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탐 행크스를 좋아한다. 실상 나는 탐 행크스가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마주 대하는 탐 행크스는 언제나 너무나 다정한 느낌의 사람이어서, 영화가 끝날 때면 탐 행크스라는 사람에게 푹~ 빠져서 헤어나올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탐'이라는 이름은 그러니까 '톰'이라는 이름은 참 흔한 외국 이름이지 않은가? 어릴적 중학교 영어 교과서를 떠올려 보더라도... - 뭐, 요즘 어린이들은 초등학교때 이미 정규과정으로 영어를 배우긴 하지만 - 내가 보던 그 어린 시절 중학교 영어 교과서의 1단원의 주인공은... Tom과 Jane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밥'도 아니고, '돌'도 아니고 '리키'도 아니고 'Tom'... "Hi, Tom..." 그래... 그렇게 시작되는 책이었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느냐면, 탐 행크스의 'Thomas'라는 이름 자체가 상당히 흔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예로, 탐 행크스와는 다른 스타일이지만 우리에겐 무척 친숙한 배우 '탐 크루즈'도 있지 않은가.
물론 나는 그 두 배우 모두를 좋아하지만, 탐 크루즈에게서 느끼는 매력과 탐 행크스에게서 느끼는 매력은 전혀 다르다. 탐 크루즈에 대한 감정은 동경이라면, 탐 행크스에 대한 감정은 정겨움, 따뜻함, 친밀함... 그리고 그리움이다.
그가 출연했던 영화들을 떠올려보자. 'Big', '포레스토 검프',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You've got mail', '필라델피아', '스플래쉬'등... 물론 그가 출연한 대작들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 그린 마일, 밴드 오브 브라더스 등 그외에도 많지만 나는 금방 나열한 3편의 영화는 아쉽게도 미처 보지 못하였고, '캐스트 어웨이'는 그닥 재밌게 보지 못했던 까닭에 잠시 제외하고 얘기하고자 한다.
제외된 영화들을 제외하고서라도 충분히 그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남자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그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와서, 내가 보았던 영화들 속에서 '탐 행크스'라는 남자는 늘 인간적이었다. 때때로는 약간 모자란 그러나 너무나 순수한 남자로 그려지기도 했고, 아니면 젠틀한 신사로 나타나기도 했으며, 평범한 가정의 한 아이의 아버지로 그려지는 등, 그의 모습은 늘 다른 역할이었지만 늘 너무나 익숙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 말은 절대 그의 연기가 단조롭다거나, 그의 이미지가 획일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늘 변화하는 모습 속에서도 탐 행크스는, 그만의 유연함이랄까... 그런 게 있다. "아, 그래. 이 남자구나. 이 남자가 나오는 영화를 보구나.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래서 편안한... 내 이웃같은 사람..." 그런 느낌이랄까?
사실 그에 대해서 이렇게 좋은 이미지를 가질 만큼 그는 정말로 괜찮은 역할만을 맡아왔지만, 어떤 면에서는 바로 그였기 때문에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바로 '탐 행크스'였기에 그 역이 더욱 빛이 나고, 그 영화가 더욱 살아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나는 그렇게 믿는다.
탐 행크스도 이젠 참 많이 늙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5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가고 있으니까. 하지만 중후해지고 나이 들어가는 그를 보는 것도 역시나 즐겁다. 그의 늙어가는 모습조차 너무나 자연스러워 편안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가 만약 16년이나 족히 지난 지금에도 Big 시절의 모습이라면 오히려 이질감이 들지 않을까? 확실히 대단하고 놀랍다고는 생각하겠지만, 그렇다면 '편안한 느낌의 나의 이웃같은 탐'의 이미지는 깨어지고 말테니까.
영화 터미널에서도 어김없이 그를 만날 수 있다. 편하고 다정한 탐 행크스를...
거의 알지 못하는 영어 단어를 띄엄띄엄 내뱉고, 상대의 말 중 채 10분의 1도 알아듣지 못하는 '크로코지아'의 국민. 아니 졸지에 난민이 되어 버린 남자.
뉴스에서 나오는 자신의 고국의 소식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눈물을 참는 그의 모습을 보았는가? 혹자는 영악한 스필버그와 탐 행크스가 만들어 낸 또 하나의 '미국 예찬' 영화라고 혹평하지만... 미국에 대해 그닥 좋은 감정이 없는 나로서도, 그저 이 영화는 좋았다.
사실 나같은 사람들이 많길 노리면서 교묘히 만들어진 영화라 해도 어쩔 수 없지만, 나는 언제나 영화는 영화 그대로 본다. 영화에 엮인 감독의 숨은 의중까지 파헤치고 따지긴 머리 아프다. 나는 직업 평론가가 아니니까.
