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 11일이 5년이나 지난 지금 할리웃은 그 시간을 되돌리려고 하는 것만 같다. 얼마전 개봉한 '플라이트 93'과 마찬가지로 '월드 트레이드 센터' 역시 그 날의 기억을 플래쉬백한다. 물론 시선은 다르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이제서야 그날의 기억을 영화화한다는 게 늦은 감이 없지만 당사자들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그 생생했던 비극을 상품화한다는 것은 염치없는 일일것은 분명하기에 그 충격의 잔해가 기억의 밑바닥으로 침전하는데 걸린 시간은 족히 5년정도가 소비된 것인지도 모른다.
뉴욕 한복판에 두개의 탑처럼 우뚝 서 있던 뉴욕세계무역센터는 광활한 공터인 그라운드 제로가 되었다. 물론 시간에 의해 희석된 비극성은 더이상 그곳의 비통했던 기억을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되돌리고 있으나 여전히 그날의 끔찍한 기억은 유효하다. 적어도 그날을 아직도 말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고 그것을 듣는 이들이 있다는점에서 충분히 그 날은 상기될만한 여지가 농후하다.
어쩄든 이 영화는 그날을 되돌린다. 쌍둥이가 건재하던 그날로. 그리고 영화의 시작은 일종의 선포와 같다. 이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되었다는 각인. 그렇다. 이 영화는 실화의 재구성, 혹은 재생에 가까운 출력이다. 문제는 영화가 보는 시야의 너비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누구의 시선으로. 누구에 대한.
물론 그 중심에 있는 것은 치명적인 상처를 받은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민들이다. 세계의 중심에서 평화를 외친다는 자부심의 한복판에 불의의 기습을 당한 그들의 모습. 무너지는 쌍둥이 빌딩을 멍하게 지켜봐야만 했을 그들의 심정. 그래서 영화는 일단 조바심이 난다. 일이 터질 것은 확실하니까. 무역센터가 무너지는 것은 이미 예정된 일이다. 문제는 그 타이밍. 과연 그 시점에서부터 발생되는 사건은 무엇이 되느냐다. 그리고 영화가 조명하는 그 사건을 관통하는 파편적 주제. 그것이 9.11을 다룬 영화들이 관심사를 받는 이유가 되겠다.
일단 이 영화는 '플라이트 93'과 이야기의 궤도가 다르다. 플라이트 93이 사건의 중심이 되는 무역센터와는 별개의 노선을 취함으로써 오히려 그날의 기억을 더욱 끔찍하게 각인시켰다면 이 작품은 무역센터, 즉 9.11의 상징과도 같은 붕괴현장의 기억을 생생하게 다룬다. 마치 망각의 잔해속에 묻혀있던 기억들을 하나씩 끄집어내듯이.
그리고 그 주축의 대상은 두명의 조난자이다. 민항기의 충돌로 인해 휑하게 구멍이 난 무역센터로 구조를 위해 뛰어든 항만경찰청의 경사 존 맥클라린(니콜라스 케이지 역)과 그의 부하인 윌 히메노(마이클 페냐 역)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붕괴된 빌딩아래 깔린다. 그들은 콘크리트 더미에 눌려 옴싹달싹도 못하고 죽음을 예감하지만 마지막까지 죽음과 사투를 벌이며 구조를 기다린다. 의지할 것이라고는 서로를 찾는 목소리뿐. 서로의 목소리에 의지한 채 두사람은 기약없는 구조를 기다리며 엄습해오는 죽음과 맞선다.
일단 이 영화는 9.11테러 한복판에 놓여있던 사람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연계한다. 쉽게 말하자면 9.11테러의 연관성에 선자들을 보여준다. 단순히 그 현장의 피해자들만이 테러에 연관된 것이 아니다. 무너져버린 무역센터는 그것을 지켜본 이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 무역센터가 존재하는 미국의 국민들에게는 더할나위가 없었을테다. 말 그대로 9.11테러가 미치는 충격의 반경효과는 미국인들 전체라는 것이다. 그들이 믿고있던 안전한 지붕의 붕괴. 셰계평화를 수호하는 국가의 중심에서 날아든 파편의 충격은 거의 공황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사실 여전히 그날의 진실은 모호하다. 최근 미국의 자작극이라는 의문에 대한 여론도 거세지고 테러 후 일어났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의 정체성도 질타를 받았으며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물론 음모론은 그 현장에서 직접 혼돈을 겪었던 이들과는 별개의 문제다. 영화는 사건 그 자체만을 다루고 그 사건의 현장에 존재했던 이들을 다룬다.
문제는 그 처리에 있다. 사실 피해의 당사자인 미국시민, 다시 말하자면 그 현장의 혼란을 직접 겪은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과연 편애를 해야하는가의 문제다. 영화는 노골적으로 적의감을 표출하지 않지만 부분부분 보이지않는 적과의 대결의지를 장착시켰다. 중간에 삽입되는 부시 대통령의 실제 성명발표장면이나 무너지는 무역센터를 지켜보는 시민 중 어느 누군가가 읊조리는 욕설의 대상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로 인해 미화되는 대상은 누구인가.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에 거스르는 쿠데타로부터 국가의 존위를 지키는 자부심 바로잡기 프로젝트는 이 영화의 본래 목적과도 같아 보인다. 마치 고난을 극복하고 죽음과 맞써 살아남은 이들의 드라마처럼 보이지만 그 뒷면에는 끔찍한 테러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그들의 강인한 생명력을 어필하는 것처럼 보인다.
