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창대했으나 그 끝은 미약하여라.... ★★★
앨범을 내놓으면서 조금씩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는 가수들이 있는 반면에, 데뷔 앨범이 워낙 뛰어나 그 이후 앨범은 하강 곡선을 그리는 가수들이 있다. 나이트 샤말란 감독을 가수에 비유하자면 후자에 속하는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식스 센스> 이전에 <와이드 어웨이크>라는 영화가 있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식스 센스>를 첫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어쩌면 나이트 샤말란 감독에게 <식스 센스>는 천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든다. 어떤 작품을 내놓든지 <식스 센스>를 제작한 감독이라는 비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반전 영화의 핵심인 반전을 미리 알게 되는 것을 그다지 꺼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끔은 반전이 맘에 들어 나중에 영화를 보는 경우도 있다. 스릴러 영화의 핵심은 반전이 아니라 과정이라고 했든가. 내 생각으로는 반전이 뛰어나고 훌륭한 영화들은 과정이 좋기 때문에 반전 효과가 더욱 두드러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허접한 영화에 <식스 센스>나 <유주얼 서스펙트>, <디 아더스> 같은 반전을 붙여 놓는다고 한들 그 영화가 좋아 지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튼 과정이 충분히 흥미로운 영화는 반전을 알고 봐도 재밌고, 그렇지 않은 영화는 반전을 몰라도 재미없는 건 마찬가지다.
<식스 센스>로 평단과 관객의 찬사를 받은 나이트 샤말란 감독은 이후 내놓은 영화들마다 반전에 목숨 거는 듯한 행보를 보여 왔다. <언브레이커블> <싸인> <빌리지> <레이디 인 더 워터>. 이 영화 중 본 것도 있고, 안 본 것도 있지만, 모든 영화의 홍보 핵심은 반전이었다. (식스 센스를 떠올리는) ‘충격적 반전!’.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식스 센스>에 버금가는 작품은 없었다. <해프닝> 역시 마찬가지다. 마치 대단한 반전이 있는 듯한 홍보물을 보면, 실제 영화를 보고 난 후 실망할 관객들의 표정이 보이는 듯하다.
<해프닝>은 나이트 샤말란 감독이 만든 첫 R등급 영화다. 그만큼 자극적 비주얼을 전면에 내세우며 흥미로운 시작을 열어간다.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산책하던 시민들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방향 감각을 잃는 듯하더니 앞 다투어 자살을 한다. 그리고 한 건물 공사장에선 인부들이 집단 투신자살을 하고, 미국 동북부를 중심으로 자살 소동은 확대된다. 결국 살아 남은 사람들은 도시를 떠나 한적한 곳으로, 그리고 아직 죽음의 그림자가 미치지 않은 곳으로 이동을 하지만 어디가나 죽음을 피해갈 방법은 없다.
영화를 보는 관객의 주된 관심은 당연하게도 도대체 자살을 일으키는 원인이 무엇인가와 어떻게 극복하는지 이다. 그러나 영화는 두 가지 모두 뚜렷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우선 다양한 원인들이 제시될 수 있다. 테리리스트의 공격일까? 핵발전소의 방사능 유출? 아니면 CIA가 실시한 모종의 실험? 영화에선 설명하기 어려운 자연 현상으로 몰아가고는 있다. 아마도 나무 등 식물들이 인간을 위협적인 존재로 설정, 자신을 방어하는 물질을 내보내고 이게 바람을 타고 인간에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물론 확실한 건 아니지만 모종업을 하는 사람과 주인공의 발언을 통해 이런 가설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영화는 환경파괴에 대한 경고로 읽히고 있는 것 같다.
<해프닝>의 시작은 너무도 선명하고 잔인하다. 이미지적으로 자극적 영상들이 줄이어 화면을 장식한다. 머리핀을 꺼내 목을 찌른다거나 권총으로 머리를 쏘아 자살하기도 하며, 특히 건물 옥상에서 투신자살하는 장면은 한편으론 매우 아름답다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개인적으로 <해프닝>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그런데 영화는 딱 거기까지다. 그다지 길지도 않은 영화의 대부분은 주인공들이 이리저리 이동하는 장면과 자살하는 장면으로 메워져 있다. 처음엔 충격적이었던 자살 장면도 몇 차례 반복되면서 시들해진다. 그러다 사태 해결 없이 흐지부지해지더니(영화에선 이와 관련해 몇 차례 ‘설명하기 힘든 자연현상의 경우 시간이 지나면서 급작스럽게 끝을 낸다’며 결론을 암시하는 발언이 나온다) 느닷없이 유럽에서 동일한 사태가 재현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정확치는 않은데, 엔딩 크레딧에 파리 촬영 스탭이 소개되는 것으로 봐서 아마 프랑스 파리가 아닌가 한다) 이런 식의 끝맺음은 이만저만 식상한 구도가 아니다. 수 없이 많은 호러, 좀비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그 방식 그대로 막을 내리는 건 나이트 샤말란 감독과는 거리가 먼 방식이다. 이 때문에 해외 언론에서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재능이 다했다는 식의 비난이 쏟아지나보다.
