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11/12 And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suffereth violence, and the violent take it by force. (침례자 요한 때부터 천국은 무력으로 침공을 당하느니, 무력을 쓰는 자는 힘으로 천국을 차지할 것이다.)
올림픽이 처음으로 개최된 것은 1896년 그리스 아테네였다. 물론 1500여년전의 고대올림픽이 기원이지만 우리 시대와 연결되는 올림픽 제전의 부활은 1896년이었다. 그리고 그 기원의 원산지인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출발한 올림픽은 1894년 프랑스의 피에르 쿠베르탱의 각고의 노력끝에 부활하여 제1차 세계대전이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불가피한 공백은 있었으나 지금까지 세계인의 화합과 단결을 도모하는 지구촌의 축제로 자리잡았다.
올림픽은 말그대로 인류의 평화를 기원하는 행사이다. 스포츠라는 하나의 공통된 관심사를 통해 도전하고 경쟁하는 인간의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단결을 통해서 하나의 단일적 화합을 고취시키는 것에 그 목적과 명분이 있다.
그러나 올림픽은 생각보다 이면에 숨겨진 좋지 않은 추억이 산재되어있다. 국가간의 이념문제가 불거진 냉전시대에는 개최지가 어디냐에 따라 이념간의 교류가 불가능한 상대진영 국가에 집단적으로 보이콧하는 불미스러운 모양새도 있었고 스포츠 이면에 산재된 선의의 경쟁을 무색하게 하는 비밀스러운 황금만능주의적 로비와 승자우선 중심의 스포츠 논리에 휘말리는 씁쓸함도 존재한다.
그러나 올림픽이라는 이 타이틀 안에서 가장 불미스러웠던 최악의 화제는 아무래도 1972년 제20회 뮌헨 올림픽을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랍계의 테러조직인 '검은 9월단'이 이스라엘 선수 11명을 감금한 채 체포된 동료 테러범들의 석방을 요구했으나 이스라엘 정부가 강경하게 대응했다가 결국 테러범과 납치된 선수 전원이 사망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영화 제목과 함께 지금까지의 글을 읽었다면 이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대략 짐작은 갈 것이다. 이 영화는 그 때의 참혹했던 세계적 일화를 끌어내어 관객에게 무언가 메세지를 남기려는 것만 같지 않은가? 과연 그 메세지는 무엇일까?
사실 이 영화를 보기 전 알아야 할 것은 유대민족의 박해 역사이다. 유대민족은 여러가지로 박해받던 민족의 대명사이다. 그들의 독자적인 종교관습에서 비롯된 생활관습과 신념은 타인종 혹은 타민족과의 융화에 걸림돌이었다. 그래서 고대 로마시대의 박해로부터 반발하여 결국 로마와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데 결국 2차에 걸친 전쟁은 그들을 예루살렘에서 좇겨나게 만들었고 그들은 디아스포라(이산)를 통해 세계 각지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세계각지에서 떠돌아다니며 박대를 받았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트교에서도 이단시되어 그리스트교 중심의 유럽사회에서도 박대를 받았으며 토지 소유를 금지당해 그리스트교가 금기시하는 금융업, 고리대금업으로 진출하여 부를 축적해 더욱 더 거센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는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샤일록'이라는 인물에 의해서 상징적으로 보여진다. 또한 예루살렘의 성지 탈환이라는 명분하에 행해진 십자군 원정때 각자기 미신과 편견의 증폭으로 학살당하기도 했고 나치와 파시즘 아래 격리되다가 홀로코스트(대학살)라는 최악의 피바람을 맞기도 했다. 