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관한 리포트 같은 성격의 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쓰다보니 ^^)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에 이르는 서양 판타지의 영화화의 전성기를 맞아서 동양적 판타지 대작(블록버스터)의 등장은 세계적인 추세에 맞닿아 있다고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판타지는 아동용 전래동화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아쉬움이 크다. 이 점에서 만화 신 암행어사는 우리 전통 판타지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놀라운 시도라고 생각된다. 그에 비해서 일본과 중국은 판타지적 소재가 우리에 비해서 매우 풍부하다.
우리나라에서는(사견) 아이러니하게도 동양 삼국의 공통적인 유산인 유교의 영향 때문인 것 같다. 조선의 유교에 의한 정치적, 사상적, 문화적, 사회적, 종교적 통일은 다른 나라들 보다 더 철저한 것이었으며 500여년간 지속된 단일한 정치체제는 유교적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 살아남지 못하게 된 풍토가 됨으로서 우리 문화의 다양성과 전통 전승에 상당한 장애가 되었던 것 같다.
무극이 한국, 중국, 미국의 삼국이 연합해서 만든 작품임을 감안할 , 무극은 중국적 판타지와 기획, 제작에 미국의 영화 제작 기술, 한국의 유명 배우(한류)가 합세함으로서 탄생한 동양적 판타지 영화라 할 수 있다.
* 무극을 보면서 부족하다고 느끼는 점들에는 어쩌면 이런 동양과 서양의 (이질적일 수 있는) 두 가지 다른 문화의 합작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 거기다가 동양인이랄 수 있는 우리들조차 잘 알지 못하는 '무극'이라는 철학적 개념을 근본 바탕으로 한다는 설정에서부터 선과 악의 이원론적 (간단한)대립구조에서 복잡한 갈등 관계를 엮어 내는 (영화로 제작된)대부분의 서양 판타지 영화보다 호소력이 떨어지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영문 제목인 The Promise가 영화의 제목으로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움, 운명을 뒤바꾼 잔인한 약속" 이란 홍보문구는 '무극'이라는 복잡한 개념없이 그냥 만신이란 존재의 등장으로 설명해 버릴 수 있는 것이었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 같은 동화에서 마녀는 복잡한 철학적 원리에 따르지 않고 좋은 의도로 약속을, 나쁜 의도로 저주의 관계를 맺을 뿐이다.
그러나 영화 무극에서는 선악이 불분명한 '만신'의 등장이 '무극'이라는 우주적 원리에 입각해서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사건들을 전개시키고 있기 때문에 괜히 영화의 의미가 어렵고 복잡해 진다.
영화 무극에서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로 보이는 북공작 무환(사정봉)과 그에게 복종하는 귀랑(유엽)은 간단히 '악'으로 규정되지 않는 캐릭터다.
그렇기에 반지의 제왕에 사루만이나 사우론처럼 분명한 입장으로 주인공들과 대립각을 세우지 못한다.
무환이 악의 화신이라면 귀랑은 그의 지배하에서 갈등하는 혼란된 캐릭터로서 어울리겠지만 불행히도 무환은 차갑고 냉혹하지만 절대적으로 '악'해 보이지 않는다. 등장인물 모두가 '무극'이라는 거대한 무엇의 규정 속에 개인의 운명이라는 굴레에 의해 억눌려 있다고나 할까?
불패의 대장군 쿠앙민의 대활약과 노예 쿤룬의 초인적인 힘이라는 좋은 소재가 너무 쉽게 묻혀 버리고 그 이후로는 변변한 액션씬이나 판타지다운 장면은 빈곤하기 이를 데 없었다.
쿠앙민과 쿤룬의 전설적인 활약이 계속되고 거기에 북공작 무환의 음모가 대조되었더라면, 황실을 장악한 무환의 악행과 쿠앙민과 쿤룬을 제거하기 위한 싸움이 지속되면서 귀랑과 쿤룬의 만남, 드러나는 쿤룬의 과거, 청정의 사랑이 흘러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이상은 판타지 영화로서의 무극이 상상력과 재미를 충분히 주지 못하는 아쉬움과 한계에 대한 느낌이라 한다면,
이후로 판타지 영화 무극은 동양적 판타지로서 그 몽환적인 분위기만큼은 아름다운 색채와 독특한 그로테스크함으로 잘 표현해 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계이기도 하지만 영화의 배경으로서 '무극'의 철학적인 깊이를 품으려는 시도 또한 의미있는 것이라 하겠다.
원색을 좋아하는 중국인들의 기호답게 영화 무극에는 흰색, 검은색, 빨강색 등등등 화려하고 독특한 색감의 물결이 넘쳐난다.
