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생 시절, 아니 초등학교 고학년 때까지만 해도 나는 라디오를 꽤 즐겨 들었다. 특히나 뭣모르고 라디오를 들었던 어렸을 때와는 달리 한창 야자시간에 교실에 틀어박혀 있어야 했던 고등학교 때 들었던 라디오는 더 각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이어폰을 꽂은 채 남들에게는 들리지 않은 채로 나에게만 전해져 오는 DJ의 음성과 사연, 음악들은, 분명 방송사가 전국을 대상으로 송출하는 방송인데도 마치 나에게만 얘기하고 곧 나에 대한 얘기도 해줄 것만 같은 친밀감이 유난히 크게 느껴졌었다.
지금은 대학교 생활 및 기타 용무로 인해 라디오 들을 시간도 여의치 않지만, 가끔 문득 라디오가 참 듣고 싶다는 생각이 확 들 때가 있다. 그저 딴 세상인 것처럼만 느껴지는 TV 속 세상을 멀뚱멀뚱 보다가도 갑자기 다시 나한테 가까이 와서 얘기해주는 듯 친근하게 다가오는 라디오가 땡기는 순간이 불현듯 오기도 한다. 이 영화 <라디오 스타>는 이렇게 지금은 우리 곁에서 왠지 멀어진 듯 하지만 어느 순간 문득 보고 싶고, 듣고 싶어지는 아련한 한 순간에 대해 얘기한다. 우리는 잊고 있었겠지만 그네들은 없어지지 않고 조용히 곁에 있었던 그런 순간들 말이다.
88년 가수왕까지 거머쥐며 전국의 소녀팬 및 락팬들의 심금을 있는대로 울렸던 톱가수 최곤(박중훈). 그러나 그런 그의 명성도 이젠 옛말도 한참 옛말이 됐고 이제는 배우자 몰래 밀월여행 오는 유부남녀 커플의 단골 라이브 레스토랑에서 분위기 휑한 라이브 공연만 술기운으로 근근히 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다가 제 버릇 개 못준다고, 또 레스토랑 사장과 주먹다짐이 오가고 이 때문에 다시 철창 신세에 놓일 위기에 처한다. 그의 20년지기 충실한 매니저 박민수(안성기)는 수소문 끝에 88년 가수왕으로 그나마 친분이 있는 방송국 국장에게 사정해서 최곤을 나오게 만들지만, 대신에 따라붙는 조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난데없는 영월의 지역 라디오방송 DJ를 하라는 것. 안그래도 3개월 뒤면 통폐합될 상황에 처했건만, 뜬금없는 DJ 제의는 여전히 톱가수로서의 자기 "가오"만 챙기는 최곤에게나 영월 방송국 쪽이나 난감하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별 수 있나, 울며 겨자먹는 심정으로 해야지. 여기에 원주에 있다가 생방송 중 급실수로 영월로 잠시 쫓겨난(?) 젊은 PD 강석영(최정윤)이 합류하면서, 그야말로 전국구에서 모여든 지역라디오 방송이 시작된다. 그러나 유난히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최곤의 성격 덕분인지, 라디오 방송은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 온갖 소동을 일으키는데.
