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룡의 영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성룡의 시대는 갔다. 라고 모두들 말한다. 그러나, 성룡의 영화에는 제목 앞에 ‘성룡’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뉴 폴리스 스토리도 예외는 아니다. ‘성룡의 시대는 갔지만, 성룡의 영화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룡의 영화는 늘 웃기다. 매번 그래왔고, 성룡의 영화를 볼 때면 으레 그런 편견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이 성룡의 매력이기도 하다. 헐리웃의 코믹액션은 대부분 B급이지만, 성룡의 코믹액션은 절대 B급이 아니다. 성룡의 코믹액션은 변화하지 않으면서, 늘 새로운 무언가를 추구한다. 성룡이 홍콩에 있을 때도 그랬고, 헐리웃으로 갔을 때도 그랬다. 그러나, 성룡이 헐리웃으로 갔을 때는 성룡 자신의 액션보다는 그래픽이 보다 더 첨가되어 성룡의 팬들을 많이 울리기도(!) 하였다. 저것은 성룡의 영화가 아니야, 라면서…
그러나, 가끔은 예외도 있다. 뉴 폴리스 스토리가 바로 그것이다. 성룡의 원래 스타일대로라면 이 영화 무척 경쾌하고, 가벼워야만 한다. 그래서, 성룡의 영화는 너무 뻔해, 라는 말이 저절로 터져나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성룡은 성룡이야, 라는 말이 나와야 한다. 그런데, 뉴 폴리tm 스토리에서만큼은 그런 뻔한 ‘성룡의 감상문’이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영화 기존 성룡의 영화에 비교하면 상당히…… 무겁다!
2. 트라우스의 성장
‘트라우스’라는 말이 있다. 어렸을 때 정신적, 육체적으로 학대를 받고 자란 사람을 말하는 용어다. 그 정신적, 육체적 학대는 죽을 때까지 그를 괴롭힌다.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것은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문제다. 그것을 치료할 수 있는 사회시설이나 혹은 보호시설이 없다면 아마도, 그는 평생 고통을 짊어지고 가야 할 것이다.
뉴 폴리스 스토리의 5인조 갱단 두목은 그런 녀석이다. 그 녀석의 아버지가 자신을 미워하는 데에는 이유가 없다. 그저, 자식이 못났다는 개인적 편견 때문이다. 그런 모습은 한국 사회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여자라는 이유로 오빠의 그늘에 가려 기도 못 펴고 살다가는 반항적인 여성이 되어, 결국은 범죄의 소굴로 들어가는 사람이 있다. 동생이나 형보다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로, 혹은 돈을 못 번다는 이유로 정신적 핍박을 당하다가는 드디어는 미쳐버려 이유없는 살인을 저지르는 이도 있다. 범죄의 실상은 참혹하지만, 그 이면엔 다 이유가 있다. 처음부터 길거리에 버려진 아이도 있다. 잘 다니던 회사가 부도가 나서 그만, 거리에 나앉는 사람도 있다. 5인조 갱단 모두는 그런 부류 중의 하나에 속한다. 비록, 영화에서 자세히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대부분 그렇게 상처받은 이들 중 하나일 것이라는 추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3. 부성애가 사라진 시대
5인조 갱단의 두목인 그 녀석은 그렇게 상처받은 ‘트라우스’를 대표한다. 경찰을 죽이는 것으로 그는 자신의 상처를 씻으려 한다. 그는 단지 아버지가 경찰이라는 이유로 경찰을 미워한다. “네가 미워하는 건 경찰이 아니라, 네 아버지와 네 자신”이라는 성룡의 말에 그는 스스로를 깨닫는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체면만을 생각하며 끝까지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아버지 앞에서 그는 지옥같은 삶 대신 죽음을 선택한다. 그가 그리워했던 부성애. 그것은 끝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부성애가 사라진 시대. 그 빈 공간에 성룡이 들어왔다. 그러니까, 성룡은 이번 영화에서 무조건 웃기는 대신 무거워져야만 했다. 그것이 그가 가져야만 했던 부담감이다. 아무리 도둑이라도 그에게는 ‘사람’이었으며, 적조차도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응급조치를 해 살려내야만 한다. 무게운 세상이다. 그 무게를 위해 성룡은 자신의 고정적인 트랜드를 버리고 전혀 다른 성룡을 연기했다. 그것은 변화가 아니라, 선택이다. 선택은 자유로운 것이다. 그 자유로운 틀 안에서 성룡은 액션으로 사람의 마음을 녹인다. 성룡의 무거운 연기가 부담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것은 순간이다. 성룡의 액션은 여전히 살아있으며, 그의 휴머니즘은 이제 현대사회의 새로운 이슈를 창조한다.
4. 자식은 내 소유야, 라는 고정관념.
뉴 폴리스 스토리는 꽤나 인간적이다. 그러나, 또한 비인간적이기도 하다. 5인조 갱단은 아무 거리낌없이 경찰을 죽인다. 그들은 비인간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과감하게 그들이 비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가 그들을 비인간적으로 몰았다고 정의한다. 여기에서 '사회‘라는 것은 가정의 틀에 한정되어 있다. 그 틀은 우리가 뿌리뽑아야 할 고정적인 관념이다. “자식은 내 소유야”라는 고정관념. 익스트림 스포츠는 그 소유의 틀에서 벗어나고자 생겨난다. 그리고, 익스트림 스포츠에 만족을 못하는 어떤 녀석들은 급기야 살인을 통해 자신의 광기를 내뿜는다. 이미 통제하지 못하는 자신의 어린시절. 그것은 어른이 되어서 더욱 더 심화되지만, 결국은 진정한 ’부성애‘ 앞에서 눈물을 흘리게 되고야 만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다. 자신의 마음을 누군가가 알아주는 것. 5인조 갱단의 마음을 누군가가 진작에 발견하고 알아주었던들, 이와 같은 끔찍한 범죄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죽어갈 때마다 한번씩 눈물을 흘린다. 통제하지 못하는 어린시절. 그것은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의 모습이며, 또 누군가에게 있을지 모를 범죄의 모습이다. 그것을 통제하기란 쉽지 않다. 편견을 버리자. 자식은 내 소유가 아니다. 자식은 내가 낳은 또 한 명의 ’인격체’다. <뉴 폴리스 스토리>의 경찰청장처럼 자신을 위해서 자식을 범죄로 로딩하지는 말자. <뉴 폴리스 스토리>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보기 드문 성룡의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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