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도와주면 안 되겠니?? ★★☆
<베니스의 상인>의 안토니오가 1파운드의 살점을 내놓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다면 7파운드의 무엇인가를 내놓기 위해선 무엇을 걸어야 하는 것일까? 제목을 <베니스의 상인>에서 착안한 영화 <세븐 파운즈>의 주인공 벤(윌 스미스)은 한 순간의 실수로 모든 것을 잃은 후 세상에 진 빚을 갚아야 한다는 죄책감에 특별한 계획을 세운다. 그는 자신이 도울 수 있는 7명의 사람을 선정해 그들에게 행복을 나눠주려 한다. 그러나 대상자 중 한 명인 에밀리(도자리오 도슨)를 사랑하게 되면서 자칫 계획은 어긋날 위기에 처하지만, 에밀리에 대한 감정이 진정한 사랑임을 깨닫는 순간, 그는 오랫동안 계획해온 일을 실행에 옮긴다.
사실 기본 시놉시스를 읽고 영화를 본다 해도 벤이 대체 왜 저런 행동을 하는 지, 그 동기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물론 벤의 계획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가늠할 수는 있다. 하지만 워낙 파편적으로 던져지는 힌트는 전체적인 윤곽을 그리기엔 턱 없이 부족하다. 예를 들면, 해파리를 키우는 이유 같은 것들.
<세븐 파운즈>의 감독이 <행복을 찾아서>의 가브리엘 무치노 감독이고 윌 스미스가 똑같이 주연을 맡았으며, 휴먼 드라마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비슷한 색채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행복을 찾아서>를 보고 무한한 감동을 느꼈다고 하면 <세븐 파운즈>에서도 비슷한 감동을 느끼게 될 가능성이 높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뒤집어서 말해도 결과는 동일하다.
결론적으로 나는 <행복을 찾아서>을 보고 좀 찝찝함을 느꼈다. 불우한 환경과 흑인이라는 이중의 어려움을 딛고 성공한 사업가가 된 한 남자의 실화를 그린 <행복을 찾아서>는 주제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인 건 사실이지만, 어쩌면 주인공보다 더 불우한 환경일지도 모를 수 백 명의 낙오자들에겐 완벽한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비정함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가난의 극복을 전적으로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지는 것으로 묘사한 것도 별로였다.
<세븐 파운즈>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의 마지막에서야 밝혀지는 벤의 동기와 계획이 눈시울을 적시게 할 만큼 감동적인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도움을 받아야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를 일일이 밝혀가며 도와줘야 하는 것인지 난감할 따름이다. 도움을 받기 위해 어떤 자격이 필요한지도 좀 의문이다. 어떤 경우엔 벤이 직접 전화를 걸어 일부러 시비를 걸어 대상자의 인격을 확인하지만, 또 어떤 경우엔 그저 아는 사람의 추천 하나로 선뜻 도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하나 기억해야 할 점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 위해선 아무리 싸가지 없고 개망나니가 시비를 걸어와도 그저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점이다. 인격적으로 완벽한 사람만이 타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누구는 이런 설정이 일부 오버스럽긴 해도 전반적으로 감동적인 스토리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 말과 함께 내가 도와줄 사람을 내가 선정하는 방식에 동의한다고 해도 꼭 착한 사람만이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점에는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 어떤 사람은 타인의 도움을 받음으로서 개과천선할 수도 있지 않을까? <행복을 찾아서>가 주인공을 제외하고 경쟁에서 낙오한 수 백의 사람들을 외면했던 것처럼 <세븐 파운즈>는 주인공의 도움을 받게 된 7명의 행운아 외의 사람들에 대해선 침묵하고 있다. 어쩌면 가브리엘 무치노 감독의 눈엔 어떤 식으로든 선정되었거나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보이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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