이는 16살의 꽃다운 나이에 삶을 마감한 안네프랑크의 '안네의 일기'를 통해 그들의 불행한 한 시절을 엿볼 수 있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고대부터 근대사까지 그들의 불행은 유럽계 크리스트 계통의 의도에서 비롯된 면이 많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아랍과 유대의 대립은 그렇다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물론 성서의 창세기를 보면 고대 이집트에 유대인들이 노예로 끌려가 피라미드 사업 등의 힘든 노역에 강제적으로 부려지다 모세에 의해 탈출하여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으로 귀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이 시절은 유대인 자체의 민족성이 두드러지지 않은 시기이기에 논외로 하고 최근의 선례에서 찾아본다면 아무래도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세우는 과정에 있어서의 팔레스타인과의 충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기원전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왕국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한 후로 영토적 기원을 잃은 뒤 유랑민족으로 전락하게 된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구약성서에서 꿀과 젖이 흐르는 땅을 주여주셨다고 주장하며 그러한 그들의 독실한 종교적 신념이 근거가 되는 민족적 공동체 건설의 비원은 시오니즘(Zionism)으로 계승되고 그들이 축적한 부와 재력을 이용하여 정치적인 로비스트로 발전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명망있는 유대계 실력자들의 로비로 연합국을 지원하는 댓가로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건립하는데 지지를 표명하는 벨푸어 선언(1917년)을 받는 것에 이른다. 그러나 문제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반대에 있던 오스만 투르크를 교란하기 위해 유럽각국의 식민지였던 아랍국가들의 도움을 얻으려고 전후 아랍세계의 각국에 독립국가 건설을 돕겠다는 맥마흔 선언(1915년)이 있었던 것이 화근이 된다. 이런 이중적인 계약이 결국 오늘날까지 화근이 되며 중동지역을 뜨겁게 달구는 셈이 된것이다.
결국 전후 모순된 이중계약에 의해 팔레스타인 지역의 양분적 배급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에 어중간한 약속 이행을 하려했지만 결국 만족치 못한 양쪽의 대립을 낳고 특히나 두 민족의 성지인 예루살렘이 이스라엘로 넘어가는 것에 반발한 아랍계의 반발로 4차에 걸친 중동전쟁의 촉발이 원인이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각종 테러와 갈등의 기폭제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민족주의 양상을 보이는 아랍권의 분열을 위한 책동에 힘쓰던 서구 열강들의 책동이 아랍과 유대의 갈등에서 아랍과 서구의 갈등으로 이어지며 지난 02년 911테러와 이라크전쟁 등의 과격한 양상으로까지 발전하게 된것이다.
어쨌든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보기도 전에 많은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 영화가 지니는 이야기 자체가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암묵적으로 머금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함으로써 영화에 대한 접근도를 높임에 도움이 된다는 개인적인 판단하에서였다.
이 영화는 뮌헨 올림픽 당시 끔찍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서두를 연다. 그리고 그 끔찍했던 이야기 이후로부터 이야기는 천천히 격양되기 시작한다. 초반에 그 역사적 사실이 TV화면을 통해서 보여지는 것은 중립성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보여진다. 어떠한 개인적인 어조를 떠나서 보편적인 매체수단인 TV를 통해 객관적인 상황을 보여주는 것은 시작부터 이 영화가 어떠한 자세를 취할 것인지를 살며시 드러내는 단면이라고 여겨진다.
사실 이 영화를 단순하게 예상했다면 첩보 스릴러 정도의 오락물따위로 여겼을 우려가 있다. 물론 첩보와 스릴러적인 측면은 있지만 그러한 일련의 장르가 보여주는 짜릿함과 통쾌함은 이 영화에서만큼은 철저히 거세되고 폐기되었다. 어떤 감정의 개입도 이 영화는 허락하지 않는다. 다만 영화가 관객에게 주어지는 비통함의 정서가 이 영화의 흐름을 따라 짙어진다.
