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도시 사마리아와 포스터
유대라는 민족은, 타 민족과 확연히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바로, ‘민족적 결벽성’이다. 자신들은, 기독교와 유대교가 말하는 그 신의 선택된 민족으로서, 신성하고, 깨끗하며, 우월한 민족이라는, 나름의 자긍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반대로, 타민족을, 이민족(선택되지 못한 민족)으로 보고, 불결하고 저열한 족속으로 여기는 결과를 또한 낳는다. 다윗(다비드, david)왕과 솔로몬이 다스렸던 유대민족의 나라, 이스라엘은, 솔로몬 이후, 왕자와 신하의 왕권 쟁탈에 의해, 북국(이스라엘)과 남국(유다)으로 갈라진다. 지역 ‘사마리아’는, 이 북국의 수도-남국의 수도는 예루살렘-이다. 그런데, 북국이 먼저, 앗시리아(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면서, 그 땅은, 이민족에게 짓밟힌다. 하지만 남국은, 이후 페르시아에 정복당하면서도, 정복왕의 배려로, 이민족에 의해 더럽혀 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문제는, 남국 사람들이 북국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생겨 버린다.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민족과 피를 섞은 ‘더러운 민족’으로 여겨, 이민족 보다 더 불결하고 경멸할 짐승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검은색 재영의 “더러워? 내가 더러워?”, 하얀색 여진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이 소녀에게 돌을 던져라”-예수가 말했다-, 라는 두 포스터의 문구는, 극 중에 여진과 영기(여진의 父)에게 던져지는 질문일 뿐더러, 영화를 보려는 감상자들에게 또한 제기되는, 하나의 입문적 문제이기도 하다. 즉, 영화를 감상하면서 중심에 둬야 할 코드는, ‘더러움’과 ‘더러움에 대한 처벌’이 가능하게 만드는, ‘죄’이어야 한다. 하지만, 원조교제라는 사회적 이슈와 병리적 현상은, 영화 내에서 어떠한 직접적 제시도 없으며, 감독도 또한, 별 언급을 하지 않는다.
즉, 영화 내에서, (재영의) 원조교제는, 나중에 여진이 행하는 금기의 섹스와, 영기가 행하는, 자살에 이르게 만드는 정죄(定罪; 죄가 있다고 단정함)나 살인과 별 다름이 없는, 균등한 하나의 죄와 더러움으로서 작용한다. 더군다나, 원조교제는, 영화를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중심사건으로서 작용할 뿐, 어디에도 원조교제에 대한, 판단이나, 감독의 시각, 문제제기는 드러나지 않는다. 다시말해, 원조교제라는 것을 중심에 두고, 이 원조교제에 대한 감독의 새로운 시각을 염두하고, 영화를 읽는다면, 재영이 말하는 불교의 성녀 바수밀다는, 하나의 미친, 창녀에 불과하며, 여진이 만나는 남자들을 해하는 영기는, 아버지의 사랑과 사회적 처벌을 실천하는, 하나의 존경 받을 존재가 된다. 즉, 난해해지고, 어떻게 보면 충분히 감독의 의도를 오해할만한 꺼리를 제공한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초점의 대상이 되는 부분은 어디인가. 그것은, 사마리아를 더러운 민족이 사는 더러운 땅,으로 보는, 유다 국민들, 다시말해 결벽증 사회가 갖는 우리의 시각에 있다. ‘죄’, 더 정확히는, ‘정죄의 시각’,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는 ‘인간이 인간에게 하는 정죄의 시각’에 있다. 그리고, 이 정죄의 시각은, 나를 정죄하는 또 다른 나, 너를 정죄하는 나, 그 또는 나를 정죄하는 사회로, 확장이 가능하며, 동시에 이 문제에서, 정죄하는 주체로서, ‘내’가 벗어날 수 없는 지경을 또한 제공한다.
1. 바수밀다
재영과 여진, 놀이터에서 족발을 뜯어먹는다. 얘기 중에 재영이 족발로 머리를 긁자, 여진, “야, 드러워.”하며 말린다. 재영, “뭐 어때? 먹던건데.”하며 웃으며 말한다. ... 여진이 재영의 팔을 끌고 일어나 가버리자, 재영, 먹던 족발을 놓쳐 떨어뜨린다.
