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나름 오랜 세월동안 봐 오고 나의 가장 중요한 문화생활로 여기게 되면서 얻은 나름의 노하우를 얘기한다면, 매번 다른 목적을 가지고 만들었을 영화는 다른 관점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무슨 영화평론가도 아니고 즐거움을 얻으려고 영화를 보는 사람으로써, 어떤 영화엔 맞지만 어떤 영화엔 맞지 않을 수 있는 획일적인 잣대를 가지고 따지면서 보면 재미를 많이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추석 시즌 대표 코미디 영화로 자리잡게 된 <가문> 시리즈가 이런 노하우가 빛을 발하는 때이다. 1편도 그렇고 2편도 그렇고, 난 이 영화를 그저 한바탕 웃으려고 봤지 작품성이나 메시지를 따지려고 본 건 아니었다. 그 결과 재미는 나름 있었고 특히나 2편은 주변에서 들려온 혹평과는 달리 생각보다 꽤 많이 웃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번 추석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세번째 <가문> 시리즈 <가문의 부활 - 가문의 영광 3>(이하 <가문의 부활>)도 보기 전부터 그런 마음을 가졌다. 이제는 기자나 평론가들도 자포자기한 듯 이 영화에 융단폭격을 퍼붓고 작품성을 운운하는 것 자체를 거부했지만, 그래도 난 개의치 않았다. 허점이 많다 하더라도 일단 그저 웃고 싶은 관객의 입장으로서 충실히 웃겨만 준다면야 코미디 영화로서 어느 정도 제 기능은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적어도 웃기기는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계속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본 결과, 역시나 허점은 곳곳에서 눈에 띄었지만 남녀노소할 것 없이 관객을 웃겨야 한다는 추석특선 코미디로서의 의무는 저버리지 않은 듯 했다.
장씨 일가의 큰 아들 인재(신현준)가 검사인 진경(김원희)을 배필로 맞이하면서 백호파의 임원들이자 장씨 일가 구성원인 어머니 홍덕자 여사(김수미), 첫째 인재와 아내 진경, 둘째 석재(탁재훈)와 아내 순남(신이), 그리고 막내 경재(임형준)는 조폭 사업을 접고 본격적으로 깨끗한 사업을 시작하는데, 그것이 어머니 홍덕자 여사의 손맛을 살린 "엄니손 식품" 반찬사업이다. 입소문은 퍼지고 퍼져 코스닥에 상장할 만큼 사업은 성장하고, 이들의 새삶은 탄탄대로인 듯 보였다. 그러나 2편에서 인재와 진경을 모함하려다 발각돼 교도소에 수감된 봉명필(공형진)이 출소하고, 봉명필은 자기를 물먹인 장씨 일가를 향한 복수를 꿈꾼다. 봉명필의 계략에 말려들어간 장씨 일가의 "엄니손" 사업은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장씨 일가는 집까지 팔고 길바닥에 나앉을 위기에 처한다. 과연, 장씨 일가는 이 위기를 딛고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을 것인가?