특히 인물들의 심경적 변화 흐름이 이 영화의 정서를 대변한다. 민족적인 사명을 등에 업고 복수를 행하는 그들은 자신감과 자긍심으로 뭉쳤지만 그들은 그러한 복수를 되풀이하는 여정안에서 무언가 개인적으로 잘못되어감을 느끼고 점점 이성과 감성의 혼선적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그럼으로써 영화는 민족주의나 국가주의적인 거대한 대의적 이념이 지니는 허구적인 명분을 은연중에 비웃는다. 사실 국가라는 것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보이지 않는 울타리로써의 기능을 한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써 대한민국 사회에 속하며 이에 보호받는다는 하나의 소속감이 주는 안도감이 국가라는 하나의 거대한 보이지 않는 힘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가끔 사념적인 혼선에 빠지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민족주의적인 편향적 의식이 인본주의적인 보편성을 무시하는 경우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인간이라는 고루한 가치가 집단적 히스테리에 의해서 무시당하고 다수의 논리에 의해 짓밟이는 힘의 균형적 정의가 때로는 평범한 진리를 압도한다.
이 영화는 힘의 논리에 대해서 역설적으로 비난한다. 민족과 국가라는 하나의 허울적인 집단적 일체감은 과연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그리고 그러한 집단적 일체감은 인간보편적인 인류전체의 방향성에 역행하는 것은 허용되어도 되는가. 이러한 평범하지 않은 질문이 이 영화에 숨어있다. 결국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라는 하나의 다수적 집단 형태의 가치관은 인류전체의 보편성을 위협하는 집단적인 이기주의가 아닐까.
사실 우리는 민족과 국가라는 이념적 공동체아래서 인류전체적인 보편적 가치관을 외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국가와 민족의 이익앞에서 타민족과 타국가의 이익을 도외시하는 행태는 합리주의로 변질된 이기적인 행태아닌가.
물론 영화에서 직접적인 언급을 통한 전달은 없다. 그러나 직접적인 언어소통보다도 더욱 절실한 영상적 파급력이 이 영화에 존재한다.
한 인간이 국가와 민족이라는 사명감 아래 개인적 신념과 권리를 무참하게 짓눌려야하는 상황을 세세하면서도 점진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관객의 마음에 참담한 심경적 토로를 재촉한다.
또한 이 영화는 양극단의 대립적 이야기를 보여주면서도 어느 한쪽에 무게를 실어주지 않는다. 물론 이야기의 중심적인 시점의 편향은 있지만 그것은 단지 시선의 문제일 뿐 이야기의 맥락적 해석으로 뻗어나가지 않는 중립성은 고수한다. 그럼으로써 이 영화가 제기하는 문제의 대답을 관객에게 떠넘긴다. 이는 관객으로써는 상당한 부담감으로 다가온다. 이야기 자체가 짊어지고 있는 중압감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영화의 무게가 그대로 관객에게 떠안겨지는 형세다. 하지만 이는 영화의 미흡한 이야기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스필버그 감독의 의도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사실 전체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힘있는 자들의 의도와 맞닿아 있다. 가끔 국가적 정책이 국민적 열망에서 기인한다는 근거로 시행되지만 그것은 권력의 힘이 부여하는 변명에 가까운 경우가 허다하다. 민족과 국가라는 이념이 정해준 방향성을 역행하는 자는 반골의 비판을 감수해야 한다. 이는 우리 대한민국의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극단적인 보수적 국가주의가 진보성향과 맞붙었을 때 형성되는 것은 국가적인 이념의 무분별한 차용이다. 이는 국가라는 하나의 거대한 사념을 빌려 대의적인 논거적 우위 점령을 꾀하는 비열함과도 맞닿는다. 또한 가장 쉬운 예를 들자면 일본에 대한 이야기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단지 일본에 대한 우호적인 성향이 가끔씩은 대한민국사회에 대한 배신감으로 매도될 때가 있다. 물론 일본의 그릇된 가치관까지 옹호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그러한 사념적인 문제를 떠나 그저 현실적이고 사소한 호감도까지 무시하는 마녀사냥식의 행태도 국가주의적인 보수성에 사로잡힌 무분별한 이념의 고취라고 여길 수 있지 않을까.
