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우리는 아예 현실적인 것이나, 아예 비현실적인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영화를 볼 때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현실적인 요소들로 똘똘 뭉친 영화들에 소름끼쳐 하고 열광하기도 하면서도, 동시에 상상력이 집대성된 아예 다른 세계를 만날 때에도 그 놀라운 상상력에 감탄하며 열광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과 비현실이 만나면 대단히 당황스러워 하곤 한다.(<해리 포터> 시리즈의 경우엔 그마저도 너무나 흥미진진하고 결이 세세한 상상력때문에 열광했지만) 마치 현실과 비현실의 세계는 정확히 구분되어 있어야 할 것처럼, 둘이 만나면 대단히 꺼림직한 화학반응을 일으킬 것처럼 우리는 그 만남의 부작용에 대해 걱정할 때가 많다.
이런 우리들의 보통 생각을 과감히 파고들고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이 상당히 용감한 영화를 내놓았다. <레이디 인 더 워터>는 한편으론 대단히 뻔한 영화가 될 수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상당히 대담한 영화다. 우리가 그토록 우려하던 현실과 비현실의 만남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가 이 영화를 보고 감독의 전작인 <식스 센스>처럼 만장일치로 열광하거나 할 수는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니, 애매한 반응도 아니고 평가는 완전히 극과 극으로 갈릴 것이 분명하다. 감독도 그걸 알고 있었는가보다.
필라델피아의 한 아파트단지에서 관리인을 하며 홀로 외로이 살아가고 있는 중년의 남자 클리블랜드 힙(폴 지아마티). 아파트 주민들과 모두 안면을 트며 살아가고 있지만 어딘가 무거워보이고 허전해보인다. 그러던 그에게 비범한 사건이 발생한다. 얼마 전부터 누군가가 계속 밤마다 몰래 아파트에 있는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는 것을 알게 되고 의문을 품던 중 우연히 그 정체를 발견하게 되는데, 알고보니 그 정체란 대단히 연약해 보이고 불안해보이는 여인.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스토리(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라고 하면서 사명감을 느꼈냐는 둥, 나프라는 둥 이상한 말만 해댄다. 의문만 잔뜩 생기던 클리블랜드는 아파트에 살고 있는 한국인 대학생 영순에게 궁금증을 털어놓는데 영순은 동양의 설화 중에 그런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아니나다를까, 스토리는 "블루 월드"라는 물속 세계로부터 온 요정이며, 물속 세계와 담을 쌓은 인간 세계에 깨달음을 주기 위해 왔는데,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가 있어 제한된 시간 안에 자기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만약 이뤄지지 않는다면 현실세계에 엄청난 재앙이 다가온다는데. 처음엔 클리블랜드도 얼토당토않다고 생각하지만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현상, 정체모를 위협으로 인해 이게 정말 장난이 아님을 알게 되는데. 과연 그녀를 자신의 세계로 무사히 돌려보낼 수 있을까?
일단 이 영화를 보게 될 분들께 주의사항 세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한다. 첫째, 이 영화는 <식스 센스>로부터 시작해서 숱한 반전영화로 유명한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영화이지만, 결코 "반전영화"가 아니다. 인터넷에 있는 영화정보들에서도 어느 정도 알 수 있듯, 이 영화는 샤말란 감독의 <식스 센스> 이후 첫 "무반전영화"다. 그러니 반전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절대 마시길. 반전 없다. 둘째, 이 영화는 홍보카피에 나와 있는 "충격적 잔혹"동화도 아니다. 등급부터가 전체 관람가지 않는가. 다만, 샤말란 감독의 영화답게 스릴러적인 분위기가 흐른다고 하나, 그렇다고 "충격적 잔혹"이라는 자극적인 수식어까지 붙일만한 영화는 못된다. 마지막으로 셋째, 홍보되기로 이 영화가 한국의 전래동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이건 단지 영화 속 설정으로만 그렇게 나올 뿐 실은 샤말란 감독이 딸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던 중 즉흥적으로 지어낸, 온전히 창작된 이야기라고 한다.(사실, 한국동화에서 "스크런트"니 "타투틱"이니 하는 단어가 등장할 리가 없다.)