영화에서, 재영과 여진은, ‘하나’다. 하지만 동시에, 각각의 주체로서 서로 갈등한다. 이러한 구조는, 영화에서 반복된다. 재영과 여진은 물론, 영기와 여진과 잔 남자들, 영기와 여진(때론 재영)에서처럼 말이다. 영화 내에서 주체들은, 서로 간에의 소통이 꽤나 절제되어 있으며, 또한 왜곡되어 있고, 정체되어 있다. 다시말해, 서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며, 더군다나 이해에의 노력은 보이지 않은채, 각자가 각자의 말만을 내뱉는다. 이러한 갈등구조는, 절친한 친구이면서 연인으로서까지 제시되는, 여진과 재영 사이에서, 또한 발견된다.
그들이 원조교제를 하는 이유는, 함께 ‘여름방학 때 유럽으로 여행’을 가기 위해서다. 이것은 엄연한 ‘원조교제’이자, 사회에서 금기하는 병리적인 행태로서, 인정되는 충분한 이유일 뿐, 어디에도 이해와 용서의 구석은 없다. 하지만, 이러한 그녀들의 행위는, 적어도 영화 내에서는 주요하지 않다. 문제는 이 원조교제를 대하는 둘의 자세다. 물론 둘이 여행을 같이 가기 위해서, 같이 움직이고 있긴 하지만, 그들이 하는 역할은 엄연히 구분되어 있으며, 본질적으로 상반되기까지 하다. 남자와 채팅을 통해 만나고, 약속시간과 장소를 잡고, 재영의 화장을 해주며, 여관 밖에서 망을 보는 역할은, 여진이 한다. 그리고 정작, 남자와 자는 일은, 재영이 한다. 다시말해, 원조교제라는 구조에서, 섹스라는 것과, 섹스에 부가되는 사회적인 판단과 제재를 구분하고, 이는 재영과 여진이 서로 맡아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재영에 있다.
바수밀다이고 싶은 어린 재영은, 섹스라는 것에 대한 남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자신‘을 바수밀다라고 불러’달라는 말로서 드러난다. 그녀의 바수밀다에 대한 이해는, ‘행복한 섹스’를 하고, ‘그들의 모성애를 자극’하여, 그들을 구원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게 만드는 것,에 있다. 일단은 섹스라는 것에 대해 입혀진 윤리와 사회의 누더기를 제하고 바라본다면, 이러한 이해는 그다지 무리가 아니다. 이러한 하나의 성녀이고 싶은 재영은, 항상 웃는 모습이나, 죽기 전에도 자신의 집 연락처(근본)를 말하지 않는, 다시말해, 하나의 성스러운 존재로서 있고 싶어하는 행동에서, 또한 드러난다. 결국은, 섹스가 가지는 신성성을 유지하기 위해, 여진을 곁에 두게 되며, 여진‘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게 된다.
이런 재영의 섹스관은, 이해될 수 있던 없던 간에, 일단은, 영화 내에서 한번의 회의 없이, 영화 끝까지 인정받는다. 문제는, 이러한 재영에 대한 여진의 몰이해에 있다. ‘바수밀다 같은 년’이란 말이나, 자신과 잔 남자의 직업을 즐겁게 말하는 재영을 다그치는 장면이나, 목욕탕에서 ‘불결해’라고 말하며 재영의 때를 씻겨주는 모습이, 이 증거들이다. 즉, 하나이면서, 둘로서 갈등하게 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한 재영에 대한 몰이해의 이유는, 바로, 사회적인 시각에 있다. 이러한 모습은, 재영이 남자와 섹스를 하는 동안, 밖에서 망을 보는, 다소 방어적인 포즈에서 엿볼 수 있다. 즉, 재영의 섹스를 정죄하고 처벌하려는 사회를, ‘피하려는’ 자세인 망 보는 행위에서, 여진이 재영에 대해, 사회가 가지는 정죄의 주체로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더나아가, 둘의 작업을 통해 들어온 수익을 챙기는 여진의 모습은, 다소 재영을 이용하는 하나의 포주의 모습으로서 보일 수 있지만, 이것도 엄연히, 재영에 대해 행해지는 사회의 정죄의 의미에 다름아니다. 다시말해, 여진이 가지는 재영에 대한 타인의 정죄는, 섹스 이외의 모든 것을 감당하는 여진에 의해, 역설적으로 제시되고 있어, 종국에는, 여진이 재영을 정죄하는 주체, 재영은 정죄를 당하는 주체의 구조가 가능해 진다.
