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좋단 말인가. 이 유쾌한 남정네들의 통쾌한 도둑질을 더이상 볼 수 없다니. 3부작을 완결짓는 마지막 작품에 대한 기대로 더위와 귀찮음에 푹 절여진 무거운 몸을 질질 끌고, 그것도 혼자서 심야영화로 결국은 보고야 말았다. 더 미루다가는 Hot Fuzz 나 트랜스포머에 우선순위를 빼앗길 것이 너무도 자명했기에. 전작인 오션스 트웰브가 극도로 평가절하되었다고 생각한 대니 오션의 패밀리들은 "욱하는" 마음에, 다음 편인 써틴을 찍기로 결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의 선택은 절대적으로 옳았다고 생각된다. 적어도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스파이더맨과 캐리비안의 해적, 슈렉이 그랬듯 3편의 "저질화"로 인해 시리즈 전체를 욕보이게 하지는 않았으니 이 얼마나 성공한 방어전이며 깔끔한 마무리인가.
영화는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도둑질 영화이니 동기와 계획, 실행과정만 보여주면 만사 오케이 아니겠는가. 동기는 루벤의 복수가 되겠고, 루벤이 뱅크에게 어떻게 당했는지는 "4주전"이라는 자막과 함께 1-2분 정도로 압축하여 요약된다. 그보다는 개괄적인 플랜을 매우 구체적으로 늘어놓는데에 많은 시간을 할당하고 있는데, 다소 지루할 수 있는 이 초반부를 다양한 카메라 워크로 만회하고자 하는 노력이 엿보인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오히려 더 산만한 느낌이어서 별로이더라. 이야기는 휙휙 지나가는데 카메라는 정신없이 움직이지, 게다가 이 아저씨들은 한군데에 얌전히 앉아서 얘기하는게 아니라 자꾸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녹차를 마시고 샐러드를 집어먹고, 이건 감독이 관객에 거는 최면과도 같다. "우리 얘기는 별 것이 아니야, 귀기울여 들을 필요는 없어. 도둑질 좀 하려는데 그래도 대충 설명은 해야하지 않겠니. 몰라도 영화보는데에는 지장없으니 긴장하지마."
몽땅 거두절미하고 오로지 "어떻게 해서 철통같은 보안을 뚫을 것이며, 어떻게 해서 사기를 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춰버리니 플롯은 매우 깔끔하게 정리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70% 넘는 분량을 범죄를 계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으로 채운 셈이다. 그 과정속에 열 세 명의 캐릭터 - 비록 이번 편에서 캐서린 제타존스와 줄리아 로버츠는 빠졌지만 - 의 개성을 뚜렷이 보여주는 재미난 에피소드들이 종합캔디세트처럼 한데 엮여 있으니, 마치 시트콤을 보는 느낌이랄까. 멕시코에서 노조 운동을 하고 있는 쌍둥이들의 모습이랄지, 포르노를 찾으면서도 루벤을 위해 로맨틱한 편지를 쓰는 배셔의 모습은 단역에 가까운 조연임에도 인상깊게 남는다. 이번 작품에 특별히 합류한 알 파치노도 그 포스 넘치는 연기력이 역시 알 파치노임을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캐릭터의 힘을 논함에 있어 주연 3인방은 다른 열명의 조연을 압도하고도 남는 모습이다. 캐리비안의 해적에 잭 스패로우가 있다면, 오션스 써틴에는 대니 오션과 러스티, 라이너스가 있지 않은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섹시해지는 남자가 있으니, 그 이름도 찬란한 조지 클루니다. 흰머리에 주름이 생겨도 흉해보이지 않고 도리어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중후한 멋을 온몸에서 풍기고 있으니. 감히 톰 크루즈나 키아누 리브스, 혹은 브루스 윌리스나 러셀 크로우 따위가 대적할 바가 아니다. 러스티의 결혼문제를 상담해주고, 오프라 윈프리 쇼를 보며 눈물을 보이거나, 테리의 돈을 고아원에 기부하는 모습은 대니 오션 = 조지 클루니라는 공식 아래 대니 오션이라는 캐릭터를 백만배는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 세상에 저렇게나 다정하고 인간적이며 따뜻하고 부드러우며 섹시한 남자가 또 있을까. 누구의 표현을 빌자면 정말이지 샤넬 수트 같은 남자다. 명품 중의 명품인 남자. 오래될수록 그 멋이 더하는 남자.
오션스 일레븐에서는 종일 먹을 것을 들고 다니며 먹고, 먹고, 또 먹고를 반복하시더니, 이번 작품에서는 온종일 마실 것을 들고 다니는 브래드 피트. 벤티 사이즈의 스타벅스 컵부터 커피, 쉐이크, 정체를 알 수 없는 요상한 음료까지. 그런데 그 먹는 모습이 가히 압권이다. 수트 차림에 매치한 스타벅스 컵은 이 남자를 세련되고 스마트하면서도 "1인치의 흐트러짐"이란 섹시한 매력을 갖게 한다. 뭐랄까, 모던하고 샤프한 도시남의 이미지에 느슨한 편안함을 곁들인 느낌이랄까. 머리를 길게 땋아 늘어뜨리고 무지개빛 오색찬란한 니트를 허리에 걸친 차림으로 마리화나 물파이프를 빨아대던 맛이 간 히피를 연기하거나, 다부진 체격과 탄탄한 근육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대놓고 여성팬들을 "뿅가게" 만들었던 젋은 날의 브래드 피트는 세월 속으로 사라졌지만, 잘빠진 아르마니 수트속의 그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실버톤의 정장, 타이를 매지 않은 차림, 단추가 몇 개 풀린 짙은 색의 와이셔츠는 수트 차림임에도 흡사 가죽점퍼를 입혀놓은 듯 무지하게 섹시하고 와일드한 남성적 매력을 발산하게 한다. 영화 속 러스티 역시 그렇다. 오션스 패밀리의 참모이고 브레인이며, 대니 오션의 오른팔이면서도, "엘렌 바킨을 꼬셔라"라는 임무의 적임자로 가장 먼저 지목받는 것은 러스티이다. 욕심쟁이 같으니. 지적이면서 섹시하고, 남성적인 근육과 소년같은 미소를 동시에 가진 그는 미치도록 매력적이다.
