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영화 시리즈 중에서 <주온> 혹은 <그루지> 시리즈는 아마도 가장 몰인정한 시리즈가 아닐까 싶다. 다른 공포영화들은 아무리 살인마 또는 귀신이 무자비하다고 하더라도 어떻게든 정신만 잘 차리면 살아날 방법은 존재한다. 그 무시무시한 <링>의 사다코의 저주도 결국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있지 않던가. 그러나 <주온>과 <그루지>의 경우는 다르다. 우리 가야코 아줌마와 토시오 어린이의 눈에 한번이라도 들게 되면, 어떤 짓을 하더라도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제 아무리 여주인공이라도, 결국은 그녀 주변의 인물들처럼 똑같이 죽음을 맞이하긴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이 <주온>과 <그루지> 시리즈 속 저주는 무서우면서도 한편으론 그만큼 징글징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그루지 2>로 인해 가야코 아줌마와 토시오 어린이의 저주는 무섭고 징글징글한 느낌에서 성가신 느낌으로 한 단계 수준이 내려갈 상황에 처했다. 자고로 귀신의 저주란 필요한 순간에만 결정적으로 보여주며 그 포스를 유감없이 발휘해야 하거늘, 이 못말리는 모자는 너무도 친숙하게 자주 등장하는 바람에 존재감이 한층 가벼워졌고, 그만큼 이들이 주는 공포감도 가벼워져 버린 것이다. 무섭기보다 성가시고 귀찮은 느낌이 더한 그런 저주 말이다.
미국 패서디나. 오브리(앰버 탬블린)는 도쿄에 교환학생으로 간 언니 카렌(사라 미셸 겔러)이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오브리는 병환이 있는 엄마 대신에 도쿄로 날아가 카렌을 방문하지만, 카렌은 자기가 그녀를 막아야 한다는 이상한 얘기를 해가며 신경과민 증세를 보이다, 급기야는 오브리가 보는 앞에서 추락사하고 만다. 충격에 휩싸인 오브리 앞에 3년 전부터 카렌의 죽음과 관련된 어떤 집에 대한 사건을 추적해 왔다는 기자 이슨(에디슨 첸-진관희)과 만나게 되고, 둘은 카렌의 죽음 뒤에 있는 그 집의 비밀을 캐나가기 시작한다. 한편, 도쿄의 국제고등학교. 앨리슨(아리엘 케벨)은 이곳에 다닌지 6개월이 됐지만 여전히 소심한 성격때문에 왕따를 못면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던 중 이 학교에서 좀 논다는 바네사와 미유키가 앨리슨을 꼬드겨 강한 원한이 깃들었다는 그 집에 함께 들어간다. 그 집에서 바네사와 미유키는 자기들도 성공했다면서 앨리슨에게 귀신이 나오는 벽장 안에 들어가 10초만 세고 나오라고 제안한다. 하지만 짖궃은 이 아이들은 앨리슨이 벽장에 들어간 사이에 문을 닫아버리고, 앨리슨은 그 사이에 벽장 안에서 못 볼 것을 보고 만다. 그 이후, 세 아이들에겐 의문스런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기 시작한다. 또 다른 한편 미국 시카고, 제이크(매튜 나이트)라는 소년은 홀로 된 아버지의 새 애인인 트리시(제니퍼 빌즈)를 가족으로 맞아들인다. 이제 다시금 화목한 가정이 되는 찰나, 제이크는 집 안팎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끼게 된다. 이웃집에는 음침하고 살벌한 어떤 이가 아파트 안을 돌아다니고, 집안에서는 아버지와 트리시가 계속 싸우며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게다가 제이크 누나의 친구까지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과연 이들 주변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얘기한 줄거리에서 알 수 있듯, 이 영화에서는 각기 다른 곳, 각기 다른 인물들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세 가지 이야기가 교차되며 흘러간다. 사실 이전 <주온> 시리즈에서도 이런 시도가 나온 적은 있었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아무 상관없을 것처럼 평행하게 흘러가던 이 이야기들이 마지막에 가서 교묘한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는 점에서 제법 흥미로웠다. 도대체 왜 이야기를 세 개 씩이나 만들어 끼워맞췄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서로 아무 상관없이 흘러가던 이야기들이 실은 인물들 간의 교묘한 관계와 함께 나름의 질서를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막판에 가서 드러내는 것이다. 그냥 지나칠 수 있을 장면에 약간의 복선도 설치해 가면서 무관한 듯 밀접한 관계에 있는 세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능력이 제법 돋보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장점이 이 영화가 공포영화로서 갖고 있는 적지 않은 단점을 덮어주지는 못한 듯 싶다. 일단 이 영화는, 뻔하기 때문에 무섭지 않다. 관객이 정확히 예상한 장소에서 예상한 시기에, 예상한 방법으로 공포를 유발한다. 이 영화의 홍보 전단지같은 곳에서 얘기하길 시미즈 다카시 감독이 '<주온 2>와 같은 스토리였다면 이 영화의 감독을 맡지 않았을 것이다. 원작과 똑같은 리메이크는 1편으로 충분하다'고 얘길 했다는데, 이를 어쩌나. 이 영화도 마찬가지로 전작들과 별로 달라질 것이 없다. 토시오 고유의 책상 밑에서 위로 빼꼼히 올려다보기 스킬하며, 가야코 특유의 이불 안에서의 접선 스킬하며, 신문지들로 도배된 창문 너머로 보이는 눈빛들하며, 역시 가야코 특유의 뒤에서 손으로 얼굴 가리며 '내가 누구게?'하는 스킬하며 이전 <주온>과 <그루지>에서 봐왔던 익숙한 장면들이 너무 많았다. 물론 암실에서의 시간차 공격 스킬처럼 몇몇 참신한 장면들이 등장하긴 했지만 그야말로 극히 일부였다. 이미 익숙한 귀신들이 익숙한 방법으로 공포를 줘서, 미국 관객들에겐 몰라도 우리 한국 관객의 입장에선 이미 식상한 클리셰가 되어버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스토리 상으로도 가야코 아줌마와 토시오 어린이가 원혼이 된 배경 설명 장면도 <주온> 1편 때부터 보아 온 그 회상 장면을 또 집어넣고, 새롭게 추가된 사연이라곤 가야코의 과거에 대한 사연 한 가지 밖에 없이 계속 반복되며 역시나 진부함과 허무함을 자아냈다.