사실 테러리즘과 복수심으로 점철되는 아랍과 이스라엘의 대립, 혹은 그에서 발전된 아랍과 서구세계와의 대립은 애꿎은 피해자를 양산하고 있다. 실로 그러한 형세를 만들어가는 것은 일부 권력자와 재력가들의 뒷거래에 의해 만들어진 사적인 결정이 세계적인 혼란을 야기하는 것 아닌가. 그러한 혼란의 댓가는 이유없이 학살당하는 평범한 소시민들이다. 아랍과 이스라엘의 정치적 대립으로 끊임없이 자행되는 테러와 보복 아래서 신음하는 것은 결정권없는 일반인들이라는 것은 테러리즘과 보복심리가 끌어안은 비극적 색채의 근거가 된다.
애브널(에릭 바나 역)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일한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사명감이 자신의 개인적 죄의식에 면죄부를 부여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국가를 대신한 복수는 결코 그의 마음에 면죄부를 부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거듭되는 복수는 마음의 여유를 빼앗아가고 자신이 지키려던 국가의 명예가 자신의 목을 조여가는 현실과 조우하게 된다. 자신이 지키려던 보금자리로부터 도망치게 되는 현실은 상당히 아이러니하다. 무엇을 위한 복수였고 그 복수는 과연 무엇을 낳았나. 과연 복수는 정당했고 그러한 정당성은 인정받을 수 있는 보편적 근거를 얻을 수 있을까.
영화는 답을 주지 않는다. 모든 판단은 관객이 내릴 뿐. 물론 판단을 내리는 것도 영화를 받아들일 여지가 있는 관객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애브널의 변화는 분명 관객에게 해답의 실마리가 되어주진 않을까. 적어도 그의 수척해진 얼굴은 그의 복수가 그에게 명예를 안겨주지 못했다는, 아니 오히려 명예보다는 깊은 상심은 안겨주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이 영화는 기존의 스필버그 영화와는 화법이 판이하게 다르다. 그의 영화에 언제나 부록처럼 존재하던 아름다운 이야기로의 회귀는 과감하게 삭제되었고 그의 부드럽고 명확한 논조도 이 영화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영화는 시종일관 혼란스럽고 영화의 색채만큼이나 무겁고 부담스럽다. 전체적으로 감정적 여유는 찾아보기 힘들만큼 영화는 잔뜩 인상을 찌푸린채 관객을 짓누른다. 2시간 40여분이라는 긴 런닝타임동안 이러한 압박에 신음하는 관객에 대한 우려도 보인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받아들인 이에게는 2시간 40여분이라는 시간은 논란의 여지에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다.
이 영화는 감정적 동감이나 이야기에 대한 호응을 의도하지 않았다. 단지 메세지의 전달 그 자체에 충실하고자 한 의도가 역력해 보인다. 영화의 어조자체가 차가우면서도 냉정한 것은 감정의 배제를 통한 중립성을 확보하여 관객에게 선택의 여지를 실어주고자 함이고 영화의 절정에서 극적인 상태로의 전이를 막고 현실적인 이야기로의 파급력을 원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적인 이야기에 대한 판단의 기회를 관객에게 부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 영화는 영화자체에서 언급하듯 현실을 바탕으로 각색된 영화다.(Inspired by the true story)실제 역사적 비극인 뮌헨올림픽 참사와 함께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진 조지 조너스의 소설 '복수(Vengeance)'가 원작이 된 영화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영화답지 않으며 현실과 무관하지도 않다. 그래서 영화의 무덤덤한 결말은 그만큼 허무한 허탈감으로 다가온다.
