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태생인 독일의 시인이자 <두이노의 비가> 와 <말테의 수기>
, 그리고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작품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던 릴케의 시로 시작되는 인상적인 오프닝을 가진 이 영화는 섬세하
고 세련된 영상미와 스펙타클하거나 임팩트있는 전개를 가지지 않은
시간적 구조를 파괴한 구성을 띤 전개를 보여준다. <철수 영희> 의
황규덕 감독이 선보인 이 영화는 2007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개막작
으로 선정된 영화이기도 하기에 그 끌리는 관심과 호기심을 억누를수
없었다. 어느 한 대학의 교수실 그곳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는 40대의
현수영(정진영)이 인터넷 뉴스를 접하고 있다. 터널붕괴사고로 버스를
탄 대학생들이 매몰되어 있다는 소식에 눈쌀을 찌프리며 유심히 바라
보는 현수영은 그 소식을 보며 자신들의 제자가 그들임을 안다. 그것이
사실 꿈이길 바라는 마음이 작용했음일까. 창가로 날아든 나비 두마리는
마치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 일화를 일깨우듯 현실과 꿈의 경계가
무의미해지게 만들듯 그를 강의실로 인도한다.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대학생들 8명의 모습, 처음엔 잘 눈치챌수 없지만 그들이 바로 매몰된
대학생들임을 서서히 느끼게 된다. 그리고 학생들의 로맨틱한 사랑이야기
타령에 과거를 회상하며 담배 한가치를 꺼내 물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수영, 담배연기와 함께 몽롱한 과거가 펼쳐진다. 그리고 독일어 강의
시간에 교수의 질문이 시작되고 대학생 현수영(정경호)는 안경을 쓴
낯선 여학생에게 눈길이 감을 느낀다. 교수의 질문에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2부 27편을 낭송하는 그녀
Gibt es wirklich die Zeit, die zerstoerdende?
Wann, auf dem ruhenden Berg, zerbricht sie die Burg?
Dieses Herz, das unendlich den Goettern gehoerende,
wann vergewaltigts der Demiurg?
시간이 정말로 있을까? 파괴하는 시간이?
잠잠한 산에서 그 시간은 언제쯤 성을 부술까?
신들에게 속해 있는 그 심장에게
조물주는 언제쯤 폭력을 행사할까?
Sind wir wirklich so aengstlich Zerbrechliche,
wie das Schicksal uns wahr machen will?
Ist die Kindheit, die tiefe, versprechliche,
in den Wurzeln - spaeter - still?
운명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처럼,
우리는 정말로 그렇게 유약하고 불안한 존재인가?
유년은, 깊고도 기약에 찬 유년은,
그 근원에서 말이 없는 것일까? - 훗날에
그녀는 낭독을 끝내지 못하고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복받치는 감정에
교수에게 목례만을 한채 뛰쳐나간다. 수영의 눈에 그녀가 각인된다.
그리고 그 후 책을 보고 있는 수영의 뒤로 다가와 대뜸없이 발로 툭 건드리는
그녀는 수영에게 미스테리한 존재로 다가온다. 1970년대 후반대를 상징하는
수영의 교련복을 뒤로한채 대뜸없이 수영의 이름을 부르며 수영을 데려가고
그곳에서 수영은 그녀에게 삐삐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삐삐소녀(김민선)는 수영에게 신비로운 말을 늘어놓는다.
고2때 첫사랑이 누구냐는 말에 "secret" 어디있냐는 말에 "someplace"
로 대답을 굳히면서 만약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죽음까지 따라가야
한다고 설득력있는 이야기로 수영을 혼란에 빠트린다. 어딘가로 가는
사람 처럼 나를 진정 이해해주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라는 이야기
와 너는 죽음까지 따라가라고...자신이 지켜보겠다는 이야기를 늘어
놓는 삐삐소녀,
"바보, 누구나 숙명이란게 있는거야. 피할수 없는 운명같은 사랑"
이란 대사로 마무리한채 감정이 격앙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그녀는 민주화 구호를 외치며 몸을 던지는 투신자살을
합니다. 그 광경을 목도한 수영은 술을 마시고 괴로워 합니다.
그리고 기난긴 호접지몽이 시작되죠. 수영은 과외아르바이트를 시작하는
여학생의 오빠를 만나게 됩니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그의 이름도 수영(김대원)
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어느정도 관계가 대략적으로 나오게 되죠. 삐삐소녀가
사랑하던 사람의 이름과 같은 이름의 수영, 그리고 그런 수영의 여동생인
수진(차수연)의 과외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는 대학생 수영은
계속적인 환영에 시달리게 됩니다. 서울 상공에 불꽃놀이가 있던 날 밤,
그것을 공격으로 오인한 군부대의 대공사격으로 수진과 수영은 죽음을
맞이하지만 정작 본인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에 빨간 줄이
그어진 것과 사람들이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 그리고 삐삐소녀가
이승에 머무르는 기간이 49일이라는 것을 넌지시 이야기 해주는 것에서
깨닫게 되죠. 영화는 전체적으로 몽환적이고 얽히고 섥히는 것이 반복
됩니다. 어떤게 꿈이고 현실인지 결국 이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누구나 간직하고 있는 첫사랑이 더 아련하고 그리운 것은 우리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환상이 그것을 현실처럼 느끼게 만들어줄수도 있다는 의미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것은 몽환적이면서 좀더 애틋하게 그려짐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워라 현경과 영애
햇빛 따스한 아침 숲속길을 걸어가네
당신과 둘이 마주 걸었던 이 정든 사잇길을
보랏빛 꽃잎 위에 당신 얼굴 웃고 있네
두손 내밀어 만져보려니 어느새 사라졌네
그리워라 우리의 지난날들
꽃잎에 새겨진 사랑의 이야기들
그리워라 우리의 지난날들
지금도 내 가슴엔 꽃비가 내리네
다정했던 어느날 호숫가를 거닐었지
하늘거리는 바람 불어와 꽃비가 내렸지
흘러가는 물 위에 아롱지는 두 그림자
우리 마음도 우리사랑도 꽃잎되어 흐르네
그리워라 우리의 지난날들
꽃잎에 새겨진 사랑의 이야기들
그리워라 우리의 지난날들
지금도 내 가슴엔 꽃비가 내리네
현경과 영애의 "그리워라" 가 흘러나오고 수영이 교련복을 춤추는
장면이나 꽃잎이 방안을 흩날리는 장면, 나비가 인도하는 장면등
현실인지 꿈인지 알수 없는 구도는 이중적인 액자구조로 현재의
수영과 과거의 수영 동시에 펼쳐집니다. 둘 다 환상인지, 아니면
한쪽만이 현실이고, 한쪽이 환상인지, 그것도 아니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것이 꿈인지 조차 인지하지 못하게 하는 상황,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리워하고 아득하게 생각되는 첫사랑의 순간,
결국 그것이 현실이든 환상이든 관계없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영화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그것을 느끼게 되죠.
그것이 환상이든 현실이든 거기서 행복을 느끼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리워할수 있는 추억을 가지게 되기에 더욱더 소중해 지는 지금을
느끼게 하는 영화입니다. 어려운 메시지가 담겨있지만, 이처럼
독특한 느낌을 주는 영화는 올해 <삼거리극장> 이후로 처음
접해보기에 더욱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습니다.
이 기분좋은 여운, 앞으로도 이러한 영화를 많이 접했으면 좋을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