그러니까 이 영화는 나로서는 무척 좋았다. 무척 가슴 따뜻하고 무척 행복했다. 영화 한 편을 보는 그 2시간이 채 못 되는 시간 동안... 내가 이리도 행복하고 마음 따뜻해질 수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히 멋진 영화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영화 속에 그의 모습만 얘기하도록 하자. 그러한 일련의 행동들이 무엇을 의미하고, 그러한 일련의 행동들이 벌어지는 '공항'이라는 장소는 또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제쳐놓자. 나는 그저 좋을 뿐이란 거다. 그의 연기가 살아숨쉬는 이 영화가.
한 순간에 나라를 잃은, 그야말로 빼앗긴 조국에 눈물을 터트리는 남자. 돌아갈 곳도 나아갈 곳도 없는 갇힌... 그야말로 커다란 감옥 안에 갇힌 남자.
그는 묻는다. "난 뭘 해야하죠? "쇼핑... 단지 쇼핑하는 것 밖엔..." 그를 그 커다란 라운지에 혼자 떨구고 가버리는 경관의 말 한 마디는 '쇼핑'이다. 실제로 공항에서 '쇼핑'을 하는 행동은 그닥 의미가 담긴 행동이 아니다.
하지만 영화 속 '빅토리'와 같은 입장에서 '쇼핑'을 한다는 것은 체념이다. 단순히. 단지. 다른 그 무엇도 할 것이, 할 수도 없기에 '쇼핑'을 하는 것 뿐이다.
하지만 빅토르는 체념하지 않는다. 그는 그의 어눌한 영어 솜씨만큼 마음도 너무나 순박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 대한 원망도, 증오도 없는 사람이냥 그저 태연히 공항의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잔일을 도우며 밥값을 마련한다. 때로는 공항 내에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기도 한다.
그렇다. 그것은 단순하게 보면 '적응'이다. 인간의 '적응'의 동물이라서 어떠한 상황에도 적응해 나갈 수 있다. 단지... 그 '적응'을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겠지만...
빅토르가 보는 세상은 따뜻하다. 그 수많은 사람들. 힘겹게 전화를 걸게 도와달라는 그의 외침도 무시하고 지나치던 그 수많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도 그는 꿋꿋하게 자신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고 또 무언가를 바꿔나간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고 뛰어들고 그래서 생활해 나간다. 우리는 절대 불가능하리라 생각되는 그 '공항'이라는 장소에서...!
기억나는가? '아무 것도 도와드릴 수 없어요. 그런데 왜 항상 2시간씩이나 기다리면서 이 곳을 찾아오시나요?' 라고 묻던 공항 여직원의 질문에,
역시나 그 어눌한 말투로 '당신은 두가지 색깔의 도장을 가지고 있어요. 빨간색, 녹색. 그러니까... 확률은 50대 50이잖아요.' 50대 50...
그의 이야기에 그녀는 싱긋 웃었다. 하지만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 저 사람이 보는 세상은 저리도 따뜻하고 긍정적이구나...'
'선'이 빛나는 이유는 '악'이 존재하기 때문이란다. '빛'이 더 찬란한 이유는 '어둠'이 존재하기 때문이란다. '자유'가 소중한 까닭을 나는 구속받고 있는 '빅토르'에게서 발견한다.
모든 것을 구속 당하고 있는 빅토르는 나보다도 훨씬 자유스럽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나는... 오히려 스스로를 더 구속하고 있다.
'포레스트 검프'에서의 탐 행크스는 그저 뛰는 남자로 나왔다. '터미널'에서의 탐 행크는 기다리는 남자이다.
뉴욕으로, 공학 밖으로 나가기만을 한결같이 변함없이 기다리는 남자. 그리고 크로코지아가 종전을 맞이한 후에도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뉴욕으로 가길 더 희망한다.
우리는 빅토르란 남자가 너무나 열심히 공항에서 잘 살아가고 있었기에, 왜 그가 그토록 뉴욕으로 가고 싶어했는지 그만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런 우리의 건망증에 그가 다시금 똑똑 노크해 온다.
40년 동안 함께 재즈를 했던 사진 속 인물들을 찾아 헤메던 그의 아버지의 인생을 빅토르 그가 대신 이어받은 채, 그건 의무도 서약도 그 무엇도 아니었지만 그는 단순히 이뤄주고 싶었다고 한다.
