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팔레스타인의 어느 테러리스트로부터 아버지가 총상을 입은 한 여인의 이야기를 그린 논픽션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지리하게 계속되어 온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속에서 무고한 그녀의 아버지가 총을 맞았고, 그녀는 오랜 시간 테러리스트에 대한 복수심을 키워 왔다. 그러나 기자였던 그녀가 테러범의 주변 조사를 하고, 그의 가족들과 소통을 해가면서 점차 인간적인 이해의 폭이 넓어졌고, 결국 그녀는 테러범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복수로 "용서"를 택했다.
이 영화 <뮌헨>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무고한 이들을 단지 그들의 구역 안에 있다는 이유로 공포에 떨게 만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 그 한 가운데에서 일어난 참혹한 테러를 배경으로 한 영화다. 스스로가 유대계이기도 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과연 이 문제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고, 결국 그는 이렇게 실력을 발휘해 영화로 옮겨 놓았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먼저 알려드리건대, 이 영화에서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스필버그식 휴머니즘의 감동을 기대했다간 적잖이 실망할 수도 있다. 자신에게 배경적으로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주제여서 그런지, 스필버그 감독은 이전 작품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양새로 영화를 다듬어 놓았다.
1972년, 인간의 보통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힘든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다. 전세계 화합의 장이라는 올림픽이 열리고 있는 뮌헨에서, 이스라엘 선수 11명 중 2명이 아랍계 테러단체인 "검은 9월단"에게 살해되고, 나머지 9명 역시 그들에게 납치되었다가 전원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검은 9월단"은 이스라엘이 붙잡고 있는 아랍계 정치사범들을 풀어줄 것을 요구하며 선수들을 인질로 잡았으나 이스라엘 정부가 거절 의사를 보인 것이다. 올림픽의 열기에 휩싸여 있어야 할 전세계는 충격의 도가니에 빠지고, 피해 당사자인 이스라엘은 말할 것도 없다. 이스라엘의 여수상은 적극적으로 보복 계획을 펼친다. "검은 9월단"의 핵심인물 11명을 똑같이 암살하는 것이다. 모사드 요원 출신인 아브너(에릭 바나)를 비롯한 정예 멤버들이 선발되고, 이들은 프랑스, 런던, 아테네 등 유럽 각지를 오가며 암살 계획을 하나 둘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그러나 처음 계획과는 달리 목표인물 이외의 피해자가 발생하고, 죽은 것처럼 신분을 위장하던 에브너의 신분마저 노출되는 등 예상외의 부작용들이 속출하기 시작하고, 그나마 굳게 결심하고 실천에 옮겨지던 암살 계획은 점차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이 영화의 인물 구성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처럼 리더를 중심으로 여러 인물들이 비슷비슷한 비중으로 엮여져 있는 식이다. 역시 리더 역을 맡은 배우의 연기가 인상적인데, 아브너 역의 에릭 바나가 그렇다. <헐크>에서부터 쭉 보여온 바이지만, 그는 그의 나이 또래 배우들 중에서 "고뇌 연기"의 일인자가 아닌가 싶다. 스필버그 감독이 <헐크>에서의 그의 모습을 보고 맘에 들어 했다는데, 그만큼 에릭 바나에게서는 나이가 많지 않으면서도 그 거대하고 조심스런 계획을 옮겨가는 리더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진중함, 무게감이 그대로 느껴진다. 그뿐 아니라 리더가 아닌 똑같은 암살단의 한 인간으로서 겪게 되는 내면적 갈등도 훌륭하게 잘 소화해내지 않았나 싶다. 그저 인조인간처럼 리더로서의 책임감에만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게 아니라, 계획이 진행되면서 증폭되는 내면의 불안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채 거기 끌려다니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 또한 잘 표현해 주었다. 아브너의 심경이 극이 후반부로 갈수록 더 뒤죽박죽이 되는 만큼, 그의 연기도 후반부로 갈수록 더 빛을 발한다.
