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울고 짜는 드라마나 영화를 싫어한다. 사랑 이야기도 별로 안 좋아하고 코디미도 별로. 공포물을 어렸을 때부터 워낙 좋아했는데 자르고 써는 서구식 영화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시원한 액션이나 추리, 미스테리, 스릴러, 공포 정도.
아무도 모르게 소설 하나를 쓰고 있다. 비밀이기 때문에 내용을 밝힐 수는 없지만 가끔 난 이런 생각을 한다. 세계적으로 숫자가 극히 적은 여성 연쇄 살인범. 그리고 이 살인범의 수법은 남자 강간 연쇄 살인마와 비슷하다는 것. 아마 수사관들은 범인의 성별을 남자, 20~30대로 잡고 수사하겠지만 범인은 여자란 말이야. 답을 가르쳐 주고 시작하는 것 같다만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뭘.
나는 프로파일러가 되고 싶었다. 범인의 마음 속 심연을 들여다 보는 범죄 심리학의 고수! 그러기 위해서 국내에 시판된 프로 파일러들의 수사일지와 과학수사기법 도서를 몽땅 다 봤고 범죄 심리학적으로 명성이 있는 소설들로 읽고 있다. 그러나 이 직업에 대해서 알아갈 수록 내가 정말로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속이 뒤집어질 정도로 처참한 희생자 사진을 계속 봐야 하고 범인을 잡기 위해 그의 마음 속에 들어가다 보면 니체 말 마따나 나 자신의 괴물도 일깨우는 게 아닐지. 제정신으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을 지 적이 걱정 된다.
하지만 나는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고 뉴욕 시립대 존 제이 칼리지에서 공부하고 싶다. 어쩌면 내 자신의 괴물이 계속 손짓하는 길로 가는 것 같기도 하지만 난 범죄에 관심이 많다. 무슨 생각으로 무슨 행동을 하는 걸까. 사람은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을까. 요즘 나의 지상 최대 호기심이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영화 <88분>은 프로파일러에 관한 이야기다. 대부로 큰 사랑을 받았던 중년의 알 파치노가 FBI 초기 행동과학부 멤버 프로파일러로 분했다. 평생을 범죄자의 머릿 속만 들여다보고 산 반작용인진 모르겠다만 밤마다 파티와 여자에 절어 사는 그는 여자들을 강간 고문 살인한 잔혹한 살인마를 잡았고 유죄 판결을 끌어냈다. 비록 사형일을 기다리는 그 놈이 “난 무죄야”외치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주인공 시점으로 줄거리만 읊조리려니까 쓰고 있는 내가 너무 재미 없어서 안 되겠다. 다른 방식으로 써야겠다. 잠깐만.
나는 이 글의 초점을 주인공 프로파일러에게 범인에게로 돌리고 싶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범인(이 영화에는 2명의 서로 다른 범인이 등장한다)은 여자다. 그것도 그가 가르치는 프로파일러 양성반에서 가장 똑똑한 학생. 이 여자에게는 <스톡홀름 신드롬>과 <자유의지 박탈과 괴리> 증세가 보인다.
스톡홀름 신드롬은 희생자가 가해자의 심리에 동조하는 현상으로 스톡홀름의 은행강도가 유괴했던 사람들이 사건 종결 후 유괴범을 변호하고 기소를 취하했으며 한 여성은 결혼까지 했다. 즉, 이 여자(이름 모르겠다. 그냥 금발머리)는 연쇄 강간 살인범의 변호를 하다가 그가 계속해서 무죄를 주장하고 사형일이 다가오자 유죄 판결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알 파치노를 공격한다.
그와 관련 있는 여자들을 범인과 똑같은 범행수법을 사용해서 강간, 고문, 살인 한 후 그의 지문, 정액 들을 흘린다. 게다가 심리적 약점을 이용해 88분이라는 한정된 시간을 놓고 그에게 죽음의 초침이 째깍거리며 목을 죄를 압박감을 가한다. 그가 살아남을 수 있는 몇 분의 시간이 줄어들고 그가 죽을 거라고 예고된 시간이 다가오는 가운데 숨 가쁘게 사건이 진행되고 알 파치노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눈만 껌뻑일 뿐이다. 물론 결과는 말짱 꽝~
금발머리는 <자유의지 박탈과 괴리>를 보인다. 이 것은 스톡홀름 신드롬과비슷한 데 냉철하고 논리적인 변호사가 살인범에게 동조하게 되어 그의 범행 사인을 따라하고 누명을 씌우기 위해 프로파일러의 수업을 들으며 학생들과 주변인물을 이용해 그의 숨통을 옥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무척 재미있게 봤고 왜 우리나라에서 개봉을 안 하는 지 궁금하지만 그 복잡한 범행 장면, 전략적 게임의 금발머리 버전이 빈약하게 설명된 점이 조금 아쉽다. 분명 희생된 여자들 중 자유 의지가 확고하고 총기 관련 경험이 있는 여성도 쉽게 범인의 공격을 받고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은 조금 억지스러웠다. 다만, 알 파치노가 수업 시간 중 사건 관련 상황에서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것이 가슴에 와 닿았다. 게다가 법정에서는 자신의 의견을 무시한 채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말해야 하는 수사관의 모순을 이야기 하는 장면이 공부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알 파치노가 영화 중간 중간 자기가 미국의 대표적 연쇄 살인마인 존 웨인 게이시나 테드 번디와 인터뷰를 했다고 말하는 장면은 존 더글라스나 로버트 레슬러가 생각나서 좀 웃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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