2편의 출연진들이 그대로 나와 각자 코믹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가운데(무시못할 유명 출연진들이 전편과 비슷한 수준의 속편에 다시 모여 1년만에 영화를 만들어낸 걸 보면 역시 대박흥행의 힘은 대단한가보다), 가장 눈부신 코믹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들은 단연 김수미 씨와 탁재훈이다. 전편에서는 다소 민망한 수술 에피소드로 꽤 많은 웃음을 주었던 신현준은 이번 영화에서는 역할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아 아쉽고, 김원희는 전편과 비슷한 밀도의 적당한 코믹 연기를 보여주고 있으며(특히 회상 장면에서), 신이는 <구세주>에서의 컨셉을 계속 이어가는 듯해 좀 아쉬우면서도 후반부 <엔트랩먼트> 패러디 장면 등 여전히 능숙한 코믹 연기를 보여주고 있고, 임형준 역시 전편과 비슷한 정도의 가끔 웃기고 가끔 반항하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김수미 씨가 없었다면 이 영화의 웃음의 두께는 한층 더 얇아져 건질 것이 별로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만큼 김수미 씨가 보여준 코믹스런 카리스마는 이번 3편에서도 제대로 빛을 발한다. 초반부 "엄니손" 홈쇼핑 출연 장면에서 끊기지 않고 꽤 오래 지속되는 롱테이크 장면임에도 남편 관련 에피소드에서부터 일본 전화에 이르기까지 쉴새없이 이야기를 펼쳐내는 모습은 배를 잡고 웃는 걸 넘어서 감탄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 남편과의 행복했던 때를 떠올리는 장면에서 보여주는 젊었을 적 모습은 머리스타일이 너무 산뜻해서 그런지 전혀 딴사람처럼 보이고, 그래서 그런 언밸런스함에서 비롯된 유머가 더 배를 잡게 한다. 이외에도 수시로 뜬금없이 뱉어내는 욕설들, 아무렇지도 않지만 특유의 허스키하고 심드렁한 톤이 더해지며 웃기게 들리는 몇몇 대사들 등 김수미 씨가 이 영화에서 미치는 영향력은 실로 지대하다고 할 만하다.
3편에서는 둘째 석재의 비중이 꽤 커졌는데, 그래서 그런지 석재 역의 탁재훈의 코믹 연기 내공도 한층 눈에 띈다. 화려한 말빨이 무기이니만큼, 이 영화 속에서도 그의 능수능란한 대사 소화는 수시로 웃음을 자아낸다. 어설픈 서울말 흉내하며, 강약과 높낮이를 능숙하게 조절하는 쫄깃쫄깃한대사 소화력은 여러 쇼프로의 MC 때 모습에서 엿보였던 현란한 말재주의 위력을 확실히 증명해주었다. 회상 장면에서 왕자파스 머리를 하고 펼치는 우스꽝스런 연기들도 웃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영화는 관객을 웃기기 위해서 생각보다 다양한 시도를 한다. 회상 장면을 수시로 집어넣어 지금은 나름 세련된 인물들의 촌스럽게 망가진 모습을 보여주며 웃음을 주기도 하고, 여러 액션영화에서 보아왔던 슬로우모션이나 일대일 격투신, <엔트랩먼트>의 유명한 아크로바트 장면들을 패러디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꽤나 고전적인 여기저기 부딪히고 박는 슬랩스틱 코미디를 선보이기도 한다. 이외에도 2편에서도 보여줬던 교통사고로 웃기기 스킬, 은근히 사연이 있는 장씨 일가의 충직한 심복 종면(정준하)의 머리 관련 에피소드, 역시나 전편에도 등장했던 생식기 수술 관련 에피소드 등 풍성한 코믹 에피소드들이 등장하며 끊임없이 관객의 웃음보를 쿡쿡 찌른다. 밀도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렇게 꽤나 다양한 요소들이 곳곳에서 웃음을 주며 짧지 않은 시간을 즐겁게 해준다. 후반부에 가서 자못 진지해지려는 순간에도 확 깨는 욕설 구사와 코믹한 상황 연출로 한번 쥔 웃음보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 기술도 보여준다.
