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고 서늘하고 냉혹하다....
이런 영화가 미국에서 개봉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2007년 말인가, 2008년 초인가, 미국 각 영화잡지에서 2007년을 결산하면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2007년 최고의 영화로 선정하였고,(그 때 비로소 기사를 통해 이 영화의 제목을 듣게 되었다. 처음 제목을 들었을 땐 노인을 배려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이야기인 줄 알았다.) 마침내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작품상 수상 이전에 이 영화를 봤고, 아마도 수상할 것이란 예상을 하기에 충분한 작품이었다.
돈 가방과 시체가 있다. 돈 가방만 챙긴 베트남 참전 군인이자 사냥꾼인 모스는 그래도 남아 있는 일말의 양심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에게 물을 전달하려고 다시 그 곳에 들렀다가 무자비한 인간 사냥꾼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한 순간의 인간적 배려로 인해 목숨이 저당 잡힌 신세가 된 가려한 인생이여. 그리고 마치 가발을 쓴 것 같은 이상한 헤어스타일의 남자가 있다. 소를 죽이는 데 쓰이는 산소통과 거대한 소음기가 장착된 총을 들고 다니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살인마, 안톤 쉬거는 무표정한 얼굴로 모스의 뒤를 쫓는다. 그리고 은퇴를 앞둔 보안관 벨이 있다. 살인마 안톤 쉬거에게서 모스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대체 이놈의 사회는 은퇴를 앞둔 노인의 지혜를 활용하려 하지 않는다.
코언 형제의 새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우선 느리다. 마치 살인마 안톤 쉬거나 은퇴를 앞둔 보안관 벨의 걸음걸이를 상징하듯 느릿느릿 파국을 향해 진행된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지루함이라든가 루즈함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영화는 시종일관 서늘함과 냉혹함이 안개처럼 스멀스멀 관객을 향해 스며든다. 매점 주인과 안톤 쉬거의 대화 장면을 보자. 무표정한 안톤 쉬거의 동전 던지기 내기와 고저 없는 나즈막한 목소리는 매점 주인만이 아니라 그 장면을 보고 있는 관객의 심장마저도 얼어붙게 만들 정도로 서늘한 냉기를 뿜어낸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 그리고 파국을 막으려는 자, 이 셋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영화는, 그러나 단 한 번도 이 셋을 조우시키지 않는다. 모스와 안톤 쉬거가 단 한 번 조우하기는 하지만 상대의 윤곽만 확인하고 총질만 하다 끝낸다. 실제 소설에서는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고 하든데, 영화를 보고 난 후 책을 사 놓고는 아직 읽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영화의 주요 인물들이 예상치 않게 등장하고, 퇴장한다는 사실이다. 대체 이 영화에선 화를 내는 법이 없다. 격하게 감정을 표출하지도 않고, 그저 도망 다니는 일에, 쫓는 일에, 또는 사람을 죽이는 일(?)에 열중이다. 그러고선 갑자기 퇴장해 버린다. 죽을 것 같은 사람은 죽지 않고, 살 것 같았던 사람은 죽는다. 영화의 주요인물이 죽는 순간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멀리서 실려가는 시체를 보여줄 뿐이다. 극적으로 죽는 것도 아니다. 죽이려고 하는 인물에게 죽는 것도 아니다. 모스의 부인을 처리하고(화면으로는 나오지 않지만 분명 처리했다고 보인다.) 거대한 돈을 챙긴 희대의 살인마 안톤 쉬거, 이제 누구에게도 위협받지 않을 안톤 쉬거조차도 느닷없는 교통사로로 팔이 부러진 채 화면에서 절룩이며 퇴장한다. 과장도 없고 허위도 없다. 마치 그것이 인생이라는 식이다.
그런데, 영화의 결론까지도 벨이 꿈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끝내 버린다. 대체 왜??? 누군가는 이렇게 끝냄으로써 관객이 영화의 처음부터 다시금 곱씹게 하는 효과를 보게 하기 위해서 라고도 하고, 실제 소설이 그렇게 끝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소설이 정말로 그런지는 조만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일반적인 영화 문법, 특히 헐리웃 영화의 결말 방식은 분명 아니다. 그러고 보면, 이번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른 작품들은 예년에 비해 풍부하다. <마이클 클레이튼>, <주노>, <어톤먼트>, <데이 윌 비 블러드>와 같이 충분히 작품상을 타고도 남을 작품들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같은 해에 아카데미 후보에 오른 것은 대단히 애석한 일일 것이지만, 이렇게 좋은 작품들을 한꺼번에 접할 수 있다는 건 영화를 즐기는 입장에선 너무 행복한 일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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