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330 상암CGV, 혼자
개인을 무기력하게 하고 존재이유와 정체성에 대해 고뇌하게 하는 사회는 나쁜 사회다. 총체적인 복지부동의 형국에서 모두 입을 다문 채 막다른 길에서 사랑과 예술이 가장 먼저 버림받는 사회는 나쁜 사회다.
1989년 11월 9일. 비즐러가 개인의 편지를 검열하고 있을 때 베를린 장벽이 부너졌다. 나쁜 사회의 한 덩어리였던 개인 개인들이 장벽을 깨부수며 자유에 환호하고 있을 때 비즐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기계처럼 움직이던 ‘검열’의 동작을 즉시 중단하고 방을 나가는 일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 아닌 다른 이의 삶은 ‘타인의 삶’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 삶을 바라보는 인식의 차이일 것이다. 경직된 사회 안에서의 ‘타인의 삶’은 말 그대로 타인의 삶일 뿐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실제계가 어떤 것이든 간에 My World My space에는 그들은 흔적조차 없다. 그래서 타자와의 소통에서 만들어지는 사랑과 예술은 가장 먼저 쓸모없는 것으로 버려지고 좀체 생성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타인의 삶’은 또 다른 나의 삶이다. 얼마 전 현대인의 고독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봤다. 그들이 왜 애완동물에 집착하는지를 보여주는데 솔직히 무서웠다. 고독과 외로움은 현대인들에게 ‘죽음에 이르는 병’이었다. 더 이상 인간은 혼자는 살아갈 수 없는 ‘호모 론리니스’가 되어 버린 건 아닐까. 그래서인지 모든 것의 가치를 전복시키는 키워드는 사랑이 되었고 인간이 되었고 예술은 그 안에서 역동적인 춤을 춘다.
영화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비즐러가 저녁을 먹는 장면이 나왔을 때 나는 뭐라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을 느꼈다. 티클 하나 없는 흰 접시에 소량의 밥을 담고 그 위에 무언가 양념을 뿌린 것이 다였다. 나는 설마- 하며 강아지밥이라도 만들었나 잠깐 어리석은 생각도 했지만 막힌 사회에서 애완동물이라니, 게다가 비즐러에게 애완동물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나중에 비즐러의 직장 식당에서 여러 명이 밥 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사람들의 식사에도 상상력이 끼어들 여지란 전혀 없는 흠집 하나 없는 식사였다. 식사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둘러싸고 있는 집이라든지 벽이라든지 문이라든지 방이라든지 그 어디에서도 개인이 꾸려가는 삶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 환경에서 호모 사피엔스, 호모 루덴스들은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일종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주인공 극작가인 드라이만의 친구 폴이 그런 말을 한다.
“제발 지식인답게 행동해.”
동독 정권에 협조적으로 보이는, 대놓고 저항하지 않는 드라이만에 대한 질책이었다. 지식입답게라......우리 영화 <오래된 정원>이 떠올랐다. <타인의 삶>을 보면서 우리의 80년대를 많이 떠올렸었다. <오래된 정원>에서도 주인공은 결국 ‘지식인답게’ 자신의 개인적 삶과 사랑하는 여자를 저버린다. 만약 주인공이 자신의 삶과 사랑을 선택했다 하더라도 아무도 그 사람을 비난할 수 없으며 절대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 다시한번 말하고 싶다. 소리쳐 외치고 싶다. 개인의 삶을 저버리게 하는 사회는 나쁜 사회다.
드라이만은 “혼자 있는 거, 글 못 쓰는 거 죽기보다 싫다”고 했었다. 드라이만의 연인 여배우 크리스타는 “살기 위해 별짓 다 하잖아”라고 말했다. 그래서 검열에도 걸리지 않는 희곡을 쓰고 할 말 안 할 말 가려하고 나라를 위한 일이란 걸 앞세우고 탐욕스러운 관리에게 몸도 팔고 알면서도 모른 체 하고 용서가 없고 죽을 것 같은 괴로움을 참기 위해 마약도 하고. ‘살기 위해 별짓 다 하는’ 사람들을 누가 욕하고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다만 안쓰러울 뿐이다. 다만 가엾어서 자꾸만 눈물이 났다.