그런데 집고 넘어가야할 점은, 이런 정죄의 시각이, 매우 편파적이라는 것이다. 원조교제를 하는 남자나 여자아이나, 잘못을 하고 있다는 것은 똑같음에도 불구하고, 여진이나 후에 살펴보는 영기는, 그 정죄의 손 끝을, 재영과 여진은 제외한채, 이들과 잔 남자들에게만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제시했듯이, 하나로서 재영과 여진, 여진과 영기라는 구조에서 그 이유를 살펴 볼 수 있다. 즉, 자기 자신에게는 비난의 화살을 당기지 않은채, 남에게만 그 죄를 묻고 처벌하려는 자세에 다름아닌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정죄당하는 다른 나에, 그 처벌의 화살은 향하게 된다.
어쨌든 간, 이러한 정죄자 여진과 피정죄자 재영의 구조는, 재영이 죽는 그 사건에서 뚜렷이 제시된다. 재영이 남자와 섹스를 하는동안, 여진은 밖에서 망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한 남자가, 여진 곁을 지나가면서 야릇한 눈빛으로 힐끔거리자, 여진은 이 남자를 경멸하고, 서로 실랑이를 벌인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는 동안, 경찰이 뒷문을 통해 들어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지나가는 더러운 남자에 대한 혐오와, 같은 맥락으로 제시되는 망보는 행위를 통해, 뒷문을 통해 들어가는 사회의 정죄(경찰들)는, 여진의 이러한 시각에서 가능해진 것이다,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러한 정죄의 대가로-물론 잡히지는 않는다- 재영은 추락해야 했으며, 머리가 깨지고, 상태는 위급해진다. 여진이, 재영을 죽였다.
여진의 이러한 정죄의 시각은, 실은 이전에 재영이 만난 음악하는 오빠에 대한, 여진의 혐오에서, 또한 드러난다. 재영과 그 남자에서의 섹스에서는, 재영이 바라는 것처럼, 행복했으며, 그의 모성애를 자극해서, 그를 구원에 이르게 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간에, 그는, 단순히 즐김의 대상을 넘어, 이들에게 저녁을 사주고, 집에까지 바래다 주겠다는 말을 하게 됨으로서, 재영과의 만남에 대한, 나름의 실천적 자세를 취한다. 일단, 재영의 섹스에 대한 신성한 시각은 둘째치고라도, 재영과 그 남자의 만남은, 원조교제가 아닌, 하나의 만남의 모습을 이끌어 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남자에 대해 취하는, 여진의 호전적이고, 경멸의 자세는, 원조교제라는 것에 대한 사회의 정죄의 시각에 다름아니다. 그래서, 남자는 모멸감을 느끼고, 재영을 내려둔채 떠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한다. 다친 것이다.
다시말해, 여진으로 제시되는, 타인과 사회의 정죄의 시각은, 재영을 죽음으로 내몰고, 그 남자가 재영에게로 오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여진은, 그 처벌로, 친구이자 연인인 재영이 죽어야 했으며, 그 남자에게 자신의 순결을 바쳐야 했다. 즉, 정죄하는 시각이, 오히려 죄를 낳는 문제며, 처벌받아야 한다, 라고 정리할 수 있는, 이러한 감독의 인간에 대한 인식은, 후에, ‘사마리아’라는 챕터에서, 영기를 통해 극단적으로 제시된다.
2. 사마리아
더러운 xx, 지 딸 보다 어린애 구멍이나 파고, x x도 그러지 않아. 너 같은 놈 때문에 세상이 미쳐가는 거야!