현실적이지 않아 보이기까지하는 색의 조화는 꿈결같은, 꿈속의 이상향 같은 분위기를 연출해 내면서 꿈같은 판타지의 세계를 창조해 냈다. 청정을 향한 쿠앙민의 사랑과 쿤룬의 사랑, 무환의 소유욕 등은 색의 표현으로 대사나 행동보다도 많은 부분을 표현했다고 본다.
그리고 독특한 그로테스크함은 빼놓을 수 없는 무극의 맛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로테스크(grotesque)는 괴기한 것, 극도로 부자연한 것, 흉측하고 우스꽝스러운 것’등을 형용하는 말로서 환상적인 괴기성과 괴기미를 뜻한다고 하는데... 그런 괴기함보다는 어색할 정도의 부자연스런 치장과 색, 비현실적임에 의한 그로테스크의 느낌을 말하고자 한다. 쿠앙민의 선화갑옷을 비롯해서 무환과 그의 부하들의 복장, 귀랑과 설국인의 극도의 흑백배색 등에서는 왠지 묘한 이질감과 함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치열한 전국시대를 거쳤던 일본과 중국 무장들의 복장은 중세 기사의 갑옷과는 다른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그것은 괴기하면서도 비인간적이며 아름다우면서도 섬칫한 그런 미에 닿아 있다.
무극의 판타지는 봄같은 핑크빛에서부터 글루미한 회색과 절망적인 검은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색과 색감으로 판타지의 세계를 묘사했다.
무극이란 개념은 원래 노장사상의 초월적인 개념이었던 것이 송대 성리학에서 (유교적인)우주관을 설명하는 원리로 차용되었다. 무극의 철학적 개념을 명석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무극은 변하지 않는 불변의 진리이면서도 그것이 태극과 음양, 오행의 변화에 따라 세상 모든 만물의 이치가 된다는 것이며 반대로 세상 모든 만물의 근본 이치는 이 무극에 따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만물의 변화를 궁구하면 불변의 원리이자 이치인 성을 깨닫게 되고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 무극의 무극은 세상만물의 수 많은 조건과 변화 속에 휘말리지 않고 그 변화의 내재가 되는 세상의 참된 이치며 근원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 될 수 있겠다.
만신의 언명들은 절대적인 운명을 선고하는 재판관의 음성처럼 들릴 지도 모른다. "한 번 운명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강물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 한,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한, 죽은 사람이 살아날 수 없는 한 절대 그 운명을 바꿀 수 없다." 그러나 만신은 변화와 변화를 거듭하는, 바둑의 고수들이 한 두 수가 아니라 몇 수 심지어는 십여수를 내다보는 것처럼 몇 발 자국 앞의 일들을 미리 알려줄 뿐이되 인간이 내다볼 수 없는 몇 발 자국 앞이기에 운명적으로 들릴 뿐이다.
오행의 변화로 이루어진 만물도, 음양의 조화로 부터 나오는 오행의 변화도, 회전하며 음양의 변화를 낳는 태극도 결국 변치 않는 무극의 이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간파(깨닫는다면)한다면 인간의 운명을 뛰어 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삶의 참 이치를 깨닫는 것일 뿐이다. 그것이 오랜 전통의 중국과 한국의 사상이 목표로 했던 성인됨이다.
굳이 사족을 달자면 무극의 현대적인 해석인 참사랑, 참자기를 알므로서 무극으로 화하여 모든 갈등과 운명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영화의 대미라고나 할까? 귀랑에게는 저주와 속박의 검은 깃털옷이 참사랑을 깨닫고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 주장한 쿤룬에게는 더 이상 저주도 속박도 되지 못한 다는 점은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참자기를 주장함으로서 쿤룬은 날듯이 달리며 운명의 벽을 돌파하고, 귀랑은 참자기를 직면하고 자기 존재의 소멸을 받아들임으로서 무환의 마수에서 벗어난다. 그는 자신의 죽음, 소멸을 두려워 했지만 그것은 무극으로 돌아가는 길이기에 귀랑에게는 오히려 구원의 길이 되었다.
무환은 어린시절 청정의 거짓말에 의해 아무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되버렸다고 한다. 그는 아마도 자기 자신조차도 믿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무환처럼 불쌍하고 비극적인 캐릭터 또한 없을 것이다. 무환의 저주에 속박되었던 존재감조차 없었던 귀랑조차 구원되었다면 무환은 그 구원마저도 거부한 채 무극으로부터 저 멀리 무수한 변화와 운명이라는 눈속임을 벗어나지 못한 불쌍한 영혼이리라~
무극이 극적인 재미와 구성에서는 많은 부족함이 있었지만 이처럼 부정할 수 없는 의미와 매력이 있다는 사실에 나름대로 무극은 추천해 볼 만한 영화라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