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로서 부리는 심보인지는 모르겠으나, 로맨틱 코미디라고 해서 무조건 남녀 주인공만 달랑나와서 둘만의 사랑만 속삭이다 끝나는 영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그게 로맨틱 코미디가 수행해야 할 당연한 기능이긴 하나, 그런 장르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더 깊고 은은한, 사랑보다 더 깊은 무언가에 대한 통찰이 있다면 이것은 로맨틱 코미디가 가끔 오해를 살 수 있는 "가볍다"는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강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장르가 커플 관객들만의 전유물이 되는 안타까운 상황이 발생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국의 워킹 타이틀 사는 로맨틱 코미디를 참 잘 만든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 <러브 액츄얼리> 등 이쪽에서 내놓는 대부분의 로맨틱 코미디는 남녀의 뻔하고 얄궂은 사랑에서 그치지 않고 한 인간의 성장,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와 같은 제법 묵직한 주제들을 공감이 가게 풀어놓고 있다.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헐리웃 로맨틱 코미디는 여전히 식상한 공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곤 했는데, 그런 헐리웃에 확실한 탈출구가 있었다. 바로 낸시 마이어스 감독. 그녀에 대해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그녀는 "미국의 워킹 타이틀"이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녹초가 되어버린 두 여인이 있다. LA에 사는 예고편 제작자 아만다(카메론 디아즈)와 런던 근교에 사는 웨딩 칼럼니스트 아이리스(케이트 윈슬렛). 아만다는 동거하던 남자친구의 외도에 치가 떨려 금방 헤어진 참이고, 아이리스는 3년간 사랑해온(심지어 그가 바람을 필 때도) 남자가 동료와 결혼을 발표한 뒤 낙담한 참이다. 이런 두 여인이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되니 그 장소는 바로 홈 익스체인지 사이트. 지금의 주변상황을 잠시라도 훌훌 털어내고픈 두 사람은 마음이 맞아 결국 집을 바꾸어 2주간 살기로 한다. 볼만한 남자는 제로라는 전제 하에. 이리하여 아만다는 런던 근교로, 아이리스는 LA로 향해 서로 다른 환경에서 2주동안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하는데, 그러나 인연이란 어딜 가도 닿게 되어 있는 법. 아만다는 아이리스의 오빠인 북에디터 그레이엄(주드 로)을 만나고, 아이리스는 아만다의 동료인 영화음악 작곡가인 마일스(잭 블랙)를 만난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인연을 쌓아가며 그녀들의 휴가는 그렇게 무르익어가는데, 그녀들은 과연 이 휴가에서 삶과 사랑의 해방구를 찾을 수 있을까?
일단 제작 초기부터 이 영화가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배우들 때문이다. 하나같이 호감인 배우들인데 이 네 배우들이 한 영화에 모였다는 것이 무척이나 기대가 되었었다. 아니나다를까, 이 영화에선 이들이 하나같이 다 멋있고 예쁘고 사랑스럽게 나온다. 카메론 디아즈는 일에서 똑부러지면서도 사랑에는 영 서툰 매력녀로서 한껏 섹시미를 발산하고, 케이트 윈슬렛은 이전까지 보여줬던 무거운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활달하고 밝지만 소심하기도 한 귀여운 여인의 모습을 원없이 보여준다. 남자배우들 또한, 주드 로는 예의 멋진 영국 훈남의 모습에다 가정적인 모습까지 더해 여성관객들의 지지를 아낌없이 받으리라 예상되고, 잭 블랙은 예의 오버스런 이미지를 벗어던지고(난 그래서 이 배우를 좋아하긴 하지만) 재치넘치고 따뜻한 훈남으로서의 모습을 새롭게 드러낸다. 이 네 배우들 모두가 때론 기존의 매력을 맘껏 살리면서, 때론 전혀 보여주지 못했던 새로운 모습으로 흥미를 주면서 영화를 화사하게 빛난다.(<불의 전차> OST를 입으로 흉내내는 그의 재치에서 이런 로맨틱 코미디에서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그의 유머감각을 확인할 수 있다)
배우들 못지 않은 쟁쟁한 카메오들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린제이 로한, 제임스 프랑코, 정말 아무렇지 않게 쑥 등장했다 들어가는 더스틴 호프먼, 거기에 '커밍 쑨~'의 그 유명한 헐리웃 예고편 성우 할아버지 할 더글러스 씨의 목소리까지 맛을 더욱 돋구는 양념 역할을 하는 카메오들을 찾는 재미도 만끽해 보시라.
한 명씩만 내세워도 웬만한 메이저 영화 나올 만한 배우들이 넷이나 나오고도 전혀 흐트러짐없이 하나같이 이렇게 생동감 있는 매력을 보여줄 수 있는 건 아마도 감독의 재능 때문이리라. 각본도 담당한 낸시 마이어스 감독은 전작인 <왓 위민 원트>와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 등에서 멜 깁슨, 잭 니콜슨, 다이앤 키튼 등 거물급 배우들을 캐스팅하면서도 그들에게 밝고 활달한 역할의 옷을 주저없이 입히면서 매력과 연기력 양면에서 제대로 그 진가를 발휘하게 만들었다. 이번 영화에서도 그런 감독의 재능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쟁쟁한 배우들이 넷이나 모이고도, 이들은 무게감 따윈 벗어던지고 재치 넘치고 따뜻한 캐릭터들 속에서 자유롭게 뛰어놀고, 그런 그들의 모습에 관객 또한 부담없고 인간적인 매력을 부쩍 느끼게 된다.
