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화성남자의 주장을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이 정도 수준의 애니메이션이 실패라니 도대체 애니메이션이 얼마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건지 알기나 하는지 궁금하네. 난 이 영화가 너무나 맘에 들어. 아마도 미야자끼의 작품들중 최고라고 해도 좋을 것 같고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그의 작품세계의 모든 것이 농축돼 있는 야심작, 게다가 이전 작품들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작품세계로의 전환까지 암시돼 있는, 한마디로 3년간 미야자끼의 신작을 기다려온 팬들을 황홀하게 해주는 역작 그자체라는 얘기야.
우선 내가 놀란건 주제 자체의 놀라움과 매력이야. 이번 작품에서 미야자끼는 십대소녀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 주인공 소피는 모자가게에서 일하는 평범한 십대소녀야. 소피는 어느날 거리에서 꽃미남 마법사 하울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이를 시기한 황야의 마녀가 소피를 90세 노파로 만들어버려. 할머니가 된 소피는 결국 집을 나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찾아가게 되지. 이후 엄청난 모험에 휩쓸리는 소피는 숱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사랑을 이루어내. 나는 그동안 다양한 주제를 다루어온 미야자끼가 왜 사랑이라는 인기 소재를 다루지 않는지 궁금했었는데 이번 작품을 보면서 그 의문이 깨끗이 풀렸어. 미야자끼는 감독초기 시절 섣불리 사랑이라는 소재를 다루지 않고 자신의 작품세계가 성숙할 때까지 기다렸던거야. 그러다 자신의 아니메 인생이 30년을 넘어서자 마침내 칼을 뽑아들었고 결과는 대성공이야. 나는 꽃미남, 꽃미녀들이 만나 이루어지는 틀에박힌 사랑보다 '하울...'에서 만나게 되는 속깊은 사랑이야기가 훨씬 맘에 들어. 이 작품은 얼핏 보면 반전을 소재로 한 것 같기도 하고 마법을 다룬 영화같기도 하지만 이 영화의 진정한 주제는 '삶에 대한 사랑과 찬미'야....그건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찾아간 소피가 더럽기 짝이 없는 성 내부를 깨끗이 청소하는 장면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나지, 또 소피가 성을 움직이는 동력원인 캘시퍼를 달래서 물을 끓이고 요리를 하는 장면에도 미야자끼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 압축돼 있다고 봐. 한마디로 소피가 등장하기 전까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그저 잠만 자는 거처 혹은 이동하는 수단 즉 거대하고 낡은 트레일러에 불과했던 거야. 하지만 소피는 하울에 대한 속깊은 사랑을 가슴에 품고 하울 성을 사람냄새나는 '스위트 홈'으로 바꾸어 가는 거지. 이건 이전 미야자끼의 작품 그 어디에서도 등장하지 않는 새로운 주제의식이야. 무척 평범해 보이는 주제일 수도 있지만 미야자끼는 거장답게 깊이있고 치밀하게 이를 다루고 있어 정말 감동적이야.
또한가지 '사랑과 삶(외쿠메네)의 소중함'이라는 주제의식에 비해 비중이 좀 떨어지긴 하지만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마법에 대한 태도도 참 맘에 들어. 요 몇 년간 '해리 포터'를 비롯해서 마법을 소재로 한 판타지물들이 대단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데 내가 불만인건 이들 대부분이 마법을 소재로 한 오락물에 불과하다는거야. 마법을 오락물의 소재로 채택하더라도 좀더 사려깊고 삶에 대한 통찰력이 담겨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그런 면에서 이번 신작이 너무 맘에 들어. 이 작품에는 마법을 이용해 하늘을 날고 저주를 걸고 저주를 막는 등 온갖 마법관련 장면들이 등장하지만 '해리 포터'의 퀴디치 월드컵이나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스펙타클한 마법처럼 오락과 볼거리에 치중하기보다 전쟁을 막으려고 애쓰면서도 자신의 삶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미숙하고 인간적인 마법사가 대신 주인공으로 등장해. 그래서인지 소피가 하울의 과거로 가서 그를 만나는 장면의 아름다움은 여타 다른 판타지물들과는 비교자체가 의미가 없을 정도로 탁월하다고 느껴져. 원래 미야자끼는 애니메이션이 도달할 수 있는 최상급의 성과를 매번 새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유감없이 보여주곤 했지만 이번에는 이같은 기술적인 완성도 뿐만 아니라 소재를 다루는 사려깊음, 주제의 깊이가 같이 어우러져 있어 더욱 큰 감동을 주는 것 같아. 단순히 상대방을 제압하고 이기면서 끝나는 여타 판타지물식의 스토리 텔링이 아니라 자신을 노파로 만들어버린 마녀도 사랑으로 감싸는 '관계 중심의 내러티브'가 참 마음에 와닿아. 물론 이야기의 완급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캐릭터의 설명이 부족해 다소 뜬금없어 보이는 장면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는 옥의 티라고 해야할 수준이고 또 애초에 원작 자체가 미야자끼의 창작이 아니라 영국작가의 작품이기 때문에 주어진 태생적인 한계도 관객은 반드시 감안을 해줘야 한다고 봐.
나는 차가운 겨울에 찾아온 미야자끼 하야오의 이 3년만의 신작이 정말 맘에 들어. 크리스마스 시즌에 연인끼리 보기에도 좋고 가족끼리 보기에도 참 좋아. 그리고 앞으로 미야자끼는 은퇴가 아니라 더 새롭고 놀라운 작품으로 영화팬들의 곁을 찾아올 게 분명해. 그는 끝없이 변신할 거고 그러한 의지가 이번 신작 '하울...'에도 분명하게 담겨져 있거든. 아...미야자끼 감독님의 신작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는걸 보면 나야말로 정말 어쩔 수 없는 미야자끼 의 골수팬인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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