나같은 젊은 관객층이 보기에는 이 영화의 주연 콤비인 박중훈-안성기 콤비가 다소 식상하고 오래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나도 그런 생각이 좀 들긴 했었지만), 그렇게만 생각했다간 제대로 큰코 다친다. 이 영화에서 두 배우는 콤비로서의 연기 호흡과 내공이란 어떤 것인지 확실히 보여준다. 우선 기꺼이 박수를 보내고픈 배우는 안성기 씨. 아무래도 "국민배우"라는 호칭이 있어서인지, 최근 그가 보여준 연기는 모범적이고 이상적인 캐릭터로서의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바로 전작인 <한반도>에서만 해도 이상적인 대통령의 모습으로서 "멋있긴 하지만 인간적으로 다가오지는 않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여준 게 사실이었는데, 이 영화 <라디오 스타>에서 그는 비로소 한동안 감춰두었던 인간미 듬뿍 담긴 코미디 연기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한 성격 하는 가수 옆에서 그보다 훨씬 나이 많은 형임에도 투정 한번 부리지 않고 시중 다 들어주고, 재롱도 떨어주고, 늘 웃으며 주변 상황 처리하고 다니는 그의 모습은 매 장면과 대사마다 솟아나는 재치 덕분에 한시도 웃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천연덕스런 코믹 연기만으로 연기 내공을 판단할 순 없다. 그런 그의 모습 뒤에는 스타를 챙겨주기 위해 자신은 모든 걸 버려야 했던 매니저의 초라한 모습 또한 투영되어 있어 웃긴 한편 찡한 감정도 선사해주었다. 너무 바보스러울 정도로 스타이자 친구만을 생각하고,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웃으면서도 무언가는 늘 잃을 수 밖에 없는 매니저의 모습을 안성기 씨는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어깨에 완전히 힘을 빼고, 정말 친근하고 푸근한 옆집 아저씨와 같은 모습으로 보여주었다. 그랬기에 그의 온갖 웃긴 제스처와 표정들을 봐도 그저 단발적인 웃음에서 그치지 않고 그에 대한 인간적 연민과 애정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다. "국민배우"로서의 무게를 던져버린 연기를 보여줌으로써, 안성기 씨는 왜 우리가 그를 "국민배우"라고 불러야 하는지를 다시금 확실히 증명해주었다.
박중훈 씨의 연기도 전혀 뒤쳐지지 않고 훌륭했다. 이 최곤이라는 역할이 객관적으로 봤을 때 확실히 한물 간 가수임에도 여전히 톱스타다운 권위만 추구한다는 점에서 다소 얄밉게 보일 수도 있는데, 박중훈 씨는 이런 최곤의 모습을 얄미운 왕년의 스타의 이미지로 보이기보다는 여전히 보살핌이 필요할 것 같은 미워할 수 없는 악동의 모습으로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늘 지 잘난 줄 알고 멋대로 굴다가도 어느 순간 자신은 독불장군으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 철은 덜 들었지만 본심이 밉진 않아 미워하기 힘든 그런 캐릭터 말이다. 사실 박중훈 씨의 최근 몇몇 작품들이 작품성이나 흥행성에 있어서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아마도 영화 속 최곤의 모습에 박중훈 씨의 현재 심정이 은연중 반영되어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다시 한번 일어나고 싶어하면서도 막상 왕년의 영광이 두려워지기도 하는, 그래서 누군가 곁에서 자기 손을 잡아주길 원하는 인간적인 스타의 모습이 박중훈 씨의 그런 진심에 힘입어 더 따스하게 와닿지 않았나 싶다. 이렇게 진솔한 내공들이 뭉쳐 보여준 연기 호흡은,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제대로 된 그림을 보여주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두 배우가 보여주는 장면은 그들 사이의 오랜 내공과 호흡으로 꽉 붙들어맨 진한 연기로 확실히 "멋드러지는 그림"을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두 배우 뿐 아니라 다른 배우들의 연기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재미다. 유일하게 "신참내기", "한창 때"인 라디오 PD 강석영 역을 맡은 최정윤은 예의 똘망똘망한 이미지에 다혈질적이고 남성적이기까지 한 털털한 모습을 더해 영화에 에너지를 더욱 불어넣어주었다. 지국장 역을 맡은 정규수 씨나 박 기사 역을 맡은 정석용 씨는 개성이 뚜렷하면서도 편안하고 인간적인 연기로 영화 전체에 너털웃음을 더 보강해주었다. 최곤의 열혈 추종자인 영월 유일의 밴드 "이스트리버"로 나온 밴드 노브레인은 정말 그들이 평소 보여준 장난기와 폭발할 듯한 에너지를 영화에도 그대로 가져와서, 가수들의 영화 첫 출연이라 해서 어색하다거나 하는 게 전혀 없이 대단히 자연스럽고 매끄러운 양념이 되어주었다. 관록 있는 배우들과 혈기왕성한 젊은 배우들 모두가 한 몸처럼 절묘하게 어우러져 영화의 재미를 더욱 차지게 해주었다.