물론 허점을 말하자면 이도 만만치 않다. 일단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 개연성이란 걸 찾았다간 낭패 제대로 보기 십상이다. "새로운 길을 시작함->궁지에 몰림->음모를 밝히고 다시 도약함"이라는 뻔한 이야기 구조를 치밀하지 못하게 대충대충 답습하며 하나하나 예상이 가능한 이야기로 흘러간다. 특히 엄니손 식품이 모략에 빠져 몰락했다가 다시 살아나는 과정은 너무나 순식간이고 그 과정도 전형적인 방식으로 후다닥 넘어가서 현실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정준하가 맡은 종면이의 머리 관련 이야기는 분명 웃긴 건 사실이나 개연성이나 현실성 면에선 최악이라고 할 만하다. 악역이라고 등장하는 봉명필은 시종일관 복수의 칼날만 갈아서 아무리 악역이라고 해도 참 재미가 없는 캐릭터로 보인다.(거기다 역할을 맡은 배우도 그 재미있는 공형진인데) 거기다 악역으로서 보여주는 파워도 약하다. 한편, 유난히 비중이 많은 회상 장면은 갑자기 등장했다가 십여분을 끌고 가기도 해 좀 질질 끈다는 인상을 주기도 하고(댄스 배틀이나 노래방 장면의 경우가 그렇다) 주객이 전도된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석재가 관련된 몇몇 베드신이 등장하는 장면들은 많이 웃기지도 않은데 성적인 장면을 15세 관람가로서 좀 아슬아슬하다 싶을 정도로 오래 보여줌으로써 다소 말초적인 자극에만 충실한 것같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또한 확실히 중심 줄기로 잡을 만한 스토리(전혀 다른 환경의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가 있었던 1,2편과는 달리 3편은 장씨 일가의 재도약이라는 큰 틀을 중심으로 석재와 순남의 불화, 홍덕자 여사의 과거 등 여러 이야기들이 잔가지를 뻗어나가 좀 정리가 안된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렇게 뻗어나간 이야기들이 막상 끝에 가서는 흐지부지하고 싱겁게 마무리되기도 해 좀 무책임하게 이야기를 벌려놨다는 생각도 들었고. 한편으로는 전편에서 써먹었던 웃기기 전략을 그대로 다시 빌려온 장면들도 있어 좀 안이하지 않았나 싶기도 했다.(물론 그 장면도 여전히 웃기기는 했다.) 이렇게 작정하고 말하자면 이 영화가 가진 허점은 곳곳에 구멍이 송송 뚫린 게 훤히 보일 만큼 많다.
그러나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건, 이런 허점들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본 나는 여전히 많은 장면에서 깔깔거리며 대책없이 웃었다는 것이다. 몸을 사리지 않는 배우들의 적극적인 코믹 연기와 중견 연기자 김수미 씨의 든든한 기둥 역할, 과장되지만 꽤 웃기는 패러디 장면들과 유치하고 비현실적이지만 관객의 웃음보를 확실히 건드리는 여러 에피소드들은 다른 것은 제쳐두고라도 "웃고 싶다"는 대중의 욕구는 잊지 않고 충실히 채워주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시종일관 "저게 말이 돼?", "어떻게 얘기가 저렇게 쉽게 넘어가지?"하면서 딴지를 걸어도 어느 순간 우스꽝스런 유머에 몸을 들썩거리며 웃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뭔가 진지한 메시지를 건지길 원한다거나, 빈틈없이 꽉 짜여진 완성도를 기대한다면 그거야말로 매우 부질없는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추석에 뭔가 즐길 거리를 찾는 남녀노소를 타겟으로 만들어진 코미디 영화고, 그런 점에서 남녀노소에게 모두 먹힐 만한 보편적인 유머를 구사한다.(물론 몇몇 화장실 유머는 좀 민망하긴 하다) 사실 이렇게 남녀노소 모두를 노리는 코미디 영화가 뭔가 수준높고 독특한 유머를 구사한다는 것도 성공으로 가기엔 좀 힘든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 점을 고려하면 이 영화가 웃기는 방식은 지극히 쉽고 단순하지만 그만큼 호소할 수 있는 관객의 범위는 더 넓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작년과 비슷한 형식의 영화를 내놓고 또 돈을 벌고자 하는 제작사와 배급사의 욕심이 더 좋은 영화를 보길 원하는 관객의 입장에선 괘씸하게 느껴질 수 있고, 나도 어느 정도 그런 건 사실이다. 그러나 어떡하나, 원초적으로 웃기긴 해도 여전히 웃음의 본능은 거기에 홀딱 넘어가는 걸. 적어도 코미디 영화로서의 제 임무는 충실히 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다만, 이것도 한계가 분명히 생길 것이라는 걸(어쩌면 지금 생겼을지도 모르지) 염두에 둔다면 더 좋을 것이다.
한마디 더 : 엔딩 크레딧을 절대 놓치지 말 것. 가장 웃긴 장면 중 하나가 나온다.
또 한마디 더 : 4편도 계획중이라는데, 슬슬 걱정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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