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시사회 인터뷰에서 주진모가 한 말이 기억난다. 쌍화점을 정말 재밌게 보려면 세 인물 중 마음에 드는 이를 찍어서 그를 따라 영화 끝까지 가라고. 그래서 난 영화 시작 전부터 그런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난 왕(주진모 분)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근데 문제는 대부분의 관객들이 그렇다는 거다. 과연 홍림과 중전을 끝까지 따라간 관객들이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나는 문득 그런 의문에 빠지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오른 왕은 사춘기가 지나면서 여인에 대한 지극히 당연한 관심이 자신에게는 없음을 어느 순간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어린 자신을 보호하고 또 그런 자신의 정체성을 우회적으로 표현해줄 건룡위가 필요해진 것이다. 그래서 그는 36명의 미소년으로 모여진 건룡위와 함께 정치 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중 눈에 띠는 한 명 홍림이 있었다. 둘은 어릴 적부터 모든 것을 늘 함께하는 형제와 같으면서도 그 선을 넘는 사이가 된다. 여기서 포인트는 왕은 여인을 사랑할 수 없는, 그러면서도 남자라면 홍림밖에 사랑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한다면 홍림은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와 왕의 총애를 받으며 자라난 즉 진정한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지 못한 채 일방적인 왕의 애정에 길들여진 채 지내온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감독은 아마도 이 점을 중전과의 돌이킬 수 없는 사랑의 도화선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 같다.
원에서부터 정략적으로 고려왕에게 시집을 온 연탑실리 공주...중전, 그녀다. 자신이 처음 고려에 발을 내딛던 순간 왕은 홍림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고려에 온 그 순간부터 왕에게만은 환영받지 못하는 그런 여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부인의 본분으로 국모의 본분으로 자신에게 차갑디 차가운 그러면서도 자애로운 왕에게 순정을 바치며 살아왔다. 그런 그녀의 앞에 놓인 홍림과의 대립합궁, 그것이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것이다. 감독의 의도만 놓고 본다면 왕비는 매우 청순가련하면서 정숙한 느낌에서 한 남자의 애정을 받으면서 정열적이고 맹목적인 여성으로 변해야만 하는 역이다. 물론 감독이 의도대로 영화를 못만든 탓도 있지만은 송지효도 시종일관 똑같은 대사톤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얼굴이 참으로 나의 몰입을 방해하고 있었다. 게다가 홍림과의 동침 이후 그에게 끌리기 시작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왕비의 모습이 관객들로 하여금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빨랐다. 홍림과 중전은 말도 안되게 급속도로 서로에게 빠져버리고 만 것이다.
예고편만 보면 꼭 이 영화의 주인공인 것만 같은 홍림(조인성 분) 어린 시절 궁으로 불려들어와 건룡위에 들어가고 왕의 총애를 받으며 건룡위의 수장으로 자라난다. 공공연하게 왕의 애첩이기도 한 그는 잠자리도 취미생활도 모든 것을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다. 왕을 사랑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고 자신의 인생의 중심이 그라고 믿으면서 살아왔다. 우물안의 개구리처럼 다른 것은 본 적도 느껴본 적도 없었으니까. 그러던 어느날 대립합궁으로 여인과의 사랑에 눈을 뜨게 되고 처음 느껴보는 어색하면서도 격정적인 감정은 그를 왕으로부터 돌아서게 한다. 홍림에게 왕은 형제 또는 부모와 같은 존재다. 자신을 이날까지 지켜봐주고 보호해준 은혜로운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빚진 마음으로 그를 보필하고 안아왔다. 애정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것은 왕이 홍림에게 갖고 있는 연모의 감정과는 판이한 것이다. 홍림은 역사 속에서는 자신을 총애한 공민왕을 배신한 소인배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자신을 감싸고 있는 운명에 휩쓸려 왕을 여전히 아끼면서도 그에게 등을 돌려야만하는 복잡한 감정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어있다. 근데 여기선 감독 디렉션의 문제를 넘어선 조인성의 연기력의 한계가 문제였다. 그는 '여전히 발리에서 생긴 일' 속에 있는 재벌남 재민 인 것만 같았다. 특히 쌍화병을 먹으며 울먹이는 장면은 이수정과 전화통화하는 그 레전드 씬과 똑같았다. 당황해도 갈등해도 슬퍼도 분노해도 그의 표정은 정말이지 정지화면처럼 똑같았다. 사극인데 말투는 그냥 논스톱이고 이런 말까지 는 그렇지만 베드씬이 워낙 많이 나오는 관계로 얘기해야만 하겠다. 참 쑥맥일 나이도 아닌데 보는 사람이 너무 어색하다. 그건 송지효도 마찬가지다. 다른 영화 였으면 베드씬 그까이꺼 이러고 말겠지만 색계를 넘어보겠다는 둥 허풍이 너무 심했기도 했고 대여섯 번이나 계속 등장하기 때문에 극을 끌어가는 일종의 도구라 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하 감독은 베드씬이 너무 많아 자르려다가 감정이 점점 진해져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다 살렸다고 했는데 이건 첫날밤도 그 다음도 그 다음의 그 다음도 여전히 어색해서 보는 사람 손발을 다 오그라뜨린다.
마지막으로 주진모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다. 진짜 이 영화는 주진모의 영화다. 왕이 주인공 같고 왕을 측은해하고 그에 홍림과 중전에게 분노하면서 이 영화를 보았다. 아마도 기자시시회에서 한 말은 자신의 캐릭터에 대한 자신감 때문이었던 듯 싶다. 예전에 노희경이 쓴 연말 특집으로 2부작 동성애 드라마에 출연한 적이 있던 그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동성애가 주제였으니 난 그 때 정말 놀랐다. 하지만 지금 그 작품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단막극이기도 하다. '슬픈유혹' 속의 '준영'과 비교하면 '쌍화점'의 왕이 되어있는 주진모는 정말 너무나 깊어졌다. 눈빛으로 모든 것을 표현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감동했다. 나는 주진모라는 배우를 늘 보면서도 별로 안좋아했었는데 이 영화를 보고는 마음이 바뀌었다. 참 대단한 배우다. 연모의 따스함과 질투의 어지러움 표정이 미묘하고 설득력있게 변하는 모습이 진짜 다른 두 배우와 비교가 됐다.
연기력으로나 캐릭터로나 조인성과 송지효는 주진모에게 한참 밀려났다. 세 인물 중 한 명을 따라가라는 말이 거의 불가능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홍림과 중전은 어쩔 수 없이 격정의 사랑으로 빠져들어 장렬하게 파국을 맞이하는 느낌이라기 보다는 이 치정극의 중심에서 일을 더욱 복잡하고 짜증나게 만드는 배신자들인것처럼 느껴졌다. 유하 감독의 영화는 볼 때마다 마음에 안드는 부분이 좀 있는데 이번 영화는 통으로 잘못 만들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나 웬만한 대사는 전부 상영관을 빵터지게 만들었다. 격정의 고려는 개콘이나 웃찾사보다도 빅웃음을 주었다. 어떤 면에서는 쌍화점은 진짜 재미있는 영화이기는 했다.
감독의 의도는 알겠는데 결과는 관객들을 폭소하게 만들었다. 조인성의 역작이 될 줄 알았지만 결국 이건 주진모를 기사회생하게 할 작품이 되었다. 송지효는 눈 딱 감고 작품을 위해 투혼을 발휘했지만 베드씬은 색계를 못넘었다. 미소년 36명은 알고보면 6명 정도만 제대로 나온다. 대사 있는 건 넷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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