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하나의 소설 작품이 전세계를 뜨겁게 달궜다. 단지 베스트 셀러로써의 각광이 아닌 센세이션적인 시대적 코드로까지 부양된 이작품은 단순히 문학적인 측면에서의 평가만이 아닌 거대한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다.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는 세계적인 파장을 만들며 지금까지 논란의 종착역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의 차이는 상당하다. 안다는 것은 사실자체의 이해에 접근도에 대한 정의이며 믿는다는 것은 진실성 여부에 관계없는 신봉성에 대한 정의이다. 이 작품이 지닌 논란의 근원은 입증되지 못한 사실을 바탕으로 믿음이라는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다는 것에 있다.
사실 종교에 대해서 논한다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다. 카오스 이론을 바탕으로 한 빅뱅설도 창세기에 대한 믿음을 뒤집지 못했고 다윈의 진화론 역시 아담의 탄생에 대한 명확한 반박이 되지 못한다. 그만큼 정신적으로 깊게 뿌리내린 믿음을 원천적으로 거세하지 못하면 어떤 사실을 쏟아부어도 그 믿음을 뒤집기란 힘든 것이다. 이성적인 잣대로 신앙을 논한다는 것은 기준자체가 모호한 일이 되어버리기 쉽상이다.
사실 크리스트교는 서양 중심에 가까운 종교적 믿음이다. 19세기 말무렵 서양이 세계로 눈을 돌리며 비서양권에 진출하는 첫 발걸음으로 이용한것은 선교사들의 포교활동이었다. 물론 봉건사회의 왕정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동양권의 사회에서 박해를 당하기도 했지만 크리스트교는 박애적 소망에 의해 차근차근 뿌리를 내렸고 세계적으로 가장 강력한 교파로 군림하게 되는 위치에 이르렀다. 물론 종교적 색깔론은 의미를 지니니 못하나 하나의 수단으로써 악용되었음은 부연하기 힘들다. 서양이 비서양권을 식민지로써 길들이기 위해서 크리스트교를 정책적으로 이용했다는 사실만큼은 간과해서는 안되는 사실이니까. 또한 이는 분명 종교가 권력적 목적성의 이용가치로써의 효율성이 입증되었음 역시 간과할 수 없다. 권력의 수단으로써의 종교적 활용이 유용하다는 것이다. 서양의 동양 폄하 수단으로 자신들이 믿는 신을 적극 활용했음은 크리스트교가 지니는 신성성의 가치와는 조금 멀어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예수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지만 그가 신이든 인간이든 중요한 것은 하나의 상징적 존재로 소통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이거나 크리스트교의 정신적 수장이거나 어느 쪽에 속하든 그는 분명 시대를 풍미했고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의 전설이 된 존재라는 것이다.
이 영화는 이미 원작소설에서부터 시작된 논란을 2라운드로 이어가며 그 확대된 파장을 등에 업고 공개되었다. 칸영화제의 개막작이라는 사실을 본다면 이 영화의 논란성은 분명 영화에 대한 탐구적 호기심과도 무관하지 않다. 원작 그 자체에 대한 관심도가 워낙 대단했음에 활자의 영상적 변환이 주는 흥미유발지수가 상당할 수 밖에 없음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또한 하나의 영화가 사회적으로 이슈화되는 파장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영화가 관심을 받는다는 것은 당연한 국면이 된다.
사실 원작을 보고 영화를 접하는 것과 보지 않고 영화를 접하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일단 영화의 내러티브를 논외로 했을 때 이런 원인은 이 소설이 사실여부에 관계없이 상당히 지적인 논거를 들이밀며 설득력있는 논점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프리메이슨, 오푸스데이, 템플기사단, 시온수도회 등의 쉽게 접하지 못하는 사실들에 대한 이해도를 원한다면 한번쯤 책을 읽어보고 영화를 접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 보여지는 난해한 기호학을 좀 더 대중적으로 난이도를 조정시키며 할리웃 스릴러 영화에서나 느껴질 법한 긴장감과 반전을 활자로 풀어헤쳐 각인한 기발하면서도 지적인 소설이다.
일단 영화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만을 해보자면 이 영화는 원작소설의 영상화 그 자체에 심혈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사실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화는 두가지 기로에 선다. 원작을 과감히 버리느냐 혹은 살리느냐의 기로. 이 영화는 원작의 오리지널리티를 그대로 수용했으며 어쩌면 이는 당연한 방식으로써의 수긍이 느껴진다. 생소하지만 설득력이 느껴지는 방대한 이야기로부터 느껴지는 원작으로부터 발산되는 흥미성 그 자체를 살려주는 것만이 이 영화의 목적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만큼 원작이 지닌 퀄리티를 영화가 그대로 계승하느냐에 성패가 달려있다.
허나 영화는 무언가 아쉽다. 원작에서 느껴지는 흥미진진함이 영화는 부족하다. 물론 2권-국내본 기준- 분량의 원작을 147분이라는 런닝타임안에 그대로 재현하기란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이야기를 과감히 버리거나 이야기 자체에 속도감을 부가하는 방식으로써 원작을 삭제하거나 압축하는 방식을 택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방법의 활용은 수긍되나 유저의 활용능력 부족은 그 정석적인 방법론까지 위기감을 느끼게 한다.
이 영화는 쉽게 상황을 밀어나간다. 원작을 본 이들은 영화가 표현하지 못한 부분들에 대한 아쉬움을 지니거나 원작을 보지 못한 이들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해 난해함을 느낀다. 이는 중간중간 불친절하게 거세된 세부사항들이 주는 불친절함에서 기인한다.