이 역할 외에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역할이 있다면 마티유 카소비츠가 맡은 폭탄제조 전문(?)가 로버트 역이다. 그는 어떻게 보면 정예멤버들 중 가장 섬뜩한 일을 맡았으면서도 가장 심약한 마음씨를 소유한 인물이다. 테러 목표들을 대상으로 한 폭탄들을 설치하면서도 끊임없이 심적 고통에 시달리고, 결국 아브너에게 "유대인으로서 정의가 내 신념이자 영혼인데, 지금은 그 정의를 따른다고 할 수가 없는데 이를 어떡하나"하면서 하소연하기까지 한다. 암살 임무를 띤 이들 멤버들이 그저 비장한 분위기만 가득한 테러 대원들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건 이러한 로버트의 인간적이고 그래서 나약한 면모가 한 몫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얘기했듯, 스필버그 감독은 이 영화 <뮌헨>을 그의 전작들보다 많은 면에서 조금 다르게 손질을 했다. 우선 영상 면에서부터 시작하면, 이 영화의 영상은 스필버그의 전작에서 봐왔던 때깔 좋고 세련된 색감과는 거리가 멀다. 2차 대전 때를 배경으로 한 <라이언 일병 구하기>도 화면의 색감이나 빛깔이 참 고급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 영화는 상대적으로 가까운 35년 전을 배경으로 했지만 최대한 그 당시의 모습을 실감나게(어쩌면 그만큼 촌스럽게) 묘사하려 한 듯하다. 때론 누런 빛을 강조하며 중동의 어딘가 텁텁한 분위기를 살려주기도 하고, 때론 안정적이지 못한 카메라워크로 논픽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마치 이 영화가 너무 "영화처럼" 보이는 건 방지하게끔 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그만큼 이 영화는 영화적으로 보이려는 걸 최대한 자제한 채, 리얼리즘에 기대고 있다. 표현 수위에서부터 이를 알 수 있는데, 이 리뷰를 쓰기 전 몇몇 보신 분들 사이에서 "15세 관람가 치고 표현 수위가 너무 높은 거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는데, 사실 그런 말이 나올 만하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이후로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에서 이렇게 표현 수위를 놓고 말이 많이 나온 영화 또한 드물 것이다. 사람이 총에 맞아 피가 흩뿌려 지는 광경은 기본이요, 자신을 방어하려는 이스라엘 선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테러범의 머리에 칼을 꽂는다. 대형 폭탄의 폭발에 바닥에는 핏덩이가 엉겨붙어 있고, 천장에는 팔만 따로 나가떨어졌는지 달랑달랑 붙어 있다. 심지어는 알몸의 여인에게 총과 비슷한 침을 쏴 죽이기까지 한다. 좋게 말해 사실적이고, 나쁘게 말해 볼 거 못볼 거 다 보여주는 비주얼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적나라한 비주얼에 스필버그 감독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었다면, 아마도 그 목적은 달성한 듯 싶다. 바로 테러의 참혹성에 대한 제대로 된 인지이다. 9.11 테러 사건 등을 지나면서, 테러와 맞닥뜨린 사람들 사이의 광경을 제대로 목격한 적이 없는 우리들에게 테러란 그저 막연하게 무섭고 끔찍한 존재이다. 그러나 이 영화 속에서 자행되는 테러는, 정말 눈 앞에서 "테러라는 게 이렇게 지독하게 참혹한 것이다"라고 몸소 알려준다. 영화 속 테러리스트, 암살단들은 바로 1분 전까지 옆에서 대화한 사람에게 폭탄세례를 입혀야 하고, 수십 발의 총탄으로 사람의 몸을 벌집으로 만들어야 하며, 알몸으로 치부까지 드러낸 여인을 옷으로 가려줘서도 안될 만큼 독한 마음을 먹어야 한다. 정말 보면서, 그 커다란 폭발 신이나 파괴력 있는 총격 신을 보고 "멋있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눈꼽만큼도 들지 않았다. 그저 테러라는 게 "저렇게 지독하고 끈질긴 것"이라는 생각만 새삼 들었을 뿐.
이렇게 영화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사이에서, 어느 한 쪽이 잘했고 잘못했다고 정의를 내리기 보다는 그들이 서로에게 행하는 행동, 테러 그 자체를 비판한다. 아랍계 정치사범들을 풀어주라는 소기의 목적이 있었으나 "검은 9월단"이 행한 행동들은 아무튼 테러였고, "보복", "정의", "평화"라는 명분이 있었지만 이스라엘 비밀 집단이 행한 암살 행위들은 그 역시 아무튼 테러였다. 그 어떤 거창하고 정당하다는 명분이 있더라도, 한번 이어진 폭력의 사슬은 보복으로 끊어지기는커녕 더 단단해진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흔히 영화에서 보는 지극히 개인적인, 1:1의 복수라면 주인공처럼 뭔가 확실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질지도 모르지. 그러나 이 "복수"라는 게 국가 차원으로 넘어가면 문제는 확실히 달라진다. 처음에는 목표대상만 처단한다고 하지만, 오류라는 게 생기지 않을 수 없고, 그 오류에 상대국은 격분하며 더 큰 복수를 준비한다. 그러면서 <뮌헨> 속 인물들이 목표로 했듯 몇명의 인물들을 목표로 시작한 복수는, 상대국과 주고 받으면서 한 마을로, 도시로, 나아가 전국민들로 확대되면서 그 불씨를 더 강력하게 퍼뜨린다. 폭력이라는 건 내성이 붙어 있어서, 한번 받으면 그보다 더 심한 강도로 돌려줘야지 절대 같은 강도로 돌려주면 맘이 안놓이는 것이거늘.
