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교에서 연계전공으로 '실버산업 컨설팅'을 했다. 인간의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보통 65세 이상으로 정의되는 '노인'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세계는 지금 노인시장에 눈을 뜨고 있다. 고정적 수입원이 없는 노인들은 대부분 돈을 소비하면서 여생을 지내게 된다. 최근 베이비붐 세대들이 경제적으로 넉넉한 사람이 많은 상태에서 은퇴시기가 되고 있어서 이들 시장이 많이 주목받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내가 뜬금없이 실버산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유는 별거 없다. 사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영화의 제목을 처음 접했을때 나는 이 영화는 분명 다큐멘터리일 것이다라고 생각했었다. 이때는 이 영화에 대한 정보는 단 한가지도 없었다. 왠지 제목만을 놓고 봤을땐 학대당하는 노인이나 노인복지 정책이 잘 안된 나라들을 보여주면서 생각하게 하는 그런 다큐멘터리라고만 생각했다. 제목부터 좀 다큐멘터리틱하지 않나?
이런 오해를 풀게 된것은 2008년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면서 부터이다. <파고>로 유명한 코엔형제 감독의 영화이며 유명배우 토미리 존스가 출연하고 하비에르 바르뎀이라는 주연이 남우조연상을 받았으며, 코엔형제는 감독상, 영화는 작품상을 받으며 '아! 이건 다큐가 아니라 영화구나'라고 알게 됐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이 영화가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졌다는 것도 알게 됐다.
『미국의 텍사스. 사냥을 하던 모스(조쉬브롤린)는 널부러진 시체들과 그 근처에 있던 돈가방을 발견하고는 집으로 들고 온다. 하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는 그 장소의 생존자를 위해 다시 돌아가지만 빗발치는 총알 세례에서 겨우 살아난다. 돈가방을 찾으려는 안톤쉬거(하비에르 바르뎀)는 모스를 집요하게 찾아다니고, 그 사건을 추적하는 베테랑 보안관 벨(토미리 존스)까지. 이 세사람의 추격...』
초반부터 다소 충격적인 살인장면을 보여주며 시작하는 이 영화는 별로 노인하고는 관계가 없어보인다. 처음에 죽는 사람이 노인이길래 '아. 노인만 골라 죽이는건가...'라고 생각했었다. 돈가방을 둘러싸고 모스와 안톤쉬거가 펼치는 추격전은 상당히 긴장된다. 여기서 특이할만한 것이 흔히들 쓰는 긴장감 고조용 BGM을 전혀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 전체에 일체의 BGM이 쓰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긴장감을 높이는데 일조한 것일지도 모른다. 모스와 안톤쉬거의 추격전을 그리면서 BGM을 쓰지않아 흐르는 적막감은 영화의 몰입도를 높여준다. 그리고 한 몫더한것은 바로 하비에르 바르뎀의 연기다. 그의 헤어스타일을 볼때마다 웃음이 나오지만 그의 표정은 무표정이다 못해 섬뜻할 정도다. 전혀 속내를 알수없는 그표정은 단연 아카데미 감이었다.
왠지 다큐같은 제목에 스릴러 같은 장르로 가는 영화 내용은 모스와 안톤쉬거 중심으로 흘러간다. 돈가방을 쥔 모스는 쫓기고 안톤쉬거는 쫓는다. 내용을 이끄는 것은 모스이지만 내용의 중심은 안톤쉬거다. 그리고 벨은 그들의 추격을 추격하면서 자신의 오랜 경력으로 사건을 잡아보려고 한다. 벨. 그가 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제목의 주인공이 된다.
그렇다면 왜 이영화의 제목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인가.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영화는 스릴러라는 장르를 차용하면서 드라마적인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두 젊은(?)이가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하면서 사건이 발생하고 베테랑 보안관 벨은 그 뒤를 쫓는다. 하지만 벨은 그 사건에 직접 개입되지 못한다. 언제나 한발 늦어서 현장에 도착하곤 한다. 그 동안 두 젊은이는 이동하면서 둘만의 사건을 만들어낸다. 점점 힘에 부치는 벨. 그는 예리한 통찰력으로 사건을 파헤치지만 관록만으로는 그 둘을 쫓기에는 역부족이다. 영화의 제목은 바로 이것을 말하려고 한다. 영화의 막바지에 벨의 독백아닌 독백에서도 알 수 있지만 나이가 들면 젊은이들에게 밀려나게 되는 노인들의 우려를 드러낸다. 늙어서 소외되고 학대받는 노인의 걱정이 아니라 젊은이들에게 밀리고, 젊은이들을 당해낼 수 없게 되는 노인들을 염려한다. 그래도 오랜 세월의 관록은 젊은이들도 당해낼 수 없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다.
사실 이 영화에서 안톤 쉬거와 모스의 심리상태는 그리 비중이 없다. 왜냐면 어떻게 보면 그들은 벨의 처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매개체일 뿐이다. 주인공을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보고 안톤 쉬거와 모스를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보는 것이 이 영화를 보는 방법일 듯 하다. 하지만 영화의 연출은 영화의 제목을 반영이라도 하듯이 노인인 벨의 비중조차 이 두명에게 밀리는 듯하게 연출했다. 마치 '노인을 위한 영화는 없다' 뭐 이런 것 처럼... 분명 영화의 주제는 벨의 1인칭적인 영화이지만 영화 자체는 그렇지 않다. 원작이 그런건지 의도적으로 영화 연출을 그렇게 한건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괜찮은 듯 하다. 영화마저 노인을 중심에 두지 않고 변방으로 내모는 그런 연출... 고거 괜찮네~
코엔형제의 다른 영화를 본적은 없지만 예전 <파고>의 명성을 통해 약간은 어떤 스타일인지는 알고 있었다. 항상 무언가 심오한 영화를 잘 찍는 형제로 알려져 있는데 이 영화도 충분히 심오하다. 하지만 왜자꾸 안톤 쉬거의 헤어스타일을 보고 있으면 웃음이나는지... 청부살인업자라는 그의 직업과는 너무도 언매치되는 헤어스타일. 하지만 그의 말투나 표정만큼은 냉혈한의 모습이 가득하다. 총을 맞아도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는 그의 모습은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긴장감을 불러온다. 그밖의 조쉬브롤린이나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토미 리 존스의 모습도 좋았다.
많은 호평을 받으며 결국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감독상, 남우조연상을 가져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3개 부문 시상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사실 다른 후보작들을 보질 못한 이유도 있고... 제목의 의미를 전혀 모르고 본 나에게는 마지막 장면에서 꽤 깊은 인상을 받았다. 제목에 대한 궁금증 해결의 열망이 풀리는 순간. '아!'하며 영화의 모든 부분이 받아들여지는 순간.
지금 포스터를 보면서 느낀건데... 저 포스터, 두 인물간의 관계를 너무도 확실하게 보여주는 포스터다. 갑자기 너무 맘에들어진다. 항상 모스의 뒤에 있는 안톤 쉬거. 쫓기는 모스를 여유있는 눈길로 바라보는 안톤 쉬거. 정말 딱 이군... 제목이랑은 전혀 안맞지만...
뭐 여튼 사실 큰 관심없다가 아카데미 방송보면서 극찬을 하길래 본 영화인데 개인적으로 굉장히 만족했다. 간만에 심오한 내용있는 영화를 봤다.
P.S 산소통이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니... 만만히 볼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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