안그래도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소재, 참신한 전개의 영화들이 우후죽순으로 나오고 있는 시대에 왕년의 라디오 가수가 시골 방송 라디오를 한다는 내용의 이 영화는 너무 무난하고 올드한 감성의 영화가 되지 않겠느냐는 우려의 시선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감독 이준익 감독은 영화의 겉모습이 올드하다고 영화가 전하는 이야기까지 올드하게는 만들지 않았다. 이는 그의 전작을 봐도 알 수 있다. <황산벌>에서 역사 속 인물들이 지녔던 예상 외의 냉혹한 전쟁의 광기를 들추었고, <왕의 남자>에선 그 훤한 연산군 이야기 속에서 쉽게 합해지지 못하는 계층간 욕망의 괴리를 비극적 시선으로 새롭게 조명하기도 했었다. 그는 뻔히 알고 있는 듯한 과거의 무언가에서 뻔하지 않은 무언가를 꺼낼 줄 아는 감독이었고, 이 영화에서도 그런 그의 능력은 빛을 발했다.(분명 감독의 데뷔작인 <키드 캅>도 봤으나, 너무 어렸을 때 본 관계로 기억이 선명하진 않다. 그러나 역시나 꽤나 재밌었던 건 확실하다.)
이 영화는 한마디로 "과거", "추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러한 소재를 갖다놓고는 "아,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대뜸 턱괴고 회상하고만 있지는 않는다. 영월이 도시에 비해서 "촌구석"으로 비춰질 순 있어도, 영화 속에선 마냥 순박하고 천진한 사람들로 가득차 낯간지럽기까지 한 이상적인 시골의 모습으로 조명하지도 않는다. 물론 도시에 비해 발전 속도나 규모가 뒤처질 순 있겠지만, 여전히 그들 나름대로 활기를 가지고 건강한 삶을 펼쳐가고 있는 것으로 나오니 말이다. 영화가 이런 도시 영월을 통해, 이런 최곤과 민수 등의 사람들을 통해 얘기하고자 하는 것도 비슷한 게 아닐까 싶다. 한때 엄청나게 열광했던 추억의 대상이 지금은 뜸해서 보이지 않더라도, 그것이 꼭 그리워해야 할 만큼 멀리 떠나 있는 게 아니라 단지 우리가 현재 삶에 하도 정신이 없어서 미처 주목하지 못했을 뿐이지 여전히 자기 나름대로 숨쉬고 있었다는 것 말이다.
영화 속 영월의 라디오 스튜디오는 10여년이 넘도록 사용을 하지 않아 마치 유물처럼 취급받던 곳이지만 막상 새로 문을 열고 라디오 방송을 보내기 시작하니 그곳에는 꽁꽁 숨어 있었던 활기가 여전히 숨쉬고 있었다. 다시금 주민들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라디오 선율을 따라 그들의 일상 또한 예전부터 변함없이 생명력 있게 이어져나가고 있었다. 첫 방송에서 시나위의 "크게 라디오를 켜고"가 흘러나오면서 비춰지는 영월 곳곳의 정경들은, 단지 과거의 무언가 혹은 잊혀진 무언가로 치부되어서는 안될,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시골"의 모습을 비춰주고 있다. 너무 감상적인 노스탤지어로 돌아가지 않고, 자칫 빛이 바래질 수 있는 복고적인 시골의 풍경도 끊임없이 우리와 함께 걸어가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런 영월의 모습은 과거의 명성에 집착하면서 늘 자기 "가오" 사는 것만 걱정하던 최곤의 모습에도 조금씩 변화를 가져온다. 예전에는 수많은 오빠부대들을 몰고 다니며 국민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지금은 최근의 대마초 사건이나 언급해야 젊은 애들이 알까말까한 가수가 되어버린 최곤은 그래도 과거에 가졌던 자신의 명성이나 권위를 쉽게 놓지 못한다. 어쩌면 지금은 많은 이들에게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런 과거의 명성에 대한 미련이 더 강했을는지도 모른다. 여전히 매니저에게 담배 달라, 불 달라 시중들게 하고 평상복으로 끝까지 가죽자켓을 고집하는 모습도 다소 우습지만 그런 미련의 한 단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잊혀진 듯 했지만 여전히 나름의 생명력으로 살아숨쉬고 있었던 영월의 모습처럼, 최곤 또한 어떻게 보면 단지 잊혀졌을 뿐이지 사라진 존재는 아니지 않았을까. 