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이 통제된 냉전시대의 동독, 비밀경찰을 양성기관의 유능한 교수이자 자신역시 비밀경찰인 비즐러는 어느 날 수상의 명령 하에 극작가인 드레이만을 감시하게 됩니다. 타인을 감시하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겠지만 그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또 하나의 그가 되기로 하면서부터 열정적인 그의 삶에 애착을 갖게 됩니다.
한 편 드레이만은 사실 다른 동료들에 비해 동독의 체제에 대해 큰 반발심이 없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블랙리스트에 올라 연극계를 강제로 떠나게 된 스승의 자살에 깨달음을 얻고 동료들을 규합해 사상적인 글을 쓰는데 이미 드레이만의 삶에 빠져버린 비즐러는 이 사실을 묵인하지만 수사망이 좁혀오면서 그 자신 역시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최근 독일 영화계의 움직임중 하나는 '역사 속 독일의 자화상'에 관한 것입니다. 2차 대전으로 돌아가 히틀러라는 거물(국내 미개봉작인 '몰락')과 소피 숄('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이라는 역사속의 인물들을 끄집어내는가 하면 통일된 독일에 대한 코미디('굿바이 레닌')같은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분단 시절의 독일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이 어색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타인의 삶’은 위에서 언급했던 작품들과는 조금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시대의 피해자들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정작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다른 감성에 대한 부분입니다. 표면만 시대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 본질은 다른 영화라고 할까요?
영화를 언급하기 전에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왜 영화를 봅니까? 그건 누군가가 만들어 낸 가짜의 삶이며 두 시간 안팎의 환상에 불과한데 말이죠. 미술작품 하나가 수억대의 가격에 팔린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가끔 왜 그것들을 위해 시간과 돈을 소비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생각으로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에겐 과학기술 같은 객관적인 지표와 자료만이 가치를 가지게 될 것이고 문학이나 예술은 한낱 광대 짓에 불과할 것입니다. 바로 ‘타인의 삶’의 주인공 비즐러역시 그렇게 생각했을 지 모르지요. 어떤 즐거움이라곤 생각해 본 적 없이 일에만 매달리며 살아온 그에게 타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티켓이 주어집니다. 그의 시작은 마치 잘 모르는 작가의 전시회에 온 듯 냉담하지만 점점 미친 듯이 읽어 내려가는 소설책처럼 드레이만의 삶에 빠져듭니다. 이런 비즐러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게 있습니다.
우리는 돈을 내고 극장에 들어옵니다. 물론 시사회로 보는 분들도 계시지만 적어도 ‘시간’이란 비용만큼은 똑같이 지불하게 됩니다. 그리고 상영시간동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서 화면에 펼쳐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구경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눈으로 보다가 조금 더 지나면 감정을 개입시키며 즐거운 장면에선 미소를 보내고 슬픈 장면에선 눈물을 훔치게 됩니다. 이런 과정에 의해 카타르시스라는 용어가 등장하고 우리는 이 카타르시스를 위해 또 한 번의 비용을 지출하는 노력을 감수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화 ‘타인의 삶’의 비즐러와 관객이 차이를 보이는 점이 있다면 바로 ‘개입’의 가능성입니다. 철저히 ‘남’으로 분류될 수 있던 비즐러는 드레이만의 삶에 개입을 하면서 관객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줍니다. 이를테면 수상의 노리개로 전락할 뻔 했던 드레이만의 애인 크리스타에게 접근해 ‘당신의 팬’이라는 묘한 말을 남기면서 그녀의 마음을 돌려놓으면서 관객이 원하는 전개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후반부엔 오히려 개입이 보여주는 비극성을 보여주면서 감독은 모두에게 행복한 결말은 욕심이라고 역설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 드레이만이 비즐러에게 예의와 경의를 표함으로서 감독은 비로소 예술을 만드는 사람과 그것을 만나는 일반 관객의 관계가 계속 지속되어야 함을 이야기합니다. 이처럼 ‘타인의 삶’은 영화 속에서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우리들로 하여금 관객인 우리들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위에서 화두로 제시했던 예술이 지니는 존재가치에 대해서 생각해 볼까 합니다. 예술을 창조하는 사람의 열정과 그것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의 욕구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이상 예술은 존재한다고 보고 싶습니다. 예술가는 누구인지 모르는 비즐러와 같은 사람들이 그들의 작품을 보고 심지어는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술가는 그런 사실을 받아들여 더 좋은 작품을 만드는 이른바 선순환의 관계를 지속하는 것. 남을 통해 자신을 연마하는 것이 예술의 좋은 기능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 링크 자료는 네이버를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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