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은퇴하라고 명령할 사람은 오직 관객뿐.. ★★★★
극단적으로 폄하하자면 기껏해야 미국 국내 영화제일 뿐인 오스카지만 현실적인 영향력이나 무게는 무시할 수 없는 것. 게다가 오스카를 품에 안는 작품들은 다른 세계적 영화제의 작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중들이 끌어안기에 좀 더 수월한 측면도 존재한다. 아무튼 매년 이맘때만 되면 영화 팬들은 즐겁다. 왜냐면 오스카에 노미네이트된 영화들이 대부분 시상식을 전후로 국내 개봉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이번 2009년 오스카 시상식에서 가장 안타까운 장면은 숀 펜이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장면(?)이었다. 숀 펜이야 이미 남우주연상을 탔었고, 앞으로도 탈 가능성이 많이 있을 것 같아 숀 펜이 남우주연상을 타는 건 왠지 좀 아깝다. 그러나 미키 루크가 앞으로 배우 생활을 계속한다 해도 <더 레슬러>와 같은 작품을 또 만날 수 있을까? 글쌔.....
영화가 시작되면 Quiet Riot의 <Bang Your Head (Metal Health)>를 배경으로 1980년대 최고의 레슬러였던 랜디(미키 루크)의 활약상이 담긴 신문기사들이 지나간다. 그리고 20년 후 늙고 쇄락한 모습의 랜디가 의자에 앉아 있는 뒷모습으로 이어진다. <더 레슬러>에는 유달리 랜디의 뒷모습을 비추는 씬들이 종종 등장한다. 이는 마치 삶의 뒤안길, 저물어가는 뒷골목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영화에선 또 종종 랜디의 거친 숨소리를 세밀하게 들려준다. 눈으로 귀로 전해지는 랜디의 낡은 육체가 내는 파열음은 곧 랜디의 현재를 은유적으로 대변해 준다.
이 영화는 레슬러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랜디의 삶은 레슬링 그 자체다. 심지어 건강 때문에 레슬링을 포기하고 평범한 매장 직원으로 근무하는 날, 매장에 입장(!)하는 랜디의 모습은 관중들의 환호성 소리를 배경으로 경기장에 입장하는 선수로 표현된다. 그러나 프로레슬링하면 한국 사람들, 특히 70년대 프로레슬링의 황금기를 경험했던 세대들이 떠올리는 건 ‘속임수’ 또는 ‘쇼’와 일맥상통한다. 김일, 여건부, 천규덕 등을 거치며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프로레슬링은 본질적인 다른 요인이 있겠지만, 대중에게는 “한국 레슬링은 쇼”라는 한 현역선수의 발언과 함께 사그라진 것으로 기억된다. 잘 보지는 않지만 쇼의 형식을 극대화한 현재의 미국 레슬링을 보면, 사실 프로레슬링이 진짜냐 가짜냐의 차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더 레슬러>를 보면 프로레슬링이 진짜냐 가짜냐보다 중요한 건 그런 주장으로 인해 가리워진 레슬러들의 피와 땀임을 알 수 있다. 링에 올라가기 전 선수들은 시나리오를 검토하고 좀 더 그럴듯한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합을 맞춘다. 그러나 이런 모습을 보고 ‘레슬링은 쇼’라고 쉽게 비판하기엔 이들이 흘리는 피와 땀은 ‘쇼’라는 어감의 가치를 훌쩍 뛰어넘는다. 이들이 자신들의 몸을 혹사해가며 ‘쇼’를 하는 이유는 관객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이다. 면도칼을 잘게 조개 이마에 상처를 내기도 하고, 높은 사다리에 올라가 철조망 위로 몸을 던지기도 하며, 몸에 스테이플러 침을 박아 넣기도 한다. 영화는 레슬러들의 ‘쇼’를 마치 흐르는 피와 고통을 직접 느껴보라는 듯 세밀하게 살핀다. 이중 가장 압권은 두 번째 레슬링 장면이었다.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된 채 라커룸에 들어와 있는 ‘랜디’의 몸을 구석구석 비추며, 상처 하나하나마다 경기를 리와인드해 들어가 상처의 원인을 살피는 그 장면은 너무 고통스러울 정도로 끔찍하다.