이 챕터에서, 여진은, 곧 재영이다. 여진은, 두 이유로서 재영에게 미안할 수 밖에 없다. 즉, 여진에 대한 정죄와 몰이해의 시각으로서, 여진을 죽음으로 내모는데, 주동, 아니면 적어도 동조를 했다. 또 한가지는, 재영의 섹스를 불순하게 만드는, ‘돈’과 ‘다이어리’라는 기제를 관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진의 문제 이해는, 두가지로 그 해결의 길을 모색한다. 재영이라는 이름으로 여태껏 자온 남자들과 다시 자는 것이며-이로서 여진은 곧 재영이 된다-, 재영과의 섹스에의 ‘대가’를 그들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다시말해, 이를 통해 재영과 여진의 섹스는, 재영이 바라는 바수밀다의 섹스를, 적어도 닮을 수 있는 이유가 되고, 이것은 곧, 여진의 재영에 대한 이해의 포즈가 된다. 그래서, 여진과 다시 섹스를 하는 남자들은, 등을 돌렸던 자기 딸과의 저녁약속을 이끌어내며, 모두 이해하며 살아야지라는 반성과 인류애적 의지를 만들어내고, 비웃음 당해도 싼 자신조차 안아주는 여진에게서, 어머니의 편안함을 느끼는 등, 곧 바수밀다와 잔 남자들처럼 되어버린다. 결국, 재영의 바수밀다로의 길은, 여진에 의해 완성된다.
하지만, 이 챕터에서의 주인공은, 영기다. 제목이, 정죄하는 시각의 뉘앙스가 풍기는, 사마리아인 것도 그 이유다. 이 챕터에서도, 앞 챕터의 구조를 따른다. 여진과 재영은 하나로서, 동시에 갈등하는 둘이며, 나아가, 정죄자와 피정죄자의 구조다. 하지만, 정죄자의 시선은, 다른 하나(재영)가 아닌, 남자들에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결국 이것은 재영을 정죄하는 시각이 된다. 챕터 ‘사마리아’에서도, 재영은 여진으로 바뀌고 여진이 영기로 바뀌었을 뿐, 똑같은 구조를 갖는다. 하지만 그 중심 코드는 다르다. 곧, 남자들에 대한 정죄자, 영기의, 정죄와 처벌이다.
자기 딸이 한 남자에게 안겨 있는 장면을 본 이후, 영기의 편파적인 정죄는 시작된다. 그리고 그 강도가 점점 세어져 감은, 주지된 사실이다. 처음에는, 뺨을 때리면서, 뭘 잘못했는지 깨닫게 만드는 훈방에서 시작하지만, 저 여관에 들어가면 병으로 찔러죽이겠어,라는 위협으로 넘어가고, 돌을 던지는 행위로서 야유하고 상해를 기도하기 까지한다. 더군다나, 자신이 사랑하는 딸에 대한 실망과 증오를 가지게 됨으로서, 고뇌하고 애통해 한다. 이러한 정죄는 곧 극단으로 치닫는다. 한 남자에게서 용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의 가족 앞에서 수치를 줌으로서, 그 남자를 자살하게 한다. 가족 앞에서 뺨을 때리며 수치를 느끼게 하면서, 들먹인 당신의 딸은, 오히려, 영기 자신의 정죄의 모습이 매우 과도한 것임을, 관객에게서 이끌어낸다. 다시말해, 아무리 영기라도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데, 영기는 오히려 한걸음을 더 내딛는다.
살인이다. 그 살인 장면을 살펴보면, 처음에는 수갑으로 상해를 입힌다. 수갑은, 손을 포박해서 체포하는 도구이지, 그 날카로운 면으로 몸에 상처를 낼 흉기가 아니다. 결국, 피정죄자의 반항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영기는 곧 나가서, ‘돌’을 들고 와서는 남자를 내려쳐 살해해 버린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라는 말을 상기시킨다. 영기는 정죄의 이름으로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결국은, 정죄도 결국은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는다는 것을, 몸소 내지른다. 그리고 확인된다. 누구도 인간을 정죄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살인은, 곧, 재영에 대한 살인이다. 여진으로 재현현된 재영은, 철저히 바수밀다여야 했다. 즉, 자신과 잔 남자들은, 새로 태어나 새로운 생을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 남자를, 정죄와 몰이해의 시각인 영기가 ‘살해함’으로서, 바수밀다의 삶은 결국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래서 여진은 상실감을 느끼며, 시체를 떠나올 수 밖에 없었으며, 다이어리는 버려진다. 재영을 죽게 만든 여진처럼, 여진을, 정확히는 재영을, 영기는 또한 죽이게 된다.