스필버그 본인이 미국계 유태인이라는 점에서도 이 영화는 흥미롭다. 자신과 무관하지 않은 이야기를 분명 '쉰들러 리스트'에서도 했지만 두 영화는 상당한 어조의 차이를 보인다. '쉰들러 리스트'는 민족적인 비극에 대한 애도에 가까운 영화였다면 이 영화는 오히려 민족적 비극을 빌미삼은 비열한 민족적 행태에서 기인한 수치심의 고발에 가깝다. 그가 자신의 울타리 영역을 벗어나 세계적인 가치관에 근접했다는 것 자체로도 반가운 영화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 영화는 관객모두를 이 논란으로 개입시키기에는 살짝 역부족이다. 영화가 주는 중압감이 생각보다 강해서 버티기에는 버거운 관객도 있을 것이고 일련의 스필버그 영화를 기억하는 관객에게는 생소한 낯설음으로 배신감을 쥐게 되는 관객도 존재할 것이다. 이는 영화가 주는 메세지의 절실함에 공감대를 실어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이자 영화자체가 어필되지 못하는 한계에 대한 아쉬움이다.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연기는 나름대로 만족스럽다. 중후한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는 애브널의 민족과 개인의 신념 사이에서의 갈등과 고뇌를 절실하게 보여주는 에릭바나의 연기는 훌륭했다. 또한 새로운 007시리즈의 제임스 본드로 낙점된 스티브 역의 다니엘 크레이그나 배우과 감독의 재능을 넘나드는 로버트 역의 마티유 카소비츠, 그리고 에프레임 역을 맡은 제프리 러쉬 등 다수의 연기자가 자신의 역할을 멋지게 소화해 냄으로써 영화의 신뢰도를 한껏 격양시켰다.
또한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어두운 빛깔의 영상을 고수하는데 그 와중에도 영화의 생생한 화면의 질감을 포착하기 위해 도입된 줌렌즈 기법인 '스킵 블리치(skip bleach)'가 도입되어 영화를 좀 더 감각적이면서 사실감있는 영상으로 완성시켰다. 또한 1970년대의 유럽을 생동감있게 살리는 복고적인 취향의 완성은 영화의 사실성에 논조적 근거가 되어준다.
이 영화는 가해자도 결국 피해자의 입장에서 벗어날 수 없는 끔찍한 굴레를 잔인하게 묘사한다. 사실적이면서도 담담한 영화의 어조는 오히려 극적이고 과장된 이야기보다도 현실적이다. 이는 결국 테러와 보복은 끝없는 폭력의 악순환을 부른다는 경고를 무심한 듯 하면서도 확실하게 말해주고 있다. 피를 부르는 복수는 결코 통쾌하지도 명료하지도 않다. 복수가 남겨주는 것은 결국 가해자에게 되돌아오는 부메랑같은 찝찝함과 불안함. 애브너가 우스개소리로 들었던 침대를 떠나 옷장을 택해야 하는 밤의 현실이 자신에게 실현됨은 그런 비극적인 굴레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
스필버그의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 이 영화의 한없는 분노와 울분은 폭력으로 상처입은 양진영의 비극적 현실에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것만 같다. 대화와 양보의 아름다운 미덕을 부질없이 종용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폭력의 무가치함을 환기시키는 영화의 논란에 기꺼이 동조한다.
피를 부르는 보복이 부르는 또다른 비극으로의 환기는 예사롭지 않은 비범한 이야기로 다가온다. 물론 영화가 주는 여운이 남기는 피곤한 무게감은 부담스럽지만 한번쯤은 주목해 볼 만한 우리 세계의 이야기가 아닌가. 먼 나라의 현실이라 치부하기에는 우리의 과거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지금도 가까운 일본과 감정적 대립은 종종 지속되고 있지 않은가. 물론 치열한 전투적 대립은 없다하지만 분명 우리에게 낯선 이야기만은 아니다. 불과 50여년 전 만해도 말이다. 그렇기에 한번쯤은 이 이야기에 진지하게 귀기울여보는 자세도 필요할지 모르겠다.
-written by kharis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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