우리가 자살을 타살로 기록하기 시작했을 때-
드라이만은 결국 웅크리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는 ‘행동하는 지식인’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동독에서 봤을 때 엄청나게 선동적이고 반동적인 드라이만의 개탄의 글이 서독 잡지에 권두기사로 실렸는데 그 글에는 숫자에 집착하는 사회에서 유일하게 통계를 내지 않는 것이 바로 자살률이라고 했다. 자살은 ‘자발적 살인’이라고 표기된다. 드라이만은 타살로 기록되는 ‘타인의 삶’을 위해서 결국 자신의 위험을 무릅쓴다. 인간은 이래서 안돼- 이것봐. 결국은 정에 이끌리고 말잖아... 이 대목에서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한숨을 쉬었다면 나는 못된 인간일까.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도 살기 위해 별짓 다 하잖아! 하고 외치던 크리스타의 흐느낌도 결국은 자신을 넘어서 다른 이의 삶을 생각하기 시작한 드라이만도 그저 가슴이 아팠을 뿐이다. 비즐러가 24시간 그들을 감시하며 그들의 반동적 행동을 모른 체 하고 그저 ‘평화로운 밤이었다’라고 기록하는 바로 그런 마음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타인의 삶>은 어쨌거나 비밀경찰 비즐러의 이야기였다. 웃지도 않고 흔들림이 없고 꾸미지않는 비즐러의 뒷모습을 보며 펑펑 울면서 나는 삶에의 강한 애착으로 영화관의 좁은 좌석이 고통스러웠다. 영화 내내 한번도 비즐러는 드라이만이나 크리스타처럼 괴로움에 눈물 흘리거나 몸부림치지 않는다. 딱 한번, 드라이만과 크리스타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돌아온 밤, 몸집 큰 창녀를 불러 급하게 관계를 하고 좀 더 옆에 있어달라고 부탁한 것이 그가 보여준 가장 격렬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비즐러는 그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일단 남들이 보기엔) 줄곧 살아간다. 임무를 맡았을 때도, 마음이 흔들렸을 때도, 누구보다 외로웠을 때도, 평생 편지검열이나 해야 했을 때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도, 그리고 그 이후의 허탈해 졌을지도 모르는 긴 자유의 시간에도- 타인은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매일 천번씩 화내고 천번씩 웃어대고 천번씩 삐지고 천번씩 기뻐하는 나 같은 인간들은 아마 영원히 모를지도 모르겠다. 높은 자살률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그의 뒷모습이 그래서 더 가슴에 맺히나 보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역시 누구보다도 비즐러에게 정이 가는 건 어쩌면 나의 동정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정심이 뭐가 나쁜가. 나는 단지 모든 ‘타인의 삶’이 따뜻하기를 바랄 뿐이다.
ps.이 영화를 보고 나는 자꾸 김수철의 <못다 핀 꽃한송이>를 불렀다. 자꾸 자꾸 불러본다.
김수철. 못다 핀 꽃 한송이
언제 가셨는데 안오시나 / 한잎두고 가신 님아 / 가지위에 눈물 적셔놓고 / 이는 바람소리 남겨놓고 / 앙상한 가지위에 / 그 잎새는 한잎 / 달빛마저 구름에 가려 / 외로움만 더해가네 / 밤새 새소리에 지쳐버린 / 한잎마저 떨어지려나 / 먼곳에 계셨어도 / 피우리라 / 못다핀 꽃한송이 / 피우리라 / 언제 가셨는데 안오시나 / 가시다가 잊으셨나 / 고운 꽃잎 / 비로 적셔놓고 / 긴긴 찬바람에 어이하리 / 앙상한 가지위에 / 흐느끼는 잎새 / 꽃한송이 피우려 홀로 / 안타까워 떨고 있나 / 함께 울어주던 새도 지쳐 / 어디론가 떠나간뒤 / 님 떠난 그자리에 / 두고 두고 / 못다핀 꽃한송이 / 피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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