지금까지 샤말란 감독 영화에 나온 주연배우들이 나름 주인공스러운 파워가 있었던 데 비해 이번 영화의 주연배우인 폴 지아마티는 아직은 조연급 배우로 잘 알려져 있는 배우다. 그러나 연기력만큼은 절대 꿀리지 않음은 분명하다. 사람좋지만 내면에 지울 수 없는 아픔을 간직한 클리블랜드 힙이라는 역할을 제대로 소화해냈으니 말이다. 말을 더듬는 습관하며 소심하지만 강직한 성격, 중간에 살짝 보여주는 애교까지, 주인공으로서 영화를 이끌어갈 만한 알찬 연기를 보여주었다. <빌리지>에 이어 이번에도 샤말란 감독의 뮤즈로 낙점된 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 역시 전작에서 보여준 신비로운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금발과 금빛 눈썹,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한 눈빛에서 풍겨져 나오는 미묘한 포스는 물속 세계 요정이라는 다소 말하기 쑥스러운 역할의 이미지에 딱 들어맞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물론 인간이 아닌 특성상 다소 비정상적이고 불안정한 캐릭터 연기도 훌륭히 소화해낸 듯 싶다.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은 헐리웃 주류 감독들 중에서도 상당히 특이한 편에 속한다. 그는 영화를 들고 나올 때마다 상업적으로 얼마나 성공을 거둘 것인지 주목받으면서도, 동시에 이번엔 어떤 생각을 담았을지에 대한 기대감도 생기게 한다. 그만큼 헐리웃 주류 영화에서 보기 쉽지 않은 독특한 생각들을 곧잘 담는다는 얘기다. <식스 센스>만 해도 "귀신이 보이는 소년"이라는 어찌 보면 뻔한 소재에서 상상 못할 반전을 가져왔지 않은가. 거기다 그 이후 작품들에선 만화적 감성(<언브레이커블>, 미지의 존재에 대한 신비감과 불안감(<싸인>), 현대 사회의 폐단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빌리지>) 등 스릴러라는 장르영화의 구조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사고관을 은연중에 내비쳐왔다. 뿐만 아니라, 그가 <식스 센스> 이후로 지금까지 만들어온 영화들의 장르가 하나같이 스릴러였음에도 그 호흡에 있어서도 상당히 독특한 구석이 있다. 무작정 깜짝깜짝 놀래키거나 자극적인 비주얼, 혹은 빠른 편집으로 관객을 끌어들이지 않고 스릴러 맞나 싶을 정도로 호흡이 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호흡 안에는 어딘지 모를 차가운 기운 또한 느껴져 스릴러로서의 긴장감을 상당히 잘 살리기도 한다. 헐리웃 주류 영화라면 흔히 떠올리는 화려함, 속도감과는 상당히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 그의 영화 세계다.
그래서 처음에 이 영화 <레이디 인 더 워터>가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꽤나 독특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수영장에 요정과 같은 신비한 여인이 나타난다. 어찌보면 한없이 유치해서 헐리웃에선 씨도 안먹힐 것 같은 소재다. 그러나 샤말란 감독이 여기에 손을 댄다고 하니, 뭔가 신비롭고 독특한 스릴러풍의 영화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기대했던 대로, 이 영화는 샤말란 감독만의 잔잔하면서도 대담한 도전이 돋보이는 영화였다.
물속 세계의 요정이라면서 등장하는 여인의 모습이 어떤 비유적 의미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샤말란 감독은 이런 기대를 완전히 저버린다. 물속 세계의 요정이라고 주장하는 여인은, 정말 요정이다. 그리고 현실의 필라델피아 아파트 단지를 무대로 현실적인 일만 일어날 것 같던 영화 속 배경에는 갑자기 괴생명체, 기이한 현상들이 연이어 발생하기 시작하면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려간다. 현실에선 온전히 현실적인 일들만 일어나고, 판타지는 아예 딴 세계에서 따로 일어나야만 할 것 같은 우리의 사고방식을 배반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저 비유적 의미라고 생각했던 요정이니 괴물의 존재가 정말로 등장하니 당황스럽고 또 유치해보일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샤말란 감독은 이렇게 현실과 비현실이 서로 엉겨붙은 독특한 세계 속에서 자신만의 "잔잔하지만 차가운" 모험 이야기를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유난히 독특한 사람들만 모인 것 같은 아파트 단지에 다른 세계에서 온 요정까지 투입시키면서 현실에 포함시키기엔 좀 비현실적인, 비현실에 포함시키기엔 너무 현실적인, 현실과 비현실의 중간세계로 만들어놓는다.
