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쉰들러리스트와 비슷하다. 오스카 쉰들러가 자신의 재산과 지위를 이용하여 수많은 유대인들을 구해낸 것처럼 폴도 자신의 재산과 지위를 이용하여 후투족과 투치족 난민들 1000여명을 구해낸다. 주목할만한 점은 폴은 자신이 여태 축적했던 재산을 모두 사용했다는 것이다. 우선 자신이 지배인으로 있는 호텔로 데려가기 전에 이웃들을 구하기 위해 많은 돈을 사용했다. 호텔도착후에는 후투족 자치군 혹은 헌병 장군같은 사람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모두 사용했다.
그리고 폴은 외국의 후견인들로부터 지목받게되어 그의 가족과 함께 밀 콜린스 호텔로부터 탈출하여 외국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지목받은 사람들이 트럭에 태워지고 이동하려할때 폴은 자기 가족들만 태운채 자신은 갑자기 남기로 결정한다. 지목받지 못한 사람들을 버려둘 수 없다는 것이다.
폴의 이러한 이타성은 '이기적 유전자'의 관점에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가족만 보호하면 되지 왜 다른 사람들까지 도와주고 싶어하는 걸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자신에게 무슨 이익이 있는걸까. 아 그런가. 이익때문이 아니라 비용때문에 움직인 것일까. 즉 그 사람들을 구하지 않을 경우 자신이 지불해야할 '죄책감에 시달리는' 비용이 너무 크다고 판단한 것일까. 근데 왜 폴은 죄책감을 느끼는 것일까. 교육을 그렇게 받았기 때문일까. 교육만 받으면 다 이렇게 될 수 있는 걸까.
죄책감이란것은 무엇일까. 경제학적으로 분석해보자. 죄책감이라는 것은 죄를 지었다는 느낌이다. 죄는 선의 반대개념이다. 선한것을 위반한 것이 죄이다. 선의 내용은 일반적으로 합의에 의해 채워진다. 합의는 합의자들 개인의 이익을 최대한 골고루 만족시켜주는 선에서 이루어진다. 폴이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선을 위반함으로써 자기이익을 보장해줄 합의를 깨뜨리게 되면 자기에게 손해이므로 이 손해를 막기위해 그가 무의식적으로 작동시키는 경고등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폴은 이타주의적 인간은 아니었던 셈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죄책감이라는 경험은 그다지 단순하지 않다는 점이다. 위에서 언급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라면 그냥 빨간등이 반짝반짝이는 경험정도만 하면 된다. 하지만 폴이 느끼는 감정은 매우 화려하여 언어 또는 그림으로도 표현해내기가 곤란하다. 이러한 점이 함축하는 바는 폴의 죄책감이라는 것이 단순히 경고등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어쩌면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부분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폴은 사람들의 죽음자체에 대해 슬픔을 느꼈던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트럭에 타지 않았을지 모른다.
<만약 세상 사람들이 그 장면을 보게 된다면 "오, 하느님, 끔찍하군요"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태연하게 저녁식사를 계속할 겁니다.>
폴은 끔찍하다고 말만 하고 마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움직인다. 아처여사도 움직인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생명들을 구해낸다. 그의 아름다운 마음에 신의 가호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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