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교 시절 필자는 항상 집에 있을 때 라디오를 켜고 살았다. 지금은 TV를 전혀 안보지만 -물론 TV따위를 보지않는다는 게 아니라 TV를 보고 앉아있을 시간이 없어서, 오해는 금물이다.- 그때도 TV를 잘 보지않았다. 그러나 라디오는 꽤나 듣는 애청자였다.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는 스튜디오를 화상으로 중계하는 '보이는 라디오'같은 시스템도 있지만 그 당시에는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단지 스피커를 통해 전해오는 DJ의 목소리와 음악만이 전부였다. 청각을 통해 전해지는 감수성의 극대화. 마치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듯이 일방적이지만은 않은 듯한 소통적 느낌. 또한 또한 책읽기와 같은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한 상상력의 발현. 어쩌면 이것이 라디오가 지닌 매력이 아닐까.
요즘은 비쥬얼이 대세다. 국내의 음반시장은 붕괴되고 음악만으로 승부수를 띄우는 싱어 송 라이터보다는 외모를 통해 끼를 어필하고자 하는 엔터테이너들이 대세를 잡고 있는 것만 같다. 귀가 아닌 눈으로 음악을 즐기는 세상이다. 물론 여전히 음악은 존재한다. 하지만 발전해가는 뮤지션보다는 잘 기획된 아이돌 그룹이 허다하게 눈에 띄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자신의 음악을 알리기 위해서 예능 프로그램에서 웃음이라도 팔아야하는 것이 추세인 시대다.
이 시대에 라디오 스타가 존재할 수 있을까. 어찌보면 이 영화는 제목부터가 회의적이다. 무언가 시대에 대한 불만을 함구하고 있는 것만 같은 아날로그적인 반항이 담겨있을 것만 같은 잔상이 서린다.
최곤(박중훈 역)은 88년도 MBS 가수왕을 수상한 왕년의 스타다. 하지만 그 뒤로 폭력 사건과 대마초 사건 등에 발목을 잡혀 반짝스타로써의 이름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신이 세웠던 과거의 영광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콧대높은 자존심 앞에서 현실을 무시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에게 남은 건 그에게 20여년이나 괄시를 받으면서도 함께 한 능력없다는 매니저 하나뿐이다.
박민수(안성기 역)는 88년도 MBS 가수왕을 수상한 왕년의 스타 최곤의 매니저다. 하지만 그 뒤로 폭력과 대마초 사건 등으로 몰락한 스타와 함께 내리막길 20여년의 세월을 함께 했다. 그리고 그 모르게 여기저기 돈을 빌려가며 그가 저지른 사건의 뒷수습을 해주면서 그를 보좌했다. 그리고 그에게 돌아오는 건 능력없는 매니저에 대한 괄시뿐. 적자운영되는 아내의 김밥집과 사랑스러운 딸조차도 뒷바라지하지 못하는 그에게 남은 건 과거의 영광스러운 한때를 함께한 과거의 스타와의 20여간의 악천고투같은 인생여한이다.
매니저와 스타. 단지 수완 좋은 파트너가 될 수도 있고 진정한 동료가 될 수도 있는 두사람의 관계를 영화에서는 지독하게 끊을 수 없는 절실한 관계정도로 그려낸다. 그러나 단순히 관계에 대한 구도만으로는 관객의 이해를 살 수 없다. 특히나 요즘처럼 자본력에 좌지우지되는 것만 같은 엔터테이먼트 업계의 상황에서는 비현실적인 어필이 될 수 있다. 그런 관계의 구도에 설득력이 붙을만한 이유가 필요한 것. 20여년이라는 세월동안 욕 꽤나 봤을 법한 민수가 곤의 옆에 붙어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째서 더이상 볼것도 없는 곤에게 민수는 그렇게도 헌신적이란 말인가. 그 모든 것은 오늘날의 상업적 기질이 농후한 시대성과는 거리감을 둔 듯한 라디오 스타라는 제목자체로부터 발산되는 기운 그 자체에서도 엿볼 수 있는 것만 같다. 아날로그적인 감성. 그리고 그 감성에서 뽑아져 나오는 인간미.
