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내 모습이 미래의 나를 만들듯.. 과거의 나의 한 부분이, 현재의 나로서 존재한다..
무모했던 젊은 치기들이.. 나이들어 감에 따라서.. 현명(?)해지거나 혹은 속세에 찌들어 속물이 되어 버리는 것처럼... 내가 그토록 중시 여겼던 생각들이, 사상들이.. 가치들이.. 세월이 지나갈수록, 그 의미가 퇴색되고... 기억에서 사라지고.. 언젠가는 그런 기억이 있었던 것조차 가물가물해지게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변해간다..
그러나, 지금의 나의 모습 역시...
순진했던 과거의 내가 만들어 낸.. 나의 한 부분이다...
Before Sunrise...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가 8년 전이다...
내 인생에서 무슨 일이 펼쳐질 지.. 그 때 난 뭘 알았었나..?
이 더러운 세상을 핑크빛으로만 바라보던 물정모르는 소녀도 아니였고.. 내 앞에 좋은 일만 가득할 것이라는 기대로 가득찬 낙관주의자도 아니였다.. 그렇다고 신경질적이고 모난 아이도 아니였다..
내 모든 상황들이 답답하게만 느껴졌지만... 그래도 20살의 나는... 순진했다... 그리고 착했다... 아니, 어쩌면, 어리석었다......
2004년... 나도 나이를 먹었고... 제시와 셀린도 나이를 먹었다...
일년에 한 살씩... 정직하게... 나와 영화속 캐릭터들은 공평하게도..
똑같은 세월의 시간을 보낸 것이다...
양 미간에 흉터처럼 커다란 주름이 진 제시... 젖살이 빠지고 30대 여인이 되어버린 셀린... 9 년이라는 세월의 흔적만큼 거기에 걸맞게 변해버린 이들...
보톡스를 맞고 팽팽해진 피부로.. 20대와 다름없는 열정으로 나타났다면.. 오히려 실망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들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비엔나에서의 헤어짐 이후...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 스포일러 주의*)
제시는 우울한 결혼 생활을 하고있었다.. 귀여운 아들이 그에게 큰 낙이지만, 부인과의 의미없는 결혼을 지속하다가 어느덧, 50이 넘어서 자신의 삶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것 같아 두렵다고 했다...
셀린은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했다.. 9 년 전 그 날, 자신의 모든 사랑을 쏟아부어버린 것인지...... 그녀와 사귀었던 남자들은 모두 그녀를 떠나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해버리더란다...
9 년전, 꿈 많고 생기발랄했던.. 그들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어쩌면 무모하기까지 했던 젊은 20대의 열정은 없어지고... 현실 속에서 타협해가는 30대의 나른한 일상만이 남아있다...
사랑은 타이밍이다...
9년 전과 똑같은 시간의 갈림 속에서, 제시는 어떤 선택을 할까... 운명이라고 여겨지는 사랑을 보내고.. 현실 속으로 떠나갈까?
Celine ; Baby, you are gonna miss that plane.. Jesse ; I know..
마지막, 제시의 미묘한 한마디 대답 속에...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다... 이미 그의 마음 속엔, 비행기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9 년이나 바래왔던 운명을 그냥 흘려버릴 만큼, 그는 바보는 아니다...
전작에 비해 조금 더 우울하고... 현실적이며... 공허하지만... 더 가슴에 와 닿는다... 그리고 더 아려온다...
어쩌면, 감독은 9년 뒤, 또 다른 영화를 들고 올 지도 모르겠다..
그때가 되면 30대 중반이 훌쩍 넘어버린 나.. 40대에 접어드는 제시와 셀린...
영화 속 캐릭터들과 함께... 늙어간다는 것... 색다른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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