그 재즈 밴드들의 인물들의 사인 한 장, 한 장을 모아 40년동안 정성스레 보관한 그의 아버지. 그러나 끝끝태 받지 못한 마지막 한 명. 그런 아버지를 위로하기 위해 의사소통도 제대로 되지 않는 영어 실력으로 무작정 미국이라는 거대한 도시로 날아온 남자, 빅토르.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미국에서도 무려 9개월을 공항에서 보내야 했던 빅토르. 계속... 계속... 늘... 한결같이...
그는 그 공항에서 스스로 영어를 배워나가고, 스스로의 작지만 아담한 보금자리를 만들고, 직업을 가지고, 친구를 사귀었다.
지난 수십년간의 그의 인생과는 전혀 다른 9개월간의 인생이 공항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사랑...
오! 정말이지 '탐 행크스'만으로도 벅찬 기쁨인데, '캐서린 제타 존스'까지 함께라니 정말 멋진 캐스팅이라고 생각한다. '엘리자베스 아덴'의 그 화려한 여신님이 이번에는 유부남과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하는 비운의 스튜어디스로 나온다. 두 사람은 '나폴레옹'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웃고 공감하고 사랑을 느끼지만... 그러나 불행히도 이 둘의 사랑은 이뤄지지 않는다. 캐서린 제타 존스는 탐 행크스에게 아버지의 유언을 이룰 수 있는 '한 자락 희망의 빛'만 남겨둔 채,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그 불쾌한 남자에게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녀의 말처럼, '그것 또한 운명이라면 운명...' 운명이라면... 그래, 거역하기 어렵지... 그런 운명들이 뭉쳐있는 곳이 인간 세상이고, 공항은 바로 그런 인간 세상의 축소판이니까.운명처럼 그녀와 만나게 되었던 빅토르는 운명처럼 다시 결별하지만. 공항을 나서던 빅토르와 마지막으로 주고받던 그들의 미소는 아련한 여운을 남게 한다.
'만난 것도 헤어지는 것도 운명이라면... 그 운명의 이끌림대로 어느날, 어느 순간에 다시 만날 지도 모르지.' 라는 아련한 감정만을 지닌 채 헤어지는 두 사람.
그리고 마침내 빅토르는 9개월간의 공항에서의 체류를 끝내고, 아버지의 일생의 꿈을 이뤄낸다. 마침내 빅토르의 긴 기다림이 끝나는 순간이다.
아니, 어쩌면 빅토르의 기다림은 지금부터 다시 시작될 지도 모른다. 그 지난 9개월간 알게 되었던 '아멜리아'에 대한 기다림... 하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집으로 돌아갈 때다. 무척이나 긴 작업을 끝낸 후의 개운한 표정으로 택시에 몸을 싣은 빅토르는 집으로 가고 싶다고 얘기한다.
빅토르에게 있어서 최후의 바리케이트였던 공항 입구로 향하는 문 입구에서, 그를 막아섰던 경관이 빅토르의 어깨에 자신이 입고 있던 코트를 덮어주며 '밖은 눈이 오니까 추워요'라고 말하던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단순히 그 장면이 주는 감동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무엇보다 체제에 대해 반대하고 거부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때로는 융통성이란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도 꽤나 고지식한 사람이긴 하지만... 정말로 FM적인 사람은 싫다. 영화 속 '프랭크 딕슨'같은 인물 말이다.
빅토르를 막아서라고 소리지르던 딕슨의 명령을 거부하고, 빅토르를 공항 밖으로 보내주던 경관들의 모습은 그런 점에서 정말로 멋진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체제는 필요하다. 법도 규칙도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영화 속의 대사처럼... 때론 '그 사람', '인간성' 자체를 먼저 보아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래, 그렇다면 굉장히 곤란한 경우가 많아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빅토르가... '아버지'를 '염소'라고 번역해 주었던 것처럼...
나는 또 한번, '탐 행크스'라는 배우에게 반해 버렸다. 얄미운 만큼 이 배우는 보는 이의 감성을 잘 자극한다. 그가 때로는 굉장한 악역으로 나왔으면 좋겠다. 안 어울릴려나?
아니, 아니다. 그래, 그냥 이대로의 그가 좋다. 한결같은 따뜻함, 한결같은 부드러움, 한결같은 편안함, 한결같은 순수함, 한결같은 진지함... 그래서... 늘 나는... 이 배우를 그리워한다. 참으로 날 행복하게 만드는 배우, '탐 행크스'
만약 내가 언젠가 어느 나라, 어느 공항이든 들릴 때가 온다면... 꼭 한번쯤은 주위를 두리번거리게 될 것 같다. 내 정다운 '빅토르'와 만나게 될 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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