그러나 그런 고통에도 불구하고 한물 간 레슬러의 삶을 살피는 카메라는 시종일관 무심한 듯 거리감을 유지한다.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데, 영화를 본 다음에 확인해보니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이런 느낌을 주기 위해 일부러 다큐멘터리 전문 촬영감독을 섭외했다고 한다. 역시 치밀한 준비 없이 우연히 그런 장면, 작품이 나올 수는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이 영화는 과거, 특히 1980년대의 향수를 그리고 있다. Quiet Riot, Ratt, Scorpions 등 80년대를 풍미했던 락그룹의 노래가 연신 울려 퍼지고, 벽면엔 AC/DC의 포스터가 붙여져 있다. 80년대 하드락을 역사의 뒤안길로 떠나보낸 Nirvana에 대한 험담(?)이 들려오는 반면, 오랫동안의 공백을 깨고 2008년에 화려하게 복귀한 Guns N`Roses를 칭송한다. 랜디는 그 흔한 핸드폰 하나 장만하지 못한 채 공중전화를 이용해, 딸 스테파니(에반 레이첼 우드)의 집으로 전화를 한다. 그러고 보면, 화려한 날을 뒤로하고 만신창이가 된 육체를 끌고 마지막 최고의 복귀전을 치른 랜디와 Guns N`Roses의 이미지는 겹치고, 랜디가 유일하게 소통하는 캐시디(마리사 토메이)는 이젠 아무도 찾지 않는 늙은 스트립걸이란 점에서 역시 동일하다. 이렇듯 <더 레슬러>는 지나간 과거를 애잔한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마지막으로 <더 레슬러>는 미키 루트를 빼 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아니 <더 레슬러>는 미키 루크 그 자체다. 처음에 니콜라스 케이지가 주연으로 거론되었다는데, 만약 미키 루크가 아닌 다른 배우가 이 역을 맡았다면 단연코 지금과 같은 평가는 얻지 못했을 것이다. 1981년 <보디 히트>를 시작으로 <나인 하프 위크> <와일드 오키드>를 거치며 세계적 섹스 심벌로 떠오른 미키 루크. 배우를 마다하고 권투선수가 된 미키 루크는 8전 6승 2무 4KO라는 썩 괜찮은 성적을 올렸지만, 코와 발가락, 갈비뼈가 부러지고, 혀가 찢어지고 광대뼈가 함몰되는 부상을 입은 채 1995년 선수 생활을 중단한다. 그러나 육체적 부상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아내에 대한 폭행과 음주 운전 등으로 그의 이력은 완전히 망가진 듯 보였다. 그랬던 미키 루크가 다시 스크린을 통해 모습을 보인 건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의 <신 시티>를 통해서였다.(나는 <신 시티>에 미키 루크가 나온다는 얘기를 듣고 열심히 봤지만, 도저히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만큼 망가져 있었던 것이다.)
랜디는 마지막 경기를 위해 링에 올라 마이크를 잡고 마치 유언과 같은 말을 남긴다. “다들 내가 링에 못 오를 줄 알았지만 이렇게 왔습니다. 솔직히 젊었을 때 막살다 보니 남은 건 고통스런 현실뿐이고 결국 사랑하는 사람까지 다 떠났죠. 이제 귀도 어둡고 기억력도 가물가물, 예전만큼 섹시하지도 않아요. 하지만 나 랜디 램, 살아 있습니다! …(중략)… 저는 절대 링을 떠날 수 없어요. 여러분이 있으니까요! 바로 이 함성소리가 내 심장의 피가 되어 날 다시 뛰게 합니다!” 랜드는 미키 루크이고, 미키 루크는 랜디인 것이다.
※ 쇼라는 차원에서 보면, 마지막 랜디의 경기 모습은 정치적인 해석으로도 가능할 것 같다. 랜디의 상대는 중동 지역을 연상시키는 코스튬에 국기를 흔들어 대며 도발한다. 관객의 야유가 쏟아지고, 랜디는 힘겨운 싸움을 벌인다. 그러나 모두는 알고 있다. 랜디가 중동의 전사를 꺾을 것임을. 이 과정을 통해 레슬링을 보는 관객의 애국지수는 급격히 상승한다. 즉, 부시 시대의 광기서린 애국주의는 쇼에 불과하다.
※ 역시 쇼라는 차원에서 랜디와 캐시디 사이에 재밌는 대화가 오고간다.
캐시디 : "싸움을 다 짜고 한다는데...."
랜디 " "가짜라고? 이것을 봐. 1986년, 덴버 경기장에서 빌리 밥 반죠가 각목으로 나를 쳤지. 숨겨져 있던 못이 내 이두박근을 쪼갰어. 이것봐, 1988년 올란도 시빅 센터, 미스터 장이 날 던져서 여기가 두동강 났지"
캐시디 : "어머나, 아팠나요?"
랜디 : "숨쉬면 아팠지, 그런데 관중들이 환호하는것을 보면, 참을수 있지."
캐시디 : "그는 우리 죄를 위하여 못에 박혔고,그의 고통은 우리들에게 평화를 주었으며,그의 상처로 우리는 낫게 되었으니..."
랜디 : "무슨 소리야?"
캐시디 :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예수님이랑 머리가 같아요, 본 적 없어요? 두시간 동안 죽도록 패죠, 그래도 참아내요"
랜디 : "터프가이 였군..."
※ 개인적으로 가장 감명 깊었던 장면은 돈을 받으며 사인을 해주고 사진을 같이 찍어주는 행사에 참석한 랜디가 오래 전 동료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장면이었다. 랜디의 시선으로 처리된 동료들의 모습. 그들도 과거의 어느 때엔가는 관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스타로 군림했던 선수였을 것이다. 그랬던 그들이 지금은 텅빈 체육관의 책상에 앉아 올지, 안올지 기약할 수 없는 과거의 팬을 기다리고 있다. 꾸벅꾸벅 졸며. 아.. 너무도 애닮은 풍경으로 인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 프로레슬링의 팬들에게 이 영화는 당연히 소중한 작품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그 동안 프로레슬링을 거의 안 봤던 나의 경우를 보자면, 영화를 보고 났더니 외연의 화려함 뒤에 담겨 있는 선수들의 고통이 떠올라 앞으로는 더 못보게 될 것 같다. 프로레슬링의 저변 확대를 위해서라면 <더 레슬러>의 효력은 오히려 부정적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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