이처럼 영화는 때론 "정의"를 위해, 때론 "복수"를 위해 자행되는 테러라는 이름의 국가적 폭력이 얼마나 사회를 피폐하게 만들고, 두려움 속으로 밀어넣는지를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인간 내면을 얼마나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는가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주인공 아브너는 처음에 같은 이스라엘인으로서 당연히 느끼는 분노와 슬픔에 힘입어 국가가 제안한 비밀 계획에 선뜻 참여한다. 온국민의 울분을 대신해서 해소하고, 그동안 몸담아온 나라에 대한 보답이라는 차원에서 솔깃했을 것이다. 그러나 점차 암살 계획이 하나둘 실행에 옮겨지면서, 피같은 딸을 둔 남자가 폭탄에 참혹하게 죽게 하면서, 바로 옆에서 1분 전까지 재미난 대화를 나누던 남자를 폭탄으로 산산조각내면서, 거기다 예상치 못한 아군 쪽 손실을 당하게 되면서 아브너는 점차 자신의 신념에 의심이 가기 시작한다. 나라는 계속 그에게 "먹여주고 길러준 어머니의 나라"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그 임무에 더욱 큰 당위성을 부여하는데, 죽음과 폭력에 대해서 점차 무뎌지는 자신에게서 아브너는 과연 지금 하는 임무가 그만큼의 당위성이 있는 것인지 의문을 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점차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고, 보복에 대한 또다른 보복이 예감되면서 급기야는 그러한 내면의 신념에서의 갈등조차 추슬르지 못할 정도로 극한의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고.
더 가슴 아픈 건, 이렇게 내면의 두려움과 고통조차 잊어버린 채 폭력의 사슬에 그저 감각이 무뎌져 버린 사람들의 모습이다. 요원들이 끔찍한 짓(영화를 보시면 안다)을 저지른 여인에 대해 보복을 하고 난 뒤, 알몸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여인에게 옷이라도 덮어주려 하지만 한 사람이 말한다. "그대로 드러나게 놔둬". 뿐만 아니라 암살 계획을 개괄적으로 주도하는 에브라임(제프리 러쉬)은 금방 폭풍과도 같은 임무를 지나고 온 아브너에게 그저 잠시 출장 갔다온 사람인양 "푹 쉬고, 다음 임무 때 보세"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다. 아브너나 로버트처럼 눈 앞에서 일어나는 폭력 사태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안타까워한다면 그나마 정상적인데, 테러라는 현대 사회의 지독한 폭력 행위는 사람을 그저 이 정도 상태에 머물게 놔두지 않는다. 급기야는 에브라임처럼 폭력을 익숙하고 필수적인 수단으로 여기게 하는 경지까지 몰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영화는 테러의 사슬에 얽매여서 결국은 그 얽매임의 고통에 무뎌지고, 폭력에 대한 내성만 더 세져 더 자극적이고 강력한 폭력을 갈구하게 되는 인간의 끔찍한 자화상을 다른 한편 넌지시 던져주고 있기도 하다.
물론 이 영화에도 "휴머니즘"의 기조가 흐르기는 한다. 영화 내내 아브너는 아내, 가족을 그리워 하고, 중요한 정보원인 루이의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보며 새삼 부러움을 느끼기도 하는 등 가족애, 인간애가 어느 정도 부각되기는 한다. 그러나스필버그의 예전작들처럼, 휴머니즘이 결국 마지막에 가서 마무리로 매듭지어지지는 않는다. 아마 실제 사건 이후의 현실이 그렇겠지만, 휴머니즘이라는 이상에 기대기에 국가 단위로 움직이는 테러와 보복의 그늘은 한 개인을 너무나 거세게 뒤흔든다. 영화는 절대 "휴머니즘의 승리"라는 식으로 무리하게 매듭짓지 않고, 씁쓸한 현실에 우린 여전히 몸담그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 아브너와 에브라임의 대화만 해도 그렇다. 아브너가 "화해와 평화도 도모할 겸, 저희 집에 오셔서 식사나 하죠"하고 제안하지만, 에브라임은 단칼에 "사양하겠네"하고 거절한다. 그저 살가운 휴머니즘 영화라면 "그래, 좋아"하면서 서로 어깨동무하고 하하 웃겠지.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이 영화는 안다. 그저 등 뒤 쌍둥이 빌딩을 보여주며 테러의 그늘은 더욱 짙고 넓어질 것임을 암시할 뿐, 휴머니즘에 대한 의존을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이렇게 이 영화 <뮌헨>은 스필버그 감독이 자기 임의대로 마음에 드는 방향으로 극을 전개하지 않고, 차가운 현실, 징그럽기까지 한 폭력의 순환고리를 그저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화해와 평화가 쉽게 되지 않을 것같은 지금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렇게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선 덕분에, 영화는 이전 스필버그의 사회성 짙은 작품들보다 오히려 더 파괴력과 무게감이 배가되어 다가온 듯하다. 우리가 복수를 하는 이유는 "내가 당한 만큼 놈도 당했다"는 데에서 오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나 국가 단위로 복수를 감행하는 지금, 현실은 그렇지 않다. 손톱이 길면 또 자르듯, 없앴다 싶으면 새로운 표적이 나타나 밑빠진 독에 물붓듯 끝없는 폭력의 순환을 불러올 뿐. 그저 남는 건 쾌감과 정의, 평화가 아니라 오로지 흥건한 피와, 또 되돌아 올 보복에 대한 두려움과, 이전보다 더 크고 깊어진 울분 뿐이다. 스필버그 감독은 이런 안타깝지만 인정해야 할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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