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깝다.
이 영화를 보기 이전에 양들의 침묵과 한니발,
양들의 침묵에 프리퀄에 해당하는 레드 드래곤을 본 사람이라면
고개를 저을 만한 한니발 라이징...
영화가 갖는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방향에 있다.
역대의 한니발 시리즈는 캐릭터의 묘사에 90% 이상을
먹고 들어간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출내기 FBI 훈련생으로서 한니발에서 느끼는 묘한 매력과
스스로의 과거, 수사에 대한 집착이 복잡미묘하게 나타난
조디 포스터(양들의 침묵), 여전히 원칙에 근거하며
한니발과의 복잡미묘한 감정을 안고 살아가던
줄리안 무어(한니발), 스스로의 공포와 범인에 대한 집요함,
한니발에 대한 두려움이 잘 나타난 에드워드 노튼(레드 드래곤)...
그리고 세 편의 영화 속에서 일관되게 섬뜩하고 지적이며
차가운 모습을 보여주던 안소니 홉킨스.
16분만을 출연하고 양들의 침묵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안소니 홉킨스가 가장 섬뜩해 보이던 순간은
그가 영화 내에서 경관의 얼굴을 물어뜯을 때에도,
곤봉으로 경관을 내리칠 때도 아니다.
난 그가 클라리스와 첫 대면한 순간이 가장 섬뜩했다.
타 영화의 살인마와는 다르게 예술적이며 지적이고,
감수성이 풍부하다. 무엇보다 그가 무서운 것은 "차분함"
양들의 침묵에서 보여주는 칠튼 박사의 말처럼
"간호사의 혀를 먹을때도 심박수가 85를 넘지 않았다"는
이 캐릭터가 다른 살인마와 얼마나 차별되는지를 보여준다.
레드 드래곤, 한니발에서 그는 일관된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한니발 라이징에선 어떤가? 내 상상과 큰 차이가 있었다.
적어도 한니발이라면 일본 검도를 배운다거나,
상대를 수조에 가두어 죽인다거나, 보트를 폭파시킨다 하는
장치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본다.
영화에 사용한 장치들은 너무 "한니발스럽지" 않다.
"영화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살인마"라는 칭호가
무색해질 정도로 한니발의 캐릭터가 변질했다.
푸줏간 주인의 목을 베고 튄 피를 핥는 장면은
실소만이 나올 뿐이었다.
스토리 또한 흡입력이 약하다.
B급 액션 영화의 틀을 따르는 이런 전개는,
양들의 침묵의 팬인 나로서는 정말 화가 나는 일이었다.
어째서 한니발이 검은 수트에 일본도를 차고
쌍안경을 써야만 하는가? 레이디 무라사키의 행동도
이해하기 힘들며,
마지막 나오는 반전은 글에 쓰진 않겠지만 너무 약하다.
가스파르 울리엘의 연기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한니발은 정말 힘든 캐릭터이다.
무조건 연기는 최상급이었어야 한다고 본다.
영화가 워낙 캐릭터의 기대치가 강하기 때문에,
안소니 홉킨스와 같은 연기만큼은 아니었다고 본다.
공리는 솔직히 영화에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라고 본다.
이 영화에서 한니발이라는 이름을 뗀다면
좋은 스릴러로 남을 수 있었다고 본다.
재미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 한니발이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관람객은 당연히 전작 3편을 떠오르게 된다.
전혀 어긋난 방향으로 한니발의 캐릭터를 변질시킨 순간
이 영화는 무거운 짐을 진 것과 마찬가지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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