이 속에서 주인공 클리블랜드를 비롯한 단지내 사람들은 모두가 독특한 개성과 더불어 자신만이 해낼 수 있을 듯한 역할을 하나하나씩 얻어가면서 현실을 배경으로 한 이 판타지 어드벤처의 결말을 향해 나아갈 하나의 원정대를 만들어나간다. 요정과 그에 관련된 이야기를 유일하게 제대로 알고 있는 한국인 모녀의 이야기대로 주민들의 역할들이 맞아 떨어지고, 상황이 전개되는 것을 지켜보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이들은 모두 한국인 모녀, 몸의 반쪽만 근육을 키우는 희한한 청년, 매사에 시니컬한 영화 평론가, 글재주는 없지만 단어 재주는 탁월한 남자, 시리얼 상자에서 인생의 진리를 읽는 아이 등 미국 사회내에서 주류에 속한 사람이라곤 보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그만큼, 영화 역시 헐리웃 주류에선 보기 힘든 비주류적 분위기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비주류적 사람들을 이끌고, 어느 한곳에도 속하지 않은 독립적 이미지를 가진 세계를 배경으로 말이다.
영화는 마치 현실과 판타지가 자기만의 세계에서 꼭 따로따로 놀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주장하고 있는 듯하다. 때론 두 세계가 만나 이루는 또 다른 세계가 이제까지는 볼 수 없었던 독특하고 희한한 매력을 보여줄 수도 있다고 영화는 이야기한다. 영화 속에서 요정 "스토리"가 물속 세계와 인간 세계를 이어주고자 하는 역할로 등장한다는 것도 어쩌면 그에 대한 비유적 의미가 될지도 모르겠다. 현실의 아픈 상처에 얽매여 우울해하던 클리블랜드도 다른 세계에서 온 이 요정을 만나게 되면서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어떤 사명감, 삶에 대한 강한 의욕을 만나게 된다. 서로 벽을 쌓으면서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아파트 주민들도 이 요정을 계기로 어떤 임무를 공유하며 함께 도와가는 의미 있는 일을 겪게 된다. 아마도 영화는 이를 통해, 현실이라고 해서 현실 속에만 처박혀 있지 말고 판타지와 직접 대면해 보는 것도 새로운 삶의 이면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얘기하고 싶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새로운 면을 앞서 발견하게 하는 사람으로서, 감독은 자신이 그 역할을 맡으면서까지 "작가"라는 직업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듯도 보인다.
요즘들어 부쩍 현실적인 배경에서 현실적인 묘사에 치중하는 영화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을 때에(심지어 판타지 세계조차도 그 디테일함이 너무도 현실적이고), 뭔가 얼토당토 않더라도 현실적이지 않은 낯선 분위기의 영화를 찾는 이라면 이 영화가 상당히 마음에 들 수도 있겠다. 물론, 그런만큼 이 영화가 다수를 위한 영화는 결코 아니다. 영화 속에 비중 있는 조연으로 등장하는 샤말란 감독 또한 그걸 알고 있는 듯하다.(영화 속에서 그는 비주류적 사상에 대해 글을 쓰는 작가로서 요정의 예언을 들은 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느낀다.) 비록 반전도 없고 영화적으로 강렬한 임팩트도 크지 않지만, 현실과 비현실 그 어중간한 곳에 놓인 아파트 단지 안에서 사람들이 펼치는 작은 모험을 보고 나면, 분명 흔한 세계에서 겪는 흔한 모험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을 것이다. 샤말란 감독의 영화 세계에 있어 반전 임팩트는 이제 논외의 대상이다. 반전의 유무를 떠나, 그의 세계관은 갈수록 독특하고 매력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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