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우리 모두는 베로니카 게린의 집요함을 두려워하는 지도 모른다...★★★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만드는 조엘 슈마허 감독은 작품마다 부침이 심하다는 평가를 듣는다. 대단히 좋은 작품도 있지만, 또 대부분은 별다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조용히 묻힌다. <베로니카 게린>은 후자에 가깝지 않을까. 물론, 이 영화는 계몽을 위한 영화는 아니다. 그럼에도 이 좋은 실화를 가지고, 그것도 연기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케이트 블란쳇을 주인공으로 해서, 이 정도의 범작을 만들었다니, 조금은 안타깝다는 생각도 든다.
누구라도 아일랜드 더블린 빈민가의 아이들의 마약 주사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현장을 발견한다면 분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찰에 신고하는 정도로 분노를 감내할 것이다. 더군다나 길거리에서 마약업자들이 배신자를 고문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동네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베로니카 게린(케이트 블란쳇)은 단지 분노에 그치지 않고 마약 업자들과의 개인적 전쟁을 수행해 나간다. 그녀는 대단한 속도광이고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매력을 충분히 이용할 줄 아는, 그리고 그것이 충분히 가치 있는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확신하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다.
영화는 처음 부분에서 결말 - 피살당하는 베로니카 게린의 최후 - 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경찰도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는 마약업자에 대한 실체를 추격해가는 베로니카 게린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던 존 길리건(제라드 맥솔리)을 주목한다. 그녀에 대한 위협은 그로부터 본격화된다. 그녀와 일종의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존 트레이너(키애런 하인즈)는 그녀를 존 길리건으로부터 떼어 놓기 위해 잘못된 정보를 흘리지만, 그녀의 확신은 흔들리지 않고 존 길리건으로부터 직접적인 폭력을 당하기도 한다. 영화는 그녀가 죽은 후 구구절절 그녀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범죄와의 전쟁’이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지를 늘어놓지만 그녀가 왜 그러한 전쟁을 수행하려 했는지는 잘 설명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저 정의감 때문인 것인지, 자신의 아이를 포함하는 청소년에 대한 책임감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저 공명심 때문인지 좀 아리송하다.
그래서일까? 영화에서 보이는 베로니카 게린에 대한 주위 반응은 극단적이다. 그녀의 성공은 오로지 몸을 잘 굴려서 얻은 과실로 보기도 하고, 뭔가 음흉한 원인 또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단정 짓는다. 심지어 거짓 기사로 인기를 얻었다고 믿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공명심으로 어떠한 정의로운 행동을 한다 해도 그것을 공격할 이유도, 명분도 없다고 생각한다. 가수 김장훈이 개인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 기부를 하고, 독도 운동을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사회적으로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면 좋은 것 아니겠는가. 그러한 결과로 국회의원이 된다한들 왜 그것이 공격받아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일반적으로 우리는 사회적인 부정을 집요하게 파헤치는 사람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처음에 어떤 문제가 살짝 건드려 질 때는 박수치고 환호하며 격려를 보낸다. 그러다 그것이 장기화되고 집요하게 파헤쳐지면 불편해하고 무관심해 지려 노력한다. 아마도 그것은 나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나 또는 사회가 정의로워지고, 투명해지는 것이 나에게도 불편해지는 결과를 낳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무 깨끗한 물에서는 고기가 살지 않는다’라며 약간(?)의 부정부패를 용인해주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 모두는 공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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