많은 사람들이 한물 간 스타로 취급하는 지금에도 여전히 한쪽에는 한국 락의 산증인이라며 한없이 추종하고 열광하는 이들(밴드 "이스트리버"의 경우)도 있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우리가 한때 애정을 가지며 열광했던 추억 속의 많은 존재들은 지금은 비록 잊혀져 없어진 듯 보여도 지금 이 순간도 여전히 우리 곁에서 보이지 않게 숨을 쉬고 있고, 마음이 내킨다면 언제든 고개를 돌려 다시 그 추억을 꺼내볼 수 있다는 걸 이 영화는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잊혀진 듯 늘 곁에 있었던 존재로서의 모습은 영화 속에서 최곤과 그의 매니저 민수의 관계로도 형상화된다. 거대 연예기획사가 판을 치는 요즘에 이르러서도 20년지기 우정을 끝까지 놓지 않으며 둘이서만 의지해 살아온 최곤과 민수는 그저 두 개의 몸을 지닌 한 사람처럼 호흡과 쿵짝이 척척 맞는다. 어느 순간 자존심 때문에 싸우다가도 어느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본연의 관계로 돌아가는 등 이들의 관계는 어떤 감정의 균열도 끄떡없다는 듯 찰떡같이 붙어있다. 다만 이렇게 이들의 관계가 너무 혼연일체로 붙어있어서인지, 서로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깨달을 기회는 적지 않았을 뿐이지.
옆에서 민수는 온갖 수모와 "얼굴에 똥칠 수십 번" 해가면서 뒷바라지를 해줘도 최곤은 늘 자기 잘난 맛에 살았다. 늘 자기가 잘나서 일이 잘 되고, 일이 못 되면 다 자기 체면 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당연하게도) 누구 하나가 잘나서 그런 관계가 오랫동안 이어져 온 건 결코 아니었다. 별이라는 게 혼자 빛나는 게 아니라 다른 별로부터 오는 빛을 반사해서 자신을 빛나게 하듯, 최곤의 곁에도 늘 그를 별로 만들어주는 민수가 곁에 있었기 때문에 최곤은 지금 모습이라도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최곤은 무감각하게 잊고 있었겠지만, 늘 그의 곁에는 암말않고 친구와 시종이 되어주었던 민수가 여전히 자기 일을 충실히 해가며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영화는 한물 간 시골과 한물 간 톱가수의 초상, 그리고 이들이 묻어뒀던 생명력이 다시금 펼쳐지는 순간을 그리면서, 맘만 먹으면 얼마든 지금 우리의 모습에게로 돌아올 수 있는 애틋한 추억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보여준다. 나 역시도 한창 정신없이 빠져들었던 가수가 있었고, 돈독했던 친구가 있었다. 지금은 막상 생각하면 이 모든 것들이 그저 과거의 추억이고 이미 지나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 지나갔다고 생각한 과거의 추억에도 여전히 생명력은 존재한다고 이 영화는 얘기한다. 한창 좋아하던 가수의 앨범들도 실은 듣고 싶을 때 얼마든지 꺼낼 수 있게 방 한구석에 쌓여 있고, 어렸을 때 갖고 놀던 장난감도 어딘가 처박혀만 있을 뿐이지 건전지만 넣으면 얼마든지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비디오가 라디오의 스타를 죽였다지만, 라디오는 사실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았다. 다만 우리가 딴데 정신이 팔려 라디오에 집중하지 못했을 뿐이지, 라디오는 늘 거기 있었다. 지금도 라디오는 언제든지 켤 수 있고, 들을 수 있다. 추억도 그런 것이다. 단지 과거에 머무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언제든 다시 꺼내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음을 영화는 알고 있었다. 영화 <라디오 스타>는 잊혀진 듯 보여도 여전히 존재하며 함께 길을 가고 있었던 추억에게 바치는 구수하고 훈훈한 고백이다.
한 마디 더 : 중국집 직원 머리를 사정없이 때리는 주방장을 주목하시라. 감독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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