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지독한 멜로라니....★★★☆
사실상 원나라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던 고려 말, 왕(주진모)은 어린 시절부터 궁에서 훈련시킨 꽃미남 친위 부대 ‘건륭위’를 거느리고 있으며, 건륭위의 총관인 홍림(조인성)은 왕의 사랑을 독차지 한다. 원에서 온 왕후(송지효)는 자신을 멀리하고 홍림만 가까이 하는 왕의 처사에 외로운 나날을 보내는데, 후세자가 없다는 이유로 고려 왕실을 압박하는 원으로 인해 왕은 홍림으로 하여금 왕후와 관계를 맺게 한다. 왕과 홍림의 사랑은 홍림과 왕후가 관계를 맺으면서 미묘하게 벌어지고 셋의 얽힌 사랑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쌍화점>은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드는 여러 장치를 제거한다면 매우 단순해진다. 사랑하는 둘 사이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옴으로서 기존 둘의 관계는 멀어지고, 사랑은 집착이 되고, 집착은 증오로 변한다. 이런 식의 구도야 너무 식상할 정도로 뻔하지만, 처음 둘이 동성이라는 점은 그 식상함을 넘어선다. 어릴 때부터 동성애만이 유일한 사랑이었던 홍림은 왕이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갖게 된 왕후와의 관계 이후에 이성애자로서의 성 정체성에 눈을 뜨게 된다. 동성애자였다가 이성애자로의 정체성을 자각한다는 설정은 가볍게는 <인 앤 아웃>에서 진지하기로는 <브로크백 마운틴>까지 동성애를 다룬 많은 영화들과 비교해 전복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건 매우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지점이지만, 이러한 도치된 설정만으로도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한 단계 상승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셋의 사랑은 그 색깔을 조금씩 달리한다. 그 중에서 가장 압권은 홍림에 대한 왕의 집착이다. 집착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실 그 경계는 매우 희미하다. 사랑, 집착, 증오는 어떻게 보면 그 경계선이 무의미한 지점들이 있다. 왕의 홍림에 대한 사랑은 집착이 되었다가 남근을 제거해버릴 정도로 증오로 변하지만, 남근을 제거하고 왕후의 목을 내 걸면서도 홍림을 옆에 두고 싶어 한다. 사랑, 집착, 증오의 감정은 분리되지 않고 순간 순간 그 색깔을 달리한다.
왕후의 사랑은 육체적이라기보다 진실한 사랑(그런 게 있다면)에 좀 더 가까워 보인다. 아무도 의지할 데 없는 고려의 왕실에서 그녀가 느꼈을 외로움이 어떠하리라는 걸 짐작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왕은 왕후에게 ‘나는 여자를 품을 수 없는 몸이오’라고 선을 긋는다. 어쩌면 왕후에게 육체적 관계란 한낱 둘의 관계를 외적으로 표현하는 상징에 불과했을 지도 모른다. 그녀에겐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여 주고 눈길을 주는 그 누군가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게 홍림이든 왕이든.
홍림의 사랑은 어떻게 보면 발정난 청소년기(?) 같은 느낌도 들고 좀 더 그럴듯하게 표현하자면 성장통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처음 느껴보는, 그리고 처음 경험해보는 여성의 육체는 왕 밖에 몰랐던 그를 미쳐버리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물론 그렇다고 홍림의 육체를 갈구하는 사랑이 진실된 사랑이 아니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좋아한다는 말을 하고 났더니 실제로 좋아지는 감정이 생기기도 하며(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 언어의 물질화), 육체적 관계를 갖고 나서 사랑하는 감정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뻔히 파국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마치 불나방처럼 불을 향해 돌진하는 세 인물의 감정선은 매우 강렬하고 집요하며 날카롭다. 여러 비판이 제기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밀고 나간 유하 감독의 뚝심은 그의 이름에 대한 신뢰를 한 층 높여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이 영화에서 가장 박수를 많이 받아야 될 대상은 결코 쉽지 않았을 배역을 선택한 세 명의 배우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약 다섯 번에서 여섯 번 정도에 걸쳐 등장하는 섹스신은 최근 그 어떤 영화보다 농밀하며 수위가 높다. 이런 장면을 이유로 이 영화를 단지 ‘에로 사극’ 정도로 표현하는 건 적확한 표현은 아니다. 주진모와 조인성이 벌이는 동성애 장면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하고 나머지 섹스 장면은 조인성과 송지효의 성 관계 장면들이다. 동성애 장면이 한 번에 그쳤다는 건 이 영화에 건 야오이족들의 기대를 조금은 빗나간 부분일 테지만 그럼에도 ‘헉’ 소리가 나올 정도로 매우 수위가 높다. 조인성과 송지효의 장면들은 둘의 관계가 진전될수록 수위가 점점 높아진다. 처음 단순히 삽입 정도로만 그려지는 둘의 섹스는 소위 ‘69 체위’까지 수직 상승한다.
그렇다고 노출 때문에 배우들이 박수 받아야 하는 건 아니다. 조인성의 경우 좋은 연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나쁜 연기도 아니었다. 다만, 대한민국 영화대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정도의 배우가 보여준 연기치고는 미흡했다. 약간은 퇴폐적 느낌의 눈빛을 지닌 송지효는 미스캐스팅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무참히 무너뜨릴 정도의 호연을 보여주었으며, 무엇보다 주진모의 연기가 탁월했다. 그의 홍림에 대한 사랑과 증오를 표현하는 눈빛은 보는 나 자신의 가슴을 절절하게 울릴 정도로 설득력이 높았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지루하다는 비판, 특히 후반부에 대한 비판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전문가 시사회에서 많은 전문가들의 지적을 받은 후 10분이나 줄여 편집했다고는 해도 여전히 지루하고 늘어진다. 이제 마지막이구나 하는 장면이 파고를 넘고, 이제 정말 마지막이구나 하는 장면에서 또 한 번의 파고를 넘는다. 유하 감독으로서는 그런 파고를 통해 감정이 점점 고양될 것이라고 판단했을지 모르지만 그런 파고를 통해 오히려 격정은 잦아들고 차분해 진다. 다른 볼거리나 상황을 배제하고 셋만의 감정만으로 133분을 끌고 가기엔 확실히 벅차 보인다.
※ 개봉 첫 주에 100만을 넘었다며 떠들썩하다. 실제 극장에 가보니 흥행의 견인차는 중년 여성임에 틀림없다. 조조로 봤음에도 여기저기 단체로 40대 정도의 여성들이 앉아 있더니 조인성의 노출 장면마다 한숨(?)소리가 들린다. 그러더니 왕이 홍림을 거세하라는 장면에선 비명소리까지 들린다. 조인성, 이 정도면 군대 입대를 앞두고 최고의 선물을 받은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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