이렇게 활기 넘치는 캐릭터들 속에서, 낸시 마이어스 감독은 늘 단순한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넘어서는 특별한 알맹이를 더 첨가했다. <왓 위민 원트>에서 남녀 관계에 있어서 독특한 남녀의 감성을 상호 이해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해 이야기했고,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에서 노년에 이르러서도 관계에 대한 욕망은 여전하고, 그 욕망 속에서 언제든 활기를 되찾을 수 있다는 긍정적인 삶의 메시지를 던져주었듯, 이번 영화 <로맨틱 홀리데이>에서도 커플이고 아니고를 떠나 누구나 한번 보면 고개를 끄덕일 만한 따뜻한 삶의 메시지를 심어놓았다.
이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우리가 보기에 하나같이 매력적이다. 그런데 정작 그들은 자신들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 장동건이 "잘생겼다고 생각해 본 적 없다"고 하는 것만큼이나 망언이 될 수도 있겠지만, 영화 속 네 남녀는 끊임없이 거쳐온 인간 관계 속에서 그런 자신감을 잃었다고 할 수 있다. 아만다는 자신이 뭘 원하는지, 상대방이 뭘 원하는지 헤아리지 못한 채 사랑 언저리에서 조심스럽게 맴돌고, 아이리스는 사랑하는 이를 지켜보기만 하고 그가 뭔 짓을 하든 자신에게 다가오기만 해도 그저 좋아하는 수동적인 위치에 서 있다. 그녀들이 만나는 남자들 또한 다르지 않다. 그레이엄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신경쓰느라 바빠서 새로운 사랑을 찾는 것에도 몸을 사리고, 마일스는 늘 상대방의 잘못으로 사랑이 깨지면서도 자신에게서만 원인을 찾으려 한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 자신이 이끌어나갈 권리는 알지 못한 채, 늘 상대방에게 미안해 하고 나를 의심하고 낮추기에만 바쁜 것이다. 영화 속에서 아만다의 삶이 영화 예고편처럼 나레이션되는 장면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데, 여기서 아만다가 매번 이게 웬 헛거냐 하면서 숨어버리듯 이들은 자기 삶에서도 자기가 주인공이라는 것에 겁을 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또 다른 매력적인 캐릭터인 90세 극작가 아서 애봇(앨리 월러크)의 등장은 의미심장하다. 마일스의 말대로 그는 헐리웃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작가로서, 아이리스가 보통 이웃의 노인으로 여겼다가 새삼 그 명성을 깨닫게 되는 인물이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모른다. 실연당하고도 꿍하게 있는 아이리스더러 "당신은 조연이 아닌 주연배우"라면서 주체적인 사고를 일깨우면서도 정작 자신은 "아서 애봇과의 밤"이라는 행사를 극작가협회에서 추진할 만큼 가치 있는 사람임에도 웬 호들갑이냐며 손사래친다. 하지만 이런 그의 생각과는 달리, 그는 정말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보고 존경하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이런 이치는 아만다와 그레이엄, 아이리스과 마일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남남으로서 만난 이들 커플에게는 그들이 어떤 상처를 갖고 어떤 환경을 지녔듯, 서로가 여전히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구석으로 가득찬 상대로 느껴질 뿐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서로에게 주인공이 될 기회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자신들 또한 더 이상 오라면 오고 가라면 알아서 물러나고 떠났다 돌아오면 군말없이 받아주는 수동적인 위치에서 벗어나, 자기 의지대로 삶을 이끌어나갈 줄 아는 주인공으로서 성장해 간다. 충분히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고 드러낼 자격이 있고, 자신을 꾸짖기만 하지 않고 격려할 능력이 있는 주연배우로서의 역할을 깨달아 가는 것이다. 이렇게 그들의 여행은 단순히 세상을 잠시나마 잊고 도피하는 여행에서, 새 인연을 찾고 나아가 더 떳떳한 자신을 발견해 나가는 성장의 여행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로맨틱 홀리데이>는 네 남녀의 관계 속에서 단순히 알콩달콩한 사랑만 속삭이는 것을 넘어서, 삶과 사랑에 있어서 늘 알아서 조연 위치에만 머물러 있던 이들이 자신감을 되찾고 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는 주연배우 자리로 걸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렇게 로맨틱 코미디라는 자칫 얕게 보일 수 있는 장르에서, 한번쯤 곱씹어볼 만한 삶과 사랑에 대한 설득력 있는 메시지를 심어놓을 줄 알기에, 낸시 마이어스가 "미국의 워킹 타이틀"이라는 것이다. 닭살 돋는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기에, 솔로라 한들 이 영화를 전혀 겁낼 필요 없다. 확실히 이들의 "홀리데이"(영어 원제)를 "로맨틱 홀리데이"라는 이름 아래 한정지어놓기엔 이들의 휴가는 한결 더 깊고 은은한 여운을 남긴다. 아, 나도 여행 가고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