두번째로, 귀신이 한층 가벼워졌기 때문에 무섭지 않다. 줄거리에서도 알 수 있듯, 이번 영화에서는 각기 다른 세 장소에 있는 세 인물에게 동시에 저주가 퍼진다. 덕분에 우리의 가야코 아줌마와 토시오 어린이 역시 일본과 미국을 바쁘게 오가며 빡빡한 스케쥴을 소화해냈다. 세 주요 인물들에게 저주가 되어 나타나고, 그것도 모자라 그들 주변 인물들에게까지 나타나니 이들은 참 여러 곳에서 참 자주 나타난다. 때문에 처음엔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터라 꽤 섬뜩하다 싶던 것이 갈수록 이제는 '응 또 왔어?'하고 반갑게 맞이해 줘야 할 것처럼 익숙한 존재들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가야코 아줌마의 눈 부라리기 스킬도, 토시오 어린이의 고양이 외비명도 이제는 더 이상 무섭지 않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만한 요소가 되어 버리고 만다. 더구나 이들의 비주얼 또한 원작인 <주온>에서와는 달리(여기서 가야코가 온 전신에 피칠갑을 하고 계단을 기어내려오는 장면은 깊이 인상에 남는 비주얼임에 틀림없다) 헐리웃으로 건너오면서 한층 깔끔하고 세련되게 변해 상대적으로 비주얼에서 오는 공포감은 축소되어 버렸다.
영화 속 귀신들을 무슨 캐릭터 상품처럼 만들지 않을 거라면, 이 귀신들은 최대한 자신들의 초상권을 챙겨가면서 등장 횟수를 줄일 수록 공포감과 무게감을 더할 수 있다. 제 아무리 소름끼치는 귀신이라도 너무 자주, 시도 때도 없이 여러 곳에서 등장하면 그것은 곧 귀신으로선 치명적인 요소인 '이웃과 같은 친근함'이라는 느낌을 주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 속에서 가야코 아줌마와 토시오 군이 그런 인상을 주었다. 귀신이라 하면 결정적인 순간에 응축된 기를 한번에 발산하며 위력적인 공포감을 조성해야 하거늘, 우리 가야코와 토시오 모자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수시로 등장하다보니 공포감의 위력은 자연히 약해지게 되었다. <링>의 사다코의 경우를 보라. 우리가 여전히 그녀의 존재감에 무시무시한 위력을 느끼는 것은 그녀가 보여준 교과서적인 '최후의 결정타'가 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이 영화에서 무서운 장면은 가야코 아줌마와 토시오 어린이가 등장하는 장면이 아니라, 이들에게 홀린 사람들이 이상한 행동 양태를 보이는 장면들이다. 특히나 제목이 뜨기 직전 첫 장면은 관객들로 하여금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하기 충분하다. 이렇게 공포를 주는 방식에 있어서 변화를 꽤하며 가야코와 토시오 뿐만이 아닌 여러 수단을 탄력적으로 이용하는 것도 좋았을 텐데, 등장 분량만 늘여서 상대적으로 공포감은 줄어드는 역효과를 가져온 듯 싶다. 아무리 꽤 섬뜩하고 인상깊은 장면이 있어도, 정작 공포감을 조성해야 할 귀신 캐릭터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그건 문제가 있는 것이다. 잔혹한 살인 장면과 같은 기타 요소로 겁을 줄 수 있는 살인마 캐릭터가 아니라 존재 자체로 공포감을 줘야 하는 귀신 캐릭터인 이상, 관객들로 하여금 특유의 각기춤을 추며 다가오는 가야코를 보며 '어머 또 오셨어요?'하며 인사하고, 한 구석에 쭈그려앉은 토시오를 보고 '이리 온 아가~'하며 손을 뻗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주온> 1,2편과 더불어 <그루지> 1,2편도 나왔지만, 우리 가야코 아줌마와 토시오 어린이의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저주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거라는 형식적인 말만 되뇌이면서 여전히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저주는 퍼져나가고 있다. 그러나 스토리 상으로는 아무런 진행도 되지 않으면서 귀신들이 주는 공포의 강도는 점차 무뎌지고 있고 거기에 출연 빈도까지 높아진다면, 관객들은 여기서 긴장감보다는 싫증과 지루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나부터가 그렇다. <링>처럼 어떤 대안도 내놓지 않은 채 저주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며 끊임없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대체 언제까지 저러고만 있을건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으니 말이다. <그루지 3>도 나온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부디 3편은 어떻게 매듭을 좀 눈에 띄게 지어주길 바란다. 가야코와 토시오 모자가 주는 공포가 더 이상 아무런 이유도, 대책도 없는 성가지고 지긋지긋한 저주가 되어서는 안되니까 말이다.
한 마디 더 : 가야코 어머니의 영어 실력이 수준급이라 놀랐다. 딸이 하도 전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치다 보니 글로벌 인터뷰에 대비해 영어 공부를 미리 해놓으신건가. 산골 벽촌에 혼자 사시는데 어쩜 그리도 영어가 술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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