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가을 문턱에서 느낀 따스한 가족애 - 성경속 '탕자의 아버지' 모습 닮은 영화
아침 저녁으로 날씨가 쌀쌀해지다 보니 춥다는 느낌마저 든다. 가을 날씨는 시원해야 하는데, 지난 여름 너무 더워서 지쳤던 걸까. 비 내리는 휴일, 모처럼 영화관을 찾았다.
사전에 예매를 해둔 터라 안이한 생각마저 하고 있을 때, 티켓 창구에서 뒷 사람의 투덜거림을 뒤로하고 황당한 일을 당했다. 아니다, 늦은 밤 졸음 예매가 빚은 당연한 결과가 가져 온 것이다. 볼 영화가 바뀌게 된 것이다.
다행히 영화관이 멀티플렉스 상영관이라 이를 대신해 손에 들린 우리 영화가 <가족>(제작 튜브 픽쳐스, 감독 이정철)이다. TV 브라운관에서 익숙한 배우들이 스크린 점령에 나선 이 영화는 비교적 평범한 스토리에 TV 드라마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인 배우들이 출연한다.
TV 만큼이나 인터넷 동영상 브라우저가 친숙해졌던 걸까. 두 부녀의 나즈막한 독백으로 긴장감을 키워 기억되었던 영화 <가족>의 동영상 예고편이 떠올랐다. 차갑게 정면을 무표정하게 응시하는 정은(수애 분)은 아버지(주현 분)를 많이 닮았다. 동생 정환(박지빈 분)에겐 따스한 웃음을 가진 누나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수애 - 그녀를 드라마 <회전목마>의 눈물 많은 진교나 <4월의 키스>의 씩씩한 캔디걸 채원으로 생각했다면 이 배우의 스크린 진출은 성공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 초반부터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정은의 모습은 왠지 그늘이 많아 보인다.
주현 - 흔히 마음씨 좋은 동네 아저씨나 특유의 말투로 연속극에서 많은 웃음과 눈물샘을 자극했던 그가 무표정하고 과묵한 어투로 변신, 딸 지은과 웃고 우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삭발한 아버지의 모습도 왠지 중후만 멋이 느껴진다.
엄태웅 - 극중 보스의 그림자 노릇을 하는 2인자. 스스로 엄정화의 동생이 아닌 배우 엄태웅으로 평가 받고 싶다는 모 영화주간지의 인터뷰 때문인지, 아니면 최근 끝난 SF 드라마 <구미호 외전>의 사준이 기억났는지 동수의 활약을 기대했다.
박지빈 - <가족>에 이어 <안녕, 형아>의 주연으로 발탁된 아역배우는 마치 오래전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옥희나 <집으로..>의 상우처럼 너무 영악한 아이로 영화 속에서 아버지와 누나의 갈등을 해소하는 윤활유가 된다.
뒤죽박죽 된 한 가족의 가족사를 바로 돌려 놓으려는 것이 이 영화의 의도였다는 듯, 막 보호관찰로 출감한 딸과 한 쪽 눈을 못쓰는 아버지의 갈등이 주변 인물들에 의해 초반에 해소되어 버린다.
오히려, 기존의 영화나 드라마처럼 후반부에 '깜짝쇼'를 하는 것보단 아예 전제를 하고 시작하는 것이 쌀쌀한 가을 날씨에 가슴을 훈훈하게 하기엔 더 충분했으리라. 주변 등장인물이 내 뱉는 대사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가족의 과거사를 제외하더라도 '조금 더 개연성있는 상황을 몰고 갈 수도 있었을 텐데'하는 아쉬움이 든다.
영화 속의 캐릭터는 정말 우리 주면에 있을 법한 소시민들의 얘기이다. 현대화 되어가는 오늘날 '가족' 해체의 위기는 그 동안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비춰 왔다. 하지만 극 중 지은에게 감정 이입이 될 수 있는 것은 영화 <오! 브라더스>의 에피소드에도 등장하는 한 가족의 에피소드처럼, 지금도 어디선가 가족 품에 돌아오지 못하고 지은과 아버지처럼 가슴 아픈 이야기들을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은 그런 가족들을 위한 영화이다.
"다신 내 인생에 관여하지 마요"
사춘기 시절, 누구나 한번 쯤 해 봤음직한 말이다. 내겐 좀 더 늦게 찾아왔던 질풍노도의 시기, 정은에게 아버지는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아픈 상처와 기억으로 얼룩진 대상이다. 영화는 왜 정은이 범죄조직에 발을 들여 놓고 아버지와 극한 대립만을 일으키는지 설명해주지 않는다. 극 중 부모와 대립을 일으키는 주인공들이 탈선의 길을 걸었던 수 많은 드라마와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이 정도 사건의 개연성은 오히려 눈물샘을 자극하는 감정 몰입에 방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조직에 한번 발을 들이면 헤어나오기 힘들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한 영화 <가족>, 조직의 자금을 빼돌린 혐의로 지은에게 가해지는 일방적인 폭력은 관객의 감정과 가족의 동질감을 하나로 묶는 기폭제가 되어 영화 속 지은의 변화를 예고한다.
조직의 보스 앞에서 무릎 꿇는 아버지, 그리고 영화 후반부 결정적 장면...영화 속 아버지는 신약성경 누가복음에 나타난 '탕자의 비유'에 나타난 아버지와 많이 닮아 있다. 자식이 밖으로 나갈 때 그냥 두고, 돌아오길 기다리며 자식이 돌아오자 기뻐하는.. 비록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아버진 정은이가 바로 살기를 원하며 기뻐했으리라.
오래 전 영화 <선물>처럼, 이 영화 역시 말로 표현 못하는 부녀간의 사랑이 회복되어 갈 즈음, 지은에게 위기가 닥쳐오고 아버지는 다시 범죄에 가담하지 말라고한다. 하지만, 누구보다 딸을 잘 아는 아버지는 아들 정환에게 술을 따르며 소주잔을 기울인다.
백혈병으로 투병으로 인해 빠지는 머리를 감추려했던 아버지의 가발이 벗겨지고 부패 관료에게 지은을 매춘 거래하려는 보스의 음모가 드러나면서 절정에 치닫는다. 조직의 보스가 등장할 때마다 가족에겐 위기가 오고, 그 동안 말 없이 엇갈린 아버지와 딸의 감정대립은 아버지의 맹목적 희생으로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남긴다.
TV 브라운관의 스타 수애는 반항아 기질과 상큼한 웃음을 동시에 지닌 딸 정은으로 변신에 성공한 듯 보이고, 그 동안 영화 속 감초 역할을 해왔던 주현씨는 무표정하지만 가슴 뭉클한 아버지의 모습을 잘 소화해 냈다. 동생 정환으로 나온 박지빈은 영악한 모습이 '다코타 패닝'을 떠올리며 이후 작품에서 활약도 기대된다. 하지만, 기대했던 엄태웅은 이렇다 할 역할도 없고, 스크린에 데뷔하기엔 아직 부족한 듯 보인다.
끝까지 두 눈으로 지켜봐야 할 가족애가 빛 바랜 하지만 따스한 흑백사진 속에 담겨 있다.
/ 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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