다시, 영화의 끔찍한 죽음과 관련해서 얘기해보면, 한 네티즌의 글에 영화에서 어린 아이가 죽은 장면이 없다는 점과 주인공이 외진 오두막집에서 살아남은 장면을 염두에 두고는 이 질병(?)이 순수한 존재에게는 피해를 끼치지 않으며,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은 걸 보았다. 그럴싸하긴 하다. 이에 대해 영화에서 한 여성이 전화로 딸과 통화하다 그 딸이 최후를 맞는 듯한 장면을 근거로 어린아이도 죽는다는 반론을 제기하자 아마도 조금 큰 아이(?)일 것이라며, 주인공과 같이 다니는 제스 정도의 어린 아이를 일컫는 의미라고 한다. 무슨 말장난 같은데, 실제 나이트 샤말란 감독이 순수한 어린아이는 걸리지 않는 것으로 상정했다면 장면(모두들 자살하는 가운데 겁에 질려 울부짖는 어린아이의 모습이라든지)이나 뉴스 앵커의 목소리 등으로 정보를 제공했을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 부부의 사랑이 죽음을 피한 동력이라고 보는 관점에 대해선, 처음 이상한 현상이 발생한 건 공원이며, 어느 나라나 공원엔 많은 연인들이 사랑을 속삭이는 장소로 활용된다. 그렇다면 역시 많은 커플들이 살아남는 모습이 그려졌어야 한다. 아니면 죽은 사람들은 어처구니 없게도 모두 순수하지 못하고 사랑이 없는 사람이라는 결론으로 가야 한다.
결국 이 이상한 현상은 결코 사랑이나 순수함 따위로 극복되는 질병은 아니다. 오히려 그건 무차별적이며,(그래서 무섭다. 평소 환경 파괴에 앞장섰던 사람이나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나 할 것 없이 자연의 복수는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제발 인간들아 지금이라도 작은 것부터 실천하자) 감독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듯한(일종의 페르소나) 엘리엇이 부인에게 설명하는 특징들이 좀 더 진실에 가까워 보인다. 어쨌거나 너무 과하게 뒤틀어 해석할 필요는 없으며 영화에서 자주 얘기되는 대로 설명할 수 없는 자연현상의 일부라고 치부하는 게 속 편한 방법이다. 물론 이는 대단히 무책임한 방식이긴 하다. 그런 면에서 <해프닝>은 시작은 너무도 거대하고 창대하였지만, 너무도 미약하게 끝을 맺었다라고 할 수 있다. 용두사미의 대표격 영화라고나 할까. 줄리안 무어가 주연한 <포가튼> 역시 마치 대단한 진실이 있는 것처럼 문을 열었다가 도저히 수습하지 못하고 끝을 내긴 했지만, 최소한 외계의 존재라도 등장시켜 그 쪽에 책임을 떠넘기는 꼼수라도 부렸다.
여러모로 나이트 샤말란 감독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은 실망스러운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중간 정도의 평가를 한 것은 반전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영화는 반전이 실망스러운 영화가 아니라 반전이 없는 영화다. 일부 네티즌들이 반전이 약하다, 실망스럽다고들 표현하는데, 이 정도도 반전이라고 한다면 할 말 없지만 애당초 반전은 없었다. 이후 나이트 샤말란 감독이 어떤 행보를 걸을지는 모르겠지만, 난 이 영화가 감독의 반전 강박관념에서 벗어난 최초의 작품으로 추후에 인정받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본다. 그 경계선에 서 있는 작품. 반전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때, <식스 센스>에서 보여준 과정의 꼼꼼함이 다시 살아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 이 영화의 최대 장점은 음향 효과인 것 같다. 특히 엘리엇과 같이 근무하는 교사 줄리앙이 부인을 찾기 위해 차를 얻어 타고 가다가 코너를 도는 순간, 줄줄이 걸린 시체가 발견되는 장면에서 ‘쿵’하며 내리치는 듯한 소리는 정말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서늘한 느낌을 주었다. 시체가 줄줄이 걸린 장면도 충격적이었지만, 음향 효과도 정말 죽음이었다.
※ 엘리엇의 부인인 알마 역을 맡은 주이 데샤넬은 의외로 많은 필로그래피를 자랑한다.(익숙한 얼굴이다 했더니) 죽음을 피해가는 입장에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 바람피운 것을 가지고 말장난 하는 건 좀 어처구니없는 부분이긴 한데, 이 영화에서 주이 데샤넬이 보여준 모습-눈을 동그랗게 뜨고 직장 동료의 전화에 당황해하는-은 최강희의 엉뚱함을 연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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