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미워하며는 안되겠지 다시는 생각해서도 안되겠지 철없이 사랑인줄 알았었네 이제는 잊어야 할 그 때 그 사람 - 심수봉, '그때 그 사람'中
다만 내가 그것보다 더 짜증이 나는 것은, 상상력이 결여된 인간들 때문이야. T.S 엘리엇이 말하는, '공허한 인간들'이지. 상상력이 결여된 부분을, 공허한 부분을, 무감각한 지푸라기로 메운 주제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바깥을 돌아다니는 인간이지. 그리고 그 무감각함을, 공허한 말을 늘어놓으면서, 타인에게 억지로 강요하려는 인간들이지 - 무라카미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中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번은 비극으로, 또 한번은 희극으로.' 내가 이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면 우린 지금 막 희극이 시작되려는 시점에 서 있다. 그것도 어떤 비유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냥 비극의 역사 그 자체가, 부끄러움이라고는 조금도 모르는 박정희의 핏줄이 지금 우리 앞에서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미래로 나아가자고.' 도무지 누구를 위해 미래를 나가자는 건지 알 수 없지만 하여튼, 그들은 자기들 방식대로 21세기를(21세기에) '여전히' 살아가고(기생하고) 있는 것이다. 2005년 1월 10일 '그의 또다른 핏줄'은 아직 보지도 못한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해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그러나 그에겐 미안하게도 뚜껑을 열어본 [그때 그 사람들]은 내가 너무도 기다려온 바로 그런 영화였다.
이 영화에 바치는 나의 찬사와 존경심을 펼쳐보이기 이전에 우선 방점을 찍고 싶은 부분이 있다. 그건 이 영화의 정치적인 측면이다. 내가 [그때 그 사람들]에 찬사를 보내는 것은 이 영화의 정치적 입장에 동의하기 때문이 아니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그때 그 사람들]은 정치적인 입장이 불분명한 영화이다. 이 영화는 '임상수' 감독이 늘 그렇듯 일단 들이대고 보자는 식의 막가는 블랙 코미디이다. 분명 박정희가 희화화된 측면이 있지만 상당 부분 사실 관계에 근거한 서술을 하고 있다. '박정희' 이전에 '다카키 마사오'였던 그 운좋은 독재자는 실제 자신을 자랑스러운 사무라이라고 생각했으며, 그가 죽었을때 일본의 유력 일간지에는 '마지막 사무라이가 죽었다'는 기사가 일면에 실리기도 했다. 오히려 사실관계에 대한 왜곡의 문제는 '김재규'에서 나온다.
'김재규'에 대해 이야기할때 언제나 논란이 되었던 부분, '왜 거사를 마친 김재규는 중앙정보부가 아니라 육군본부로 차를 몰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임상수' 감독은 거사 사실을 숨기고 일단 권력을 장악하려는 '백윤식'의 모습을 통해 답을 대신한다. 그러나 이 질문은 사실 이렇게 해서라도 독재를 막아보겠다는 '김재규'의 신념을 증명하는 것이다. 애당초 권력을 장악할 생각이었다면 김재규는 중앙정보부로 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이미 목표를 모두 이루었기 때문이다. (김재규는 분명 재조명 되어야 한다. 특히 그와 장준하 선생의 관계,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 등은 명확하게 밝혀져야 한다. 그러나 아직도 박정희가 존경하는 인물 1위인 이 나라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임상수 감독은 박정희를 희화화 했듯이 김재규 역시 희화화 한다. (박정희를 향해)"지가 무슨 사무라인줄 알어"로 시작된 영화는 (김재규의 수행비서 민대령을 향해)"대한민국 만세는 무슨 얼어죽을,"로 끝을 맺는다. 그러므로 [그때 그 사람들]의 정치적 입장이 편향되었다는 지적은 받아들일 수 없다. 오히려 이 영화를 가지고 정치 운운하는 것은 넌센스다는 말이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
사실관계에 논란의 여지가 있음에도 내가 이 영화를 지지하는 이유는 임상수 감독의 '상상력' 때문이다. 1979년 10월 26일의 '그때 그 시간'에만 집중한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둘러싼 하루를 온전히 불러내어 '함부로 말할 수 없었던 그 사건'을 '함부로 말해버리고야 만' 발칙한 상상력 말이다. 사실 역사적인 순간에 존재했던 사람들은 우리의 상상력을 언제나 자극시킨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를 이렇게 흥미롭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더구나 [그때 그 사람들]은 내러티브 뿐이 아니라 촬영과 음악도 죽여준다. 특히 [바람난 가족]으로 2003년 스톡홀름 영화제에서 촬영상을 받은바 있는 김우형 촬영감독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최고의 영상으로 자신의 진가를 보여준다. 영화 초반 한석규가 지하 감방을 걸어가며 고문하는 모습을 들여다보던 롱테이크와, 거사 직전 현장의 풍경을 정적이면서도 긴박감있게 담아낸 지미집 촬영은 두고두고 기억될 만한 명장면이다.
좋은 영화는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극장문을 나서며 감탄과 질투와 자극 그리고 창작에 대한 욕망을 느끼기는 [올드보이]이후 정말 오랜만이다. 작년 중반기 이후 잠시 주춤했던 한국 영화들이 [그때 그 사람들] 만큼 해준다면 올해는 영화들 때문에라도 행복한 한 해가 될 것이다. 김지운, 봉준호, 박찬욱, 허진호, 곽경택, 이창동, 홍상수, 김기덕.. 위대한 감독들의 작품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
spectator's cut 이 영화를 기다리면서 가장 불안했던 부분이 캐스팅이었다. '김윤아', 가수로서의 그녀는 더없이 근사하지만, 나는 가끔 그녀가 무대 위에서 '노래'가 아니라 '말'을 할때 항상 불안했다. 뇌쇄적인 팜므파탈의 이미지와는 달리 그녀에게 백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여 그녀의 어설픈 연기가 영화의 흐름을 끊어놓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그런데 그건 단지 나의 기우일 뿐이었다. 배역 자체가 '가수'역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연기한 것이 없지만, 김윤아는 자신의 몫을 100% 해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 영화와 너무 잘 어울렸으며, 특히 앤딩 크레딧이 오를때 흐르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영화를 정서적으로 완성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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