 특히 이시가미 역의 츠츠미 신이치는 베테랑 배우답게 캐릭터의 매력을 스크린에 완전히 옮겨놓는 데 성공했다. 감정적으로 절대 오버하지 않고 오히려 절제에 절제를 거듭하지만 그의 세심한 표정연기에서 감정의 급격한 변화를 느낄 수 있고, 결말에 가서 완전히 밝혀지는 그의 심정은 그래서 더욱 파괴력 있게 다가온다.

 

이 영화의 감독인 니시타니 히로시는 일본에서 드라마 <하얀거탑>의 연출자로도 유명하다. 그 때문인지, 내가 일본판 <하얀거탑>을 보진 못했지만 한국판 <하얀거탑>을 통해서라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의 분위기가 <용의자 X의 헌신>에서도 풍긴다. 실수는 용납될 수 없는 어떤 심리적인 전쟁터 속에서 결국은 그 모습을 드러내고야 마는 인간의 욕망이 낳는 비극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 공통된다고나 할까. <하얀거탑>에서는 그런 안타까운 욕망이 다소 이기적으로 표출됐다면, <용의자 X의 헌신>에서는 한결 이타적으로 표출됐다는 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영화는 수학, 물리학, 논리학 등 인간의 감성이라곤 끼어들 틈이 없을 것 같은 분야라 해도 그 속에서 감성적 가치를 추구할 수도 있음을 주장한다. 영화 속에서 이시가미는 학창시절 4색 문제를 통해 유카와에게 깊은 감명을 준다. 단지 이치에 맞게 증명되었다면 그걸로 끝이 아닌가 하는 유카와의 의문에 이시가미는 '그 답은 아름답지 않다'고 반박하며 자기 손으로 다시 풀어나가기 시작한다. 이는 세월이 흐른 뒤 야스코의 범행에 가담하게 된 이시가미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사고방식이다. 수학적으로 증명한다는 것은 이성이 움직이는 것이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감성이 움직이는 것이다. '수학적 증명도 아름다워야 한다'는 이시가미의 논리는 일면모순된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런 그의 가치관은 지나온 그의 삶이 낳은 어떤 궁극적인 깨달음도 될 수 있지 않나 싶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활동도 결국 인간적 감성을 그 밑에 깔지 않으면 허황될 뿐이라는 깨달음 말이다.

 

 

영화가 초중반부 이시가미와 유카와의 두뇌싸움에 집중하다가 서서히 사건 뒤에 숨겨진 사연이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영화는 추리물이라기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을 다룬 드라마의 분위기로 전환된다. 세상의 모든 이치는 수학적으로 또는 물리학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믿었던 두 사람 사이에 그런 논리적 면모만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끼어들면서 영화는 자기들이 그전까지 취해왔던 자세에 스스로 의문을 제기한다. 그토록 폼나고 명석한 추리로도 해결할 수 없는, 논리적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지만 정서적으로는 끝내 동조를 하고야 마는 일들도 있다고 말이다. 결국 이시가미는 그 명석한 두뇌로도 자신이 어떻게 제어할 수 없었던 인간에 대한 말로 다할 수 없는 애정을 바탕에 깔고 거대한 논리적 활동을 펼치고, 이것은 비록 도덕적으로 쉽게 용납될 수는 없을지라도 이시가미가 꾸준히 추구해 왔던 '아름다운 증명'의 지점에 가 닿게 되는 것이다. 결국 결말을 수놓는 이시가미의 절규는 그 어떤 자세한 공식으로도 표현될 수 없을 만큼 모호하지만 그만큼 아름다운 '인간의 감정에 대한 증명'이 아닌가 싶다.

 

이렇듯 영화는 치밀한 두뇌게임인 줄로만 알고 접근했던 관객들에게 질 좋은 두뇌게임은 물론이요 예상치 못한 감정적 파장까지 불러일으키고, 이를 통해 이성이 끼어들 틈이 없는 인간애에 어떤 거대한 단면을 생각하게 함으로써 단순히 잘 빠진 미스터리물의 수준을 넘어선다. 이는 탄탄한 원작의 힘이 크지만 그 원작의 매력에 너무 빠진 나머지 성의없이 옮기는 데만 급급하지 않고 영화적 매력과 감정적 깊이를 두루 살리는 데 성공한 연출의 힘도 크다. '기하 문제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함수 문제라든가' 하는 영화 속 대사처럼, <용의자 X의 헌신>은 인간의 이성을 시험하는 추리물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인간의 감성을 검증하는 휴먼드라마다.


(총 0명 참여)
prettyaid
잘읽었어요^^   
2009-06-24 17:22
powerkwd
기회되면 볼께용~   
2009-05-27 15:16
kimshbb
연기들 잘하네요   
2009-05-22 14:50
nf0501
전 처음엔 탐정스릴러(?)인줄 알았어요
데스노트같은 느낌?!으로 양쪽이 대립하며 밝히고 범죄를 저지르는
그런데 전혀 다르더라구요
나름 매력있었어요!^^
하지만 저한텐 약간 지루한 장면들도 없진 않았어요
모두 필요한 장면이었긴 하지만요   
2009-04-13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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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2008, 容疑者Xの獻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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