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난 영화광이라는 유하가 그의 신작의 가제인 <비루한 것들의 카니발>을 <비열한 거리>로 바꾸면서 마틴 스코시즈의 대표작인 <비열한 거리Mean Streets>를 떠올리지 않았을 리 없다. 그의 시집 제목이기도 한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또한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에 수록된 <비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의 또 다른 시집 <무림일기>에는 <전함 포템킨>, <벤허>와 같이 영화에서 제목을 따온 시들이 무려 열댓 편이나 실려 있다. 말하자면 유하는 제목을 끌어들이기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재밌게도 거기까지다. 혹자는 <비열한 거리>에 대해 '오마주로 점철되어 자기 색이 없다'는 식의 평을 내리곤 한다. 그러나 과감히 말하는데, 유하의 작품, 적어도 <비열한 거리>에는 스코시즈에 대한 오마주가 없다. 오마주는 제목까지, 그 이상으로 확장되지 않는다. <비열한 거리>는 차라리 얼마간의 상투성은 끝까지 갖고 갈 지언정 직접적인 모방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가까이 눈을 돌려볼 때 <비열한 거리>는 <친구>와의 비교를 피할 수 없다. 살인의 이유를 "쪽팔려서"라고 답하는 준석(유오성)과, 건달을 "폼나게" 찍어달라는 병두는 너무나도 확실하게 겹쳐질 수 밖에 없다. 심지어 유하는 중반 이후에 삽입된 이 장면을 (<친구>와 같은 위치인) 마지막 신으로 재편집하는 수를 놓는다. 이는 명백한 대구를 이룬다. 그러나 <비열한 거리>는 오히려 <친구>와 그를 둘러싼 현실의 후일담을 뭉뚱그려 다룬, 조금 더 사회적인 의미의 텍스트로서 읽힐 수는 있다. 그리고 나면 김지운의 <달콤한 인생>이 있다. 그러나 두 영화는 조직의 2인자라는 주인공의 현재 위치와 결국 파국을 맞이한다는 결말이 유사할 뿐 디테일한 면에서 상당히 다르다. <달콤한 인생>이 '순간'에 대한 이야기라면 <비열한 거리>는 한 인간의 '부침'에 관한 이야기다. 무엇보다 <달콤한 인생>이 한껏 멋을 낸 블랙 수트와 향긋한 에스프레소의 분위기라면 <비열한 거리>는 피에 절은 기지바지와 쓰디쓴 블랙커피의 느낌. 결국에 지향점이 다른 이야기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오히려 유하의 전작 <말죽거리 잔혹사>이다. 얼핏 두 편의 조폭영화보다 더 멀면 멀었지 가까운 것은 없을 듯 보인다. 그러나 병두를 자세히 관찰했을 때, 그 안에는 현수(권상우)의 그림자가 있다. 유하 자신에 따르면 <비열한 거리>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이어지며, 이것은 결국 인간의 조폭성과 그것의 소비에 대한 시리즈물이다. 현수는 선도부장 종훈(이종혁)과의 싸움에서 이겼지만 학교를 때려치워야만 했다. 왜냐하면 종훈은 선도부라는 조직을 거느리고 있었고 그 뒤에는 교사라는 권력층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폭성을 물씬 드러내는 이 관계는 <비열한 거리>에서 스폰서와 조직에 대한 관계로 전치된다. 병두는 현수와 다르게 인간에 대한 폭력성과 조폭성의 실체에 대한 그림자를 어렴풋이나마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병두는 보스 상철을 제거하고 황 회장을 스폰서로 얻는다. 그러나 병두는 현주와의 관계에서 여전히 남아있는 순진함을 비춘다. 특별히 서사에 영향을 끼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현주라는 인물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현주는 병두와의 관계를 통해 은주(한가인)와 현수의 관계를 관객으로 하여금 도출하게 하는 일종의 장치이기 때문이다. 언뜻 이것은 병두의 마지막에 대한 뚜렷한 복선으로 읽힐 수도 있다. 현수는 학생이었고 학생의 세계인 학교에서 추방당했다. 그러나 병두는 더 이상 학생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세계에서 제거, 작업당한 것이다. 이보다 뚜렷한 대구가 어디 있는가. 그래서 <말죽거리 잔혹사>와 <비열한 거리>는 느슨하지만 확실하게 이어진 영화다.
그런데 여기서 등장하는 민호의 존재가 영화의 방향성을 재조명하게 한다. 왜냐하면 단순히 병두의 '양아치 잔혹사'가 <비열한 거리>의 전부라면 이것은 이미 꽤나 오래 전에 만들어진 <게임의 법칙>, 특히 <초록물고기>에 비해 특별한 미학을 찾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민호가 개입하게 되면서 <비열한 거리>는 그만의 독창성을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단순히 민호의 등장이 아니다. 우리는 병두와 병두의 가족, 병두의 로타리파 동생들, 하여간 병두를 둘러싼 모든 관계에 대하여 잘 알게 된다. 그러나 민호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게 된다. 기껏해야 학창 시절에 민호는 중국집 아들이었고 삼년째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것 정도일 뿐이다. 심지어 민호가 내러티브에 등장한 이후에도 민호 쪽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결과로 보여지거나 암시에 가까운 컷으로 이뤄진다. 병두가 처한 상황과 계획이 시시콜콜 감독을 통해 관객에게 알려지는 것과는 판이하다. 영화와 같은 예술이 경험에서 나온다고 전제할 때, 영화감독이 가장 경험하기 쉬운 것은 영화를 만드는 경험이다. 즉 영화감독이란 역할이 영화에 등장한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는 감독 자신의 경험에서 파생된다고 담보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열한 거리>는 특이하다. 왜냐하면 민호는 분명 관찰자가 아니다. 민호는 병두를 직접적으로 곤경에 빠뜨리게 하는 중요한 역할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민호를 통해 전개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병두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민호를 바라보고 있다. 민호의 역할에 이와 같이 방점이 찍혀있지 않다는 것은, 애초에 유하가 민호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결국 '낯설게 하기'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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