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이 세상이 누군가의 조작으로 이루어진 세계라면? 나의 기억이 정말 내가 경험하고 느낀 기억인가? 내가 진실로 믿고 있는것이 허구라면?
이런 생각들은 수 천년간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주제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이 세계의 진정성에 대해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나 자신 외에 타인의 존재라는 것이 정말 실재하는가라는', '나의 존재는 무엇인가' 등의 질문도 관념론자들이나 실재론자들에게선 끊임없이 되풀이 되어온 명제들이다.동서양을 막론하고 철학자들은 우리가 지금 보고있는것이 환상이나 꿈이 아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인가를 탐구했었다.
이런 철학적인 질문과 동, 서양의 사상을 결합 시켜 만든 영화가 바로 매트릭스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사실 기계들이 창조해낸 가상 공간인 매트릭스이며, 인간은 기계들에게 사로잡혀 생체에너지를 제공하면서, 매트릭스 안에서 가상으로 살아가고 있다.'라는 충격적인 내용과 헐리우드 CG 기술의 정점을 보여준 장면들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었다.
그러나 이런 내용의 영화는 매트릭스가 처음이 아니었다. 매트릭스가 나온지 1년 전인 1998년에 이미, 알 수 없는 존재들에 의하여 조작된 채 영원히 반복되는 어둠속에서 사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준 '다크시티'라는 영화가 있었다.
이 영화의 내용은 참신함을 넘어 충격적인 수준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외계인들이, 그들만의 특수한 능력으로 우주 한 공간에 '다크시티'를 창조하여, 그곳에서 인간들을 실험체로 연구를 한다.'는 내용은 쉽게 상상하기 힘든 내용이다. 이 영화에서 외계인들은 튜닝 능력이라 불리는 특수한 능력으로 도시를 창조하고, 변형시킨다. 도시는 언제나 자정 12시를 넘기지 못한다. 사람들은 12시가 되면 잠들고, 다시 깨어났을땐 또 다시 밤이 지속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기억을 조작당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조작된 기억을 가지고 영원히 반복되는 밤에서 살고 있다는걸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나 영화의 첫장면에서 보여주듯 호텔 방에서 깨어난 주인공은 그 모든 통제에서 벗어나 있다. 정체불명의 외계인들과 똑같은 능력을 쓰며,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끊임없이 탐구를 하며 어두운 밤 거리를 돌아다닌다.
이렇듯 '다크시티'의 기본 토대가 되는 스토리는 활기차고, 참신함이 흘러 넘친다. 그러나 그 뿐이다. 마치 블레이드 러너를 보는 것 같은 어둠고 쓸쓸한 도시와, 영화 전개 과정에서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건전환, 개연성과 인과관계의 부족, 허공에 붕 뜬거같은 영화의 등장인물들... 배우들의 연기는 영화와 매끄럽게 연결되지 못했고(특히 키퍼 서덜랜드의 연기는 영화의 집중을 극도로 어렵게 만들었다.), 어설픈 cg와 마지막 결투 장면들은 전형적 헐리우드 b급 물을 보는것과 같은 느낌에 실소를 하게 만들었다. 특히 결말 부분에서 갑자기 절대적인 신과 같이 변하는 주인공을 보면서 '저래도 되는 거야?'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로보캅3에서 갑자기 아톰으로 변신해버린 로보캅을 보는 기분이랄까.) 며칠 전만 해도 조작된 기억속에서 자신의 존재에 혼란스러워 하던 주인공이, 갑작스럽게 자신의 부인이라 설정된 여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 묻는 외계인에게 '중요한 건 머리속에 있는게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거야.'라고 말하는 장면은 마치 일본 소년만화의 결말을 연상짓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매력적이다. 수 많은 상징들은 영화가 가지는 의미를 더욱 확장시켰다. 시퀀스에서 어항이 깨지고, 깨진 어항속에 들어 있던 물고기를 더 넓은 욕조속에 넣는 장면은 주인공의 정신 상태의 해방을 의미한다. 그리고 주인공이 그토록 가고 싶어하는 쉘 비치란 해변은, 인간이 자신의 조상들이 바다속에서 부터 진화해왔기에 본능적으로 그리워 하는 바다를 의미한다. 또한, 물을 무서워 하는 외계인들과는 근본적인 것이 다르다는 것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을것이다. 이 외에도 수많은 상징들이 존재한다. 이런 의미들은 당시에는 그저 스쳐지나갔더라고, 후대에 마치 '블레이드 러너'와 같이 재발견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바램은 다음년도에 나온'13층'과 sf혁명을 일으킨 '매트릭스'에 의해서 가능성조차 사라져버렸다.(역시 영화는 시대를 잘 타야하는가 ㅇㅇ)
나에게 있어 이 영화가 채택되어 감상평을 쓰는 거 자체가 불운한 일인듯 싶다. 어린 시절에 나름 인상깊게 보았던 영화였는데, 각 잡고 블루레이로 감상하니 상당히 조잡스러운 영화였다니... 무한 스킵을 통해 다시 본 이 영화는, 참신함 외엔 남는것이 없는 전형적인 헐리우드로 기억되게 되었다. 단,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며 매력을 뽑내던 제니퍼 코넬리와, 자칫 중심을 잃을뻔한 영화를 묵직하게 붙잡아 두었던 명배우 윌리엄 허트의 모습만은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사실 이 영화를 보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걸 보고 나서야 그 배우가 윌리엄 허트라는걸 알게 되었다. '거미여인의 키스'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지만, 우리나라에선 사실 알려질 기회가 없었고, 나 역시 마찬가지 였다.(어디서 많이 봤던 얼굴인데... 참 연기 잘하네.. 영화 끝나면 누군지 확인해야지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나선, 윌리엄 허트가 결코 우연히 오스카 트로피를 가져간 것이 아니다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으니, 그나마 영화를 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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