말 그대로 두사람의 관계는 인간적이다. 이해타산적인 채무관계에 얽매이는 것이 아닌 정으로써 통하는 형제지간같은 관계. 잘 나가던 반짝스타였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최곤에게 박민수는 기댈 수 밖에 없는 지지대와 같다. 그리고 매니저로써 한 시절 섬광같던 빛을 봤던 박민수에게 최곤은 다시 살려낼 수 있는 불씨이자 인생의 목적이다. 두 사람의 인생이 동반되는 것은 서로를 통해 얻어지는 결핍의 충만에 있다. 자신에게 가장 영광스러웠던 순간을 유일하게 알아주는 이와 그사람의 영광스러웠던 순간을 유일하게 존중해주고 그리워하는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애틋한 파트너쉽은 미워할 수 없는 철부지들의 미소와도 같다. 두사람이 만들어가는 인간적 신뢰의 구축은 관객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드는 감동적 재료가 된다.
또한 이 영화의 백미는 무엇보다도 최곤이 진행하는 라디오 진행인데 기획적이고 설정적인 방송이 아닌 막 나가는 즉흥적인 방송을 보는 재미는 상당히 쏠쏠하다. 마치 날것의 느낌이랄까. 그의 방송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먼 방송국의 DJ 목소리를 듣는다기 보다는 주변에 널린 소시민들의 일상을 주워듣는 생동감이 느껴진다. 우연찮게 방송을 타게 된 커피배달 아가씨 김양의 사연이 외상값 갚으라는 앙증맞은 경고메세지에서 절절한 어머니에 대한 고백으로 변해가는 과정으로부터 우리는 뿔뿔히 산재된 각자의 삶으로부터 통합될 수 있는 삶에 대한 재고를 꿈꾼다. 무언가 특별하고 대단해야만 라디오에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일상적이고 주변적인 이야기가 오히려 생동감있는 기획적 방편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삶에 활력소가 되어가는 과정은 상당히 흐믓하게 다가온다. 한 남자의 고백하지 못했던 짝사랑은 결실을 맺고 할머니들의 고스톱 판의 다툼은 중재된다. 또한 할머니와 아들을 등지고 떠난 아버지는 되돌아오고 백수 청년은 나름대로 일거리를 찾는다. 물론 이 상황은 영화적인 작위성으로 폄하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반감을 거세시키는 것은 그런 현실을 만들어가는 최곤 그 스스로의 변화모습에 있다.
마치 좌천되듯 영월 방송국 DJ를 맡게 되는 최곤은 전혀 방송을 하고자하는 의지가 없었다. 특히나 첫 방송부터 허세를 부리기위해 전화연결한 김장훈으로부터 질시와 모욕을 받자 더욱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게 된다. 하지만 우연찮게 마이크를 떠넘긴 김양의 사연으로부터 그의 변화는 시작된다. 그는 자신이 떠안은 2시간의 부담감을 보람으로 바꿔나간다. 보잘 것 없던 촌동네가 순박하고도 생동감 넘넘치는 정겨운 삶의 터전으로 인식되고 건성스럽게 답하던 전화인터뷰도 정이 넘치는 대화로 변한다. 라디오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감성적 교감이 흠뻑 흘러넘치듯 넘실거린다. 자질구레한 일상에 대한 소담들이 라디오 방송을 타고 흐른다. 우리의 보잘 것 없던 삶이 라디오를 타고 흐르며 방송은 삶의 현장이 되고 일상적인 생활의 이면적 재발견이 된다.