'다빈치 코드'라는 소설이 불러일으킨 반향의 근원은 믿기 힘든 사실들을 설득력있게 열거해놓았다는 것에 있다. 진실이든 허구든 이소설이 풀어내는 입담은 상당히 흥미롭다. 특히나 쉽게 건드릴 수 없는 부분을 후벼판다는 점에서 그렇다. 마치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것만 같은 신성한 성지의 겉포장을 벗겨내버린 것만 같은 경악과 경외가 공존한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영화는 원작의 상황을 그대로 따라간다. 활자로만 유통되는 소설로부터 파생되는 상상력속의 신기루같은 공간이 현실적인 3차원공간으로 재생되는 것을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마치 데자뷰를 보는 듯한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영화가 간과한 것은 인물들의 밀도있는 심리적 묘사다. 사실 '다빈치 코드'라는 작품의 재미는 단순히 놀라운 사실에 대한 화제성 여부이기도 하지만 지적인 소재를 활용해서 펼쳐나가는 스토리의 전개가 밀도있는 긴장감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긴장감의 활용을 영화가 간과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원작과의 비교선상에서의 비교우위적 판단일 수도 있다. 실제로 영화가 밋밋한 것은 아니고 영화의 감정이 응집력있게 펼쳐지는 순간은 존재한다. 하지만 이 작품이 원작소설의 영화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본다면 원작의 긴장감을 그대로 전개하지 못했음을 눈감고 지나갈 수 없는 노릇이다. 스타파워로 무장한 캐스팅, 화제의 중심에 설 수 있는 소재 자체가 지닌 무시할 수 없는 매력, 또한 그런 화제가 부르는 사회적 파장에 따라 잉여될 수 밖에 없는 세간의 관심. 이 모든것이 이 영화가 지닐 수 밖에 없는 어드밴티지다. 이 영화는 자신의 본질적 퀄리티만 유지한다면 그런 어드밴티지를 상당히 발전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영화는 아쉬움을 남긴다. 원작의 내용에 충실했으나 원작의 분위기까지 고스란히 인게받지 못한 영화는 절반의 성공으로만 여겨진다. 감정선의 결핍은 분명 영화의 가치 자체를 위협할 수 있는 위험요인으로 여겨진다.
물론 이 영화의 흥행성이 제작자와 투자자들을 실망시킬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실제로 필자가 개봉일 다음날 접한 소식에 이 영화는 단 하루만에 전국적으로 24만명의 관객을 극장앞으로 모이게 만들었다고 한다.- 언론시사회조차도 하지 않은 신비주의 전략과 영화화되기 전부터 거센 관심도를 집중시킨 저력, 상업영화를 거부한다는 칸영화제의 개막작 초청 등은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들이는데 지대한 영향력을 끼칠 것만 같다.
원작을 읽은 이라면 한번쯤은 보고 싶어질 여지는 분명하다. 또한 원작을 읽지 않은 이라도 이 영화의 화제성이 그들을 극장으로 인도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원작을 먼저 본 관객들에게 유리한 영화임은 확실하다. 압축된 영화는 원작이 지닌 방대한 지식적 정보를 충분히 설명하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부족해보인다. 빠르게 전개되는 이야기에 집중하며 영화의 난해한 정보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배우들의 연기도 아쉽다. 특히 오랜만에 기대를 걸었던 톰행크스의 연기는 단지 로버트 랭던을 좇아가기에만 급급해보인다. 소설의 이미지를 답습하는 그의 연기는 그만의 로버트 랭던을 기대했던 관객에게 아쉬움을 남길 것만 같다. 그밖에도 장르노, 오드리 토투, 이안 맥켈렌, 폴 베타니가 출연하며 영화의 스타파워를 절감하게 해준다. 특히 사일러스 역을 연기하는 폴 베타니는 인상적인데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악역 이미지중 가장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무엇보다도 아쉬운 것은 '아폴로 13호','뷰티풀 마인드','신데렐라 맨' 등을 만들어낸 론하워드의 작품이라는 점도 전작과의 비교선상에서 봤을때 아쉬워지는 것이 사실이다.
신성 모독일 수도 있다. 혹은 우리가 몰랐던 진실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되었든 이 영화는 한번쯤은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때론 보이는 거짓보다도 은폐된 진실에 대한 갈망히 큰 법이니까. 이 영화의 원작이 지니는 음모론적인 면모는 무언가 숨겨진 내면적 폭로에 대한 갈증을 해갈해줄만한 쾌감을 지니고 있고 그런 쾌감을 영화는 계승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여기서 말하는 폭로라는 것은 종교적인 거짓에 대한 폭로라기 보다는 그 행위자체를 언급하는 것이다.-말 그대로 재미 그자체만을 원한다면 말이다. 물론 지나친 기대감은 관람에 해롭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소설을 읽지 않고 영화를 본 이들중 원작소설이 읽고 싶어진 이가 있다면 사실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를 읽기 전에 전작인 '천사와 악마'를 읽는 것이 순서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다. 물론 두 작품이 개별적인 사연을 지닌만큼 굳히 연개될 필요는 없지만 '두 작품에서 이야기를 이끄는 '로버트 랭던'이란 인물에 더욱 친숙하게 접근하고 싶은 이라면 '다빈치 코드'의 전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는 '천사와 악마'를 권한다. 어쩌면 전작을 먼저 읽어보는 것이 후작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될지도 모른다.
-written by kharis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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