외부의 적은 내부의 단결을 도모한다. 끔찍한 만행같은 테러로부터 아마 미국인들은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을 강화했을 것이다. 타인에 대한 불신의 초래. 그리고 그들은 -물론 미국 정부가 100% 모든 미국인의 의사를 반영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모든 사태의 원인은 테러리스트들에게 있다고 공언하며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한다. 그리고 바로 발발한 것이 아프가니스탄 공습 -솔직히 그 일방적인 공격을 어떻게 전쟁이라고 칭할 수 있는가-과 이라크 전쟁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배후의 원인이다. 테러의 행위 자체는 옳지 않다. 그 끔찍한 폭력성과 그 폭력의 행위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애꿎은 이들의 피는 테러리즘에 대한 비극을 상기시키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그 테러리즘의 극단성까지 향하도록 상황을 간과한 본인의 자세도 문제가 아닐까. 이 영화가 만족스럽지 못한 것은 일방적인 시선이다. 단지 피해당했음에 대한 억울함과 그에 대한 분노가 함의된 단결만이 영화에 흐른다. 자기반성과 재고의 여지는 보이지 않는다. 단지 그날의 기억안에서 피해자로써의 당당함만이 영화에 각인되어있다. 9.11 테러 이후로 불거진 미국인들의 자기반성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이 이 영화가 간과하고 있는 점이자 씁쓸한 자기 방어적 의지이다.
물론 살아남은 이들의 숭고한 드라마까지 깎아내려서는 안된다. 하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국가에 귀의하는 전역한 해병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것은 숭고한 애국애인가 미국의 우월적 자존심인가. 이것이 이 영화가 은연중에 흘리는 양면적 표정이다. 쓰러진 성조기를 다시 세우듯 영화는 무역센터의 붕괴가 미국의 붕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만 같다.
또한 실화를 바탕으로 했음은 안전 장치와도 같다. 제작된 이야기가 아닌 실화인 이상 이 영화의 내용은 진실에 가까운 신뢰도를 획득한다. 그럼으로써 동시에 영화의 일방적인 자국 우월론마저도 휴머니즘으로 위장되어 잠식될 우려가 크다.
생존자들을 위한 송가. 하지만 희생자들을 위한 언급은 어디에도 없다. 은연중에 흐르는 슬픔이 이를 반영하는 듯 하지만 살아남은 자를 위한 환호속에 묻힌다. 결국은 모든 것이 극복의 이미지다. 패배란 없다. 그들의 자존심이 무역센터의 붕괴와 연결되지 않았음을 영화는 주장한다. 그날 이전의 상황은 중요치 않다. 그날 이후의 극복만이 관건이고 희생된 이들보다는 살아남은 이들이 중요하다. 이는 플라이트 93과는 매우 대조적인 측면이다. 플라이트 93은 희생자들의 마지막 순간을 담아내며 그 사태의 비극성을 객관화하지만 월드 트레이드센터는 그 일부의 생존자를 조명하며 사태의 비극성을 주관적으로 미화한다. 갚은 고찰 대신 얄팍한 위장이 영화의 주를 이룬다.
2년 뒤 무역센터의 잔해로 뒤덥혀 있던 그라운드 제로에서 생존자들을 위한 행사가 열린다. 그들은 의기양양하다. 살아남았으니까. 그 악마같은 테러를 이겨냈으니까. 미국이 이라크에 퍼부은 미사일로 수많은 이라크 시민들이 사망하거나 다쳤다. 그리고 여전히 그곳은 혼란스럽다. 무역센터의 붕괴는 그들을 흔들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빌미로 후세인을 전복시키고 이라크를 혼돈으로 몰아넣었다. 결국은 누가 승리자인가. 여전히 아랍은 분노한다. 여전히 그 대립구도는 존재한다. 오히려 더욱 암묵적이고 치열하게.
무너진 무역센터는 과연 미국인들의 가슴에 무엇을 안겼는가. 외부의 적에 대한 분노 혹은 복수심일 수도 있겠지만 분명 그들은 무엇인가 자신들의 국가가 지닌 타민족의 반발적 충격 행위를 목격했다. 그로부터 느껴지는 것은 단순한 돌발적 감정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영화는 그런 고민따위는 간과해버린다. 진지함의 여부가 아닌 깊이가 결여되었음의 문제다. 이 영화는 9.11을 추모하는 것 같지만 그 날의 교훈을 깡그리 무시하고 모욕한다.
예전 신문에서 얼핏 9.11당시 그 현장에 성조기를 바로세우는 구조원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사진은 미국의 힘의 원천을 증명하는 것만 같았다. 다양한 민족들이 모였지만 미국인이라는 국적하에서 하나의 공동체로 거듭난다. 하나의 국가관으로 거듭나는 다양성. 그것이 미국의 힘이다. 그리고 영화는 다원화된 결속력으로 무장한 미국인의 힘을 설파한다. 그리고 외부로부터 날아온 위기를 그 힘으로 극복했다고 자위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위일 뿐이다. 타인의 눈에 비춰지는 자국주의적 애국심은 때론 배타적인 자국우월성으로 함축된다. 지금까지 수많은 할리웃산 영화가 그랬듯이 이 작품도 족보를 이어간다. 문제는 무엇을 다루고 있는가이다. 9.11을 상기시키며 그런 작업을 이어나간다는 것. 그것은 상당히 찝찝하고도 불쾌해지는 사실이다. 불필요하게 휘날리는 성조기를 바라보며 감동에 젖을 외국인은 없다.
-written by kharis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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