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김신락’ 무엇이 이 남자를 역도산이게 한 걸까? 누구보다 인생에서 성공하기를 욕망하던 그에게 일제 치하의 식민지 조국,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은 견디기 힘든 좌절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단순히 성공에 대한 욕망만으로 그를 규정지을 순 없는 듯 하다. ‘마음껏 웃어보고 싶습니다!’ 이 한마디 때문이다. 절망과 고통의 시대를 보낸 그에게 과연 마음껏 웃을 일이 있었을까? 그래서 소박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성공이라는 야망을 택했을 것이다. 조선인이라는 신분이 주는 좌절에서 벗어나기 위해 김신락을 버리고 역도산을 택했고, 국적을 감추고 일본인이 되려 했다. 성공을 위해 핏줄도 숨긴 판에 게임 조작은 하찮은 속임수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든 이유는 영화에 그려진 역도산의 모습엔 삶에 대한 애착과 번민, 뒤이은 허망함이 녹아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역도산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꼈다. 결국 역사의 실존했던 인물을 부활시켜 감독이 이야기하려 한 바는 인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 속 역도산은 영웅이 아닌 한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난 그의 삶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자신이 처한 환경을 극복하고 개척해나가려는 그의 의지와 이것이 일으키는 모순.
일본의 레슬링이 아닌 그만의 레슬링을 원했던 역도산은 자신의 삶에 대하여 지극히 솔직할 수 있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런 그의 모습에 인생의 판타지와 모순이 뒤섞여있다.
‘포레스트 검프’란 영화가 떠오른다. 보는 내내 감동의 물결이었으나, 끊임없이 갈등하고 망설이는 인간의 내면이 보이지 않았다. 삶의 감정과 유리된 느낌. 영화 속 주인공은 역경을 극복하는 신화적 인물에 불과했다. 반면 ‘성난 황소’는 ‘역도산’과 닮아있다.
영화는 사진에 간직된 ‘아야’와의 추억들을 마지막에 배치한다. 고향의 어머니는 마음껏 웃으시던 분이라는 그의 추억담이 예견하듯, ‘아야’와의 순수한 사랑을 느끼던 시절이 그가 마음껏 웃고 삶에 애착을 느끼던 시간이었음을 이야기하기 위한 결말로 보인다.
영화는 레슬링이라는 스포츠보다는 한 남자의 인생에 방점을 둔다. 자칫 스포츠 오락영화가 되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레슬링 장면에 대한 시간할애는 비중이 높지 않고 스모경기의 장면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게다가 레슬링 시합을 묘사하는 화면은 효과를 최대한 배제한다. ‘반칙왕’의 현란한 테크닉과 상반된 모습이다. 그리고 레슬링의 최초도입에서의 극적 성공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야구와 올림픽에 밀려 쇠퇴하는 과정에 발맞추어 레슬링 시합의 묘사의 지루함이 점점 더해간다. 그러나 이 레슬링은 역도산의 분신으로 그의 의지와 감정을 대변하는 통로다. 져주기로 약속한 시합에서 지루하게 끌려 다니던 그는 자신의 본질에서 솟구치는 희열을 포기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레슬링의 쇠망에 맞추어 단조롭게 그를 따라가지만 그는 이에 저항하듯이, 인생의 꿈을 포기할 수 없어서 처절하게 상대방을 공격한다. 이미 떠난 버스를 붙잡으려 애쓰듯이 말이다. 이것은 이미 전성기가 지난 선수가 고난을 극복하고 재기에 성공한다는 내용의 스포츠 오락영화가 노리는 카타르시스와는 다르다. 단순 명백한 길을 정하고 미래의 다가올 희망으로 나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전체 인생이라는 수만 가지의 길에서 희망을 찾아 헤매다가 허망에 도달한다. 그래서일까? 아야와의 아름다웠던 장면이 마지막에 배치됨에도 불구하고 비관적인 인생의 아이러니를 떨칠 수 없다. 그런데 재밌게도 이점이 영화 <역도산>의 매력적인 스펙터클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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