또한 이 영화는 오늘날 지독한 상업성으로 물들어가는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일침을 가한다. 예술이 상업적인 가치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상업적 목적에 의한 예술의 활용은 씁쓸한 단면이다. 오늘날의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모습은 재능있는 유망주에 대한 투자가 아닌 쓸만한, 즉 돈이 될만한 인재의 완성에 있는 것 같다. 좀 더 자극적이고 대중적으로 침투될 수 있는 하나의 아이콘을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오늘날 상업적 대중문화의 가치전도된 목적이다. 훌륭한 작품을 파는 것이 아닌 잘 팔리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 주안점인 오늘날의 대중음악은 실로 암울하다. 극중 최곤이 말하듯 우리나라에서 밴드를 하지 않는 이유는 고생스러움 때문이다. 훌륭한 음악을 해도 그것을 알아주는 이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그리고 그런 훌륭한 음악이 어필되려면 그만큼의 시도와 저변 확대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저변의 확대를 위한 방안은 전무하다. 양산되는 일회성 기획 음악의 자극성에 길들여진 대중들에게 깊이있는 음악을 요구하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그런 현실을 계속적으로 반복 학습하게 만드는 건 그런 류의 재질을 지닌 가수들의 양산시스템에 있다. 피자에 길들여진 입맛이 김치를 버리게 만들듯 실속없는 소비지향적인 형태의 일발성 음악이 오늘날의 대중음악계를 장악하고 발전적 성향의 뮤지션들의 활동사기를 떨어뜨리고 장기적인 발전성의 싹을 꺾는다.
사실 이준익 감독의 너무나도 유명한 전작 -이 영화의 홍보효과로도 상당히 우려먹어질 것이 뻔한- '왕의 남자'에서 보여지던 남자들간의 미묘한 감정의 교류가 이 영화에서도 목격된다. 다만 그 차이는 아가페와 에로스의 차이다. '왕의 남자'에서 두 남자의 교감은 상대에 대한 소유적 질투를 유발했음에서 에로스적이지만 '라디오 스타'에서는 상대방을 위한 헌신과 그 헌신의 받아들여짐 측면에서 아가페적이다. 헌신하는 자와 헌신을 받아들이는 자의 관계는 일방적인 듯 해 보이지만 쌍방적인 교류다. 주는 행위만큼이나 의미있는 받는 행위로써의 중요함. 그것이 두 사람의 관계로부터 느껴지는 애틋함이다.
라디오라는 매체는 점점 구시대의 유물에 가까워지고 있다. 세상이 바뀔수록 라디오가 설 자리는 점점 작아질 것이다. 마치 몰락한 최곤의 남루한 현실처럼 과거의 영광에 머물 것이다. 사라져 가는 것. 잊혀져 가는 것. 하지만 한 때 시절을 풍미했기에 아련한 추억으로 깊게 박혀있는 것. 과거뿐인 스타가 진행하는 퇴물스러운 라디오는 아날로그적 감성에 시너지 효과를 불어넣는다. 쉽게 간과되고 빠르게 흘러가는 오늘날의 급한 세상에 변하지 않는 과거의 감성은 촌스러움이 아닌 그리움으로 어필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모든것이 변해도 결국 변하지 않는 인간의 마음 그 자체에 있다. 아무리 세상이 척박해도 사람으로써 그리워하는 인간적 온기. 그런 온기를 최곤의 오후의 신청곡은 각자의 가정으로 전파를 통해 실어나른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그런 감성을 배달하는 최곤 역시도 자신을 지켜준 박민수의 존재감을 깊게 느낀다.
현실의 비정한 비지니스가 끊어보려 했던 20여년지기 동료는 다시 재회한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미소짓는다. 물론 두 사람이 다시 힘을 합쳐서 재기했을 것이라는 청사진은 그리기 힘들다. 최곤의 노래를 들어주기에는 세상이 너무나도 많이 변했고 그의 노래의 가능성에 투자할만큼 여유로운 감성의 스폰서도 없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기대야만 서로의 가치를 빛내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존재다. 자신을 인정해주는 상대방이 한명이라도 있다면 무가치한 백명의 존재보다도 훨씬 가치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따뜻한 교훈이 아닌지 싶다. 가진게 없어도 서로가 있기 때문에 아름답게 미소지을 수 있는 두사람처럼. 서로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들은 누구보다도 풍요로운 미소를 얻을 수 있다. 성공보다도 값비싸고 아름다운.
-written by kharis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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