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다. 나 그리고 세상의 모든 영화 관객들의 아량이 넓어서 영화의 플롯 같은게 어찌되든 신경안쓴다고 치자. 그래도 최소한 악당이 왜 악당인지 정도는 알기 쉽게 설명해줘야 하지 않을까? <툼 레이더>에 등장하는 '광 명파'가 대체 무슨 사악한 짓을 하는 집단인지 도통 모르겠다. 죽은 라 라의 아버지(존 보이트)가 그녀에게 남긴 편지에서 밝히는 그들에 관한 얘기는 간단해도 너무 간단해서 어이가 없을 정도다. 그들은 '시간으로 세상을 지배할 음모를 꾸미고 있으며 매우 위험하다'라나?
간단명료하고 핵심을 짚는 설명이기는 하나 덕분에 이때부터 이 영화의 운명을 알아차린채 그저 시간의 흐름에 몸과 마음을 맡겨 버렸다. 정확 히 바로 그 앞 부분의 저택에서의 액션 시퀀스가 이 영화에서 '재미'란 걸 느낄 수 있었던 마지막이었다. 물론 그 장면들도 예고편에서 봤던 것 에서 약간의 살을 더 붙인 정도였지만.
후에 '재미'를 느껴야만 한다고 강요하는 부분이 두 번 더 있지만 재미 있는 척 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심심풀이 조차 될 수 없을 만큼 고리타 분했다.
캄보디아 사원의 경우는 불교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난데없이 <공작왕>냄 새가 났다. 특히 팔 여섯달린 거대한 석상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 그런 느낌이 들었다. <미이라>에서 모래로 만들어진 고대 병사들 처럼 한 대 맞으면 잘 부스러지는 작은 석상들은 가만히 제자리나 지킬 것이지 왜들 움직이는지 모르겠다.
끝부분에 시베리아 극지방에 갔을 때도 의문 투성이다. 라라는 대체 시 킬 일도 없으면서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컴퓨터 기술자를 왜 불러들인 것인지, 또 칼에 찔린 악당은 힘이 남아돌면 도망이나 칠 것이지 왜 라 라의 신경을 긁어서 결국 맞아 죽는지, 또 라라의 아버지는 미래의 라라 가 나타나자 왜 딱 그 시간에 나타날 줄 알고 기다렸다는듯이 맞이하는 지, 정말 미스테리한 영화였다.
이런 지적들이 그저 괜한 악담으로만 느껴진다면 그건 당연 '라라 크로 프트'가 나왔다는 사실, 그 자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주변 인물들이 별다른 특징없이 겉도는건 물론이거니와 라라 크로프트 또한 '안젤리나 졸리는 적역이었다'는 점 외에는 캐릭터 자체에서의 매력을 느낄수 없었 다. '배트맨'이나 '엑스맨'같은 암울한 영웅이기를 기대했던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인가. 그저 리플리(에일리언)나 사라 코너(터미네이터)의 계보 를 잇는 '여전사'라는 정도에서 의미를 부여해줄 만할 뿐인가.
<툼 레이더>는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미이라 2>와 대조적이다. <미이라 2>는 여름용 블럭버스터 치고는 꽤 길다. 런닝타임이 130분이다. 3시간 짜리 <진주만>도 있지만 <진주만>은 나름대로의 '이야기'를 갖추었다는 점에서 제쳐두기로 한다.(그 이야기란게 얼마나 3류인지에 대해 여기서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다) <미이라 2>도 플롯의 부재는 마찬가지다. 하 지만 쉴새없이 몰아치며 2시간이 넘는 상영시간 동안을 꽉 채운다. 흔히 얘기하는 '남는게 없다'라는 말을 이 경우에 긍정적으로 해석해보자면 그만큼 어느 특정 부분만을 기억해내기가 어려울 만큼 지속적으로 재미 있었다는 거다. 하지만 <툼 레이더>는 고작 95분 가량의 런닝타임인데도 강약이 뚜렷하게 느껴진다. 저택에서의 싸움이 끝난 뒤, 캄보디아에서 한차례 난리법석을 떤 뒤 그 사이사이의 잠깐이 왜 그렇게 지루하게 느 껴지던지. 1시간 짜리 영화를 억지로 늘려서 가까스러 30분 정도를 추가 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뒤로 2시간을 추가시킨 <진주만>같은 경우 도 있기는 하다)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중 드디어 성공작이 나온다고 기대가 많았지만 흥행여부를 떠나 그저 또하나의 '게임 원작 영화'리스트에 추가될 뿐이 다. 속편이야 필수겠지만 제발 감독만큼은 교체되었으면 한다. 너무 당 연한 소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