이에 비하면 "쓰리톱" 가운데 가장 막내이자 지명도가 떨어지는 맷 데이먼은 조금 안쓰러울 정도다. 전작들에서도 그랬듯, 라이너스는 멤버들 가운데 가장 뒤늦게 합류하며. 때문에 신참으로서의 불안함에 더해 아버지와 어머니의 그늘때문에 항상 인정받고자 하는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어리숙하고 서투르지만 인정받고 싶어 안달하는 라이너스의 모습은, 흡사 조지 클루니와 브래드 피트라는 막강한 섹시스타 사이에서 다소 덜떨어져 보일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귀엽고 새침한 이미지로 가겠다는 맷 데이먼의 승부수를 보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방향으로 라이너스의 캐릭터를 잡아간 것은 매우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보여진다. 최근작인 "디파티드"나 "굿 셰퍼드"에서도 그는 이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스마트한 브레인을 연기했지만, 확실히 예전에 비해 "중후한" 느낌이 강했다. 그러나 오션스 시리즈에서는 이전에 도맡아 했던 "고뇌하는 똑똑하고 건실한 청년" 이미지가 강한데, 그 덕분인지 엘렌 바킨과의 베드신도 전혀 에로틱한 느낌없이 그저 코믹하기만 하다. 다른 멤버들 앞에서 그 여자를 꼬실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를 뻥뻥 친 후에 몰래 화장실에서 여성흥분제[The Girloy]를 목덜미에 바르는 그의 모습을 보라. 이 남자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오션스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이자 맹점은 바로 이 "캐릭터의 힘"에 있다. 조지 클루니가 개인적으로 끌어모았다는 이 화려한 라인업은 각자의 실제 성격을 그대로 캐릭터화하며 관객들에게 스타들의 다른 모습을 엿보게 하는 관음증적인 쾌감을 맛보게 해주지만, 이는 뒤집어 생각해보면 열댓명의 스타들을 모셔놓고 수다를 떠는 TV 쇼 프로그램이나 시트콤의 성격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이야기도 된다. 도둑질이야 원작의 컨셉이 그랬으니 영화를 찍으려면 "어쩔 수 없이" 하는거고, 오션스 시리즈에서 진짜로 보여주고 싶은 것은 반짝반짝 빛이 나는 한 다스의 스타 종합 선물세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할리우드 스타들이 무더기로 나오는 영화. 그것도 아주 미치도록 감각적으로 나오는 영화. 스타들이 모여서 도둑질을 한다. 매우 고상하고 엘레강스하게. 그것도 천문학적인 액수를. 저질스럽게 은행이나 털자는게 아니다. 타겟은 언제나 고급 카지노나 박물관이다. 범행과정에서 유일하게 몸을 쓰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작은 중국인"이라는 사실은 단순히 웃고 넘기기에는 그 이유가 너무나 명백해 보인다. 브루스 윌리스는 왜 대니 오션의 멤버가 아니라 줄리아 로버츠의 친구로 카메오 출연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줄리아 로버츠가 줄리아 로버츠를 연기하는 컨셉도 이런 맥락에서는 쉽게 납득할 수 있지 않을까. 알고 보면 영화를 보며 집어먹는 팝콘만큼 가벼운 영화가 바로 이 오션스 시리즈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오션스 시리즈에 열광한다. 그리고 이번 작품이 마지막인 것에 아쉬워한다. 매년 질리지도 않고 쏟아져 나오는 것이 도둑질 영화인데, 그 가운데서도 오션스 시리즈는 유독 특별했다. 왜일까. 너무나 뻔해서 식상한 주제를 가지고도 영화를 만들 줄 아는 감독과 연기를 할 줄 아는 배우들이 만나 영화를 찍으면 이렇게 유쾌하고 감각적인 영화가 나올 수 있음을. 영리하게도 소더버그 감독과 조지 클루니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공원에서 사먹는 일회용 포장지에 싸인 샌드위치와, 호텔 레스토랑에서 나이프로 잘라 먹는 샌드위치는 그 맛이 다르다. 당신 같으면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 부담없는 편안함이 좋아 공원에서 사먹는 샌드위치가 좋다고 말할 사람도 물론 있겠지만, 질문을 조금만 바꿔 어느 쪽이 더 매력적인가를 물으면 그때는 대답을 바꾸지 않을 수 없으리라. 도둑질의 고품격화를 선언한 열세명의 매력적인 범죄자들을 만나러, 당신도 서둘러 극장으로 향하는 것이 어떨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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