앞에서 재영이, 돈과 다이어리를 태우려다, 자기의 잘못과 우매함을 깨닫는 것처럼, 영기도 여진이 버린 다이어리를 보면서,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된다. 앞에서 재영의 피를 씻으며 운 여진처럼, 자신이 죽인 남자의 피를 씻으며 우는 영기는, 여진과 화해를 모색한다. ‘소나타’의 시작이다.
3. 소나타
테레사 수녀 알지? 이탈리아 바티칸 성당에서 기적을 행하는 성녀로 인정 받았어. 테레사 수녀는 살아 있을 때, 실제로 안수기도로, 많은 사람을 치료 했는데, 그 기적을 바티칸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거야.
이 챕터는,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불쑥, 끼어들어버린다. 갑자기 엄마 산소에 가고, 시골 구경하러, 한 밤에 불쑥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도, 여진이, ‘바수밀다’라는 것에서, 재영과 화해와 소통을 모색했던 것처럼, 영기도 여진에 대해, 이러한 기회를 가지려 했던 것에 불과하다. 덧붙여, 원조교제를 한 자신의 딸(그리고 재영)과, 살인을 저지른 자신, 이 둘의 문제를 또한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죄자와 피정죄자의 위치가 아닌, 아버지와 딸, 바수밀다와 상처투성이 남자로 제시되는 인간과 인간으로서의 관계가 필요했다. 그래서, 정죄를 구심으로 하는 관계를 강요하는 ‘사회’가 아닌, ‘엄마 산소’와 ‘시골’이란 장소가 필요하다. 그래서 그들은 여행을, 최고로 적절한 시기에, 갑자기, 떠난다.
엄마산소는, 말했듯이, 영기와 여진을, 아버지와 딸로서 인식하게 만든다. 김밥은 생生을 생각게 한다. 산소에 떨어뜨린 김밥은, 죽은자는 먹지 못하는 것처럼, 또한 곧, 살인으로 인해, 사형을 선고받을 영기가 자해하듯 마구 꾸겨넣다 토하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영기는 어쩌면 후회를 했을지도, 홀로 남을 여진을 슬퍼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구 쑤셔넣다 토해버리는 김밥은, 영기와 여진의 정체된 관계와 그들의 삶을, 가르키고 있을 수도 있다. 나중에 내리막길 장면에서, 돌 무더기에 바퀴가 빠져 나오지 못하는 모습에서도, 정체적 상황이 제시된다. 이는 영기가, 여진의 원조교제와 자신의 살인에 대한 인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진의 행동은 주지할 만 하다. 마구 김밥을 입에 집어 넣는 아빠에게 물을 건네거나, 토하는 영기의 등을 뚜드려 준다거나, 바퀴를 막고 있는 돌들을 헤쳐내거나, 자신이 깐 고구마를 먼저 영기가 먹게 하는 등, 다소 정체에 포기하고 회의하는 영기의 태도와는 상반되게 움직이고 있다. 즉, 가족의 와해 속에서 고뇌하는 한 남자를 위로하는, 한 성녀(바수밀다든 테레사 수녀든)의 모습을 우의적으로 읽어낼 수 있다.
영기는 이러한 여진을 보면서, 그 소통의 빌미를 찾아낸다. 영기가, 나룻배 앞자리에 앉아 들어오는 물을 만지고 있는 여진의 뒤로 다가와, 슬며시 물이 빠져나가는 뒷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여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장면은, 이 둘의 소통, 정확히는 영기의 여진에 대한 이해가, 흐르는 물처럼 이해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여진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지고, 자기 전에, 테레사 수녀 이야기를 하면서, 여진에 대한 이해와 재영에 대한 인정을, 말하게 된다. 이 말을 들은 후, 밤에, 밖에서의 여진의 울음은, 한 딸로서 아버지를 슬프게한 자신에 대한 후회와 애통일 것이다.
이제는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이미 자신의 살인으로서, 인간이 하는 정죄가 얼마나 우매한 것인지 확인했으며, 이곳에서, 딸로서의 여진, 인간으로서의 여진을 확인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영기는 알고 있다. 자신은, 살인을 한 죄, 나아가 주제넘게 정죄를 한 죄의 대가를 추궁받아 처벌 받을 것이며, 그것은 사형일 것임을 말이다. 그래서, 강 속에 잠긴 바위처럼, 강 가운데 세워져 있는 차에서 잠든 이 가족은, 아직도, 정체되어 있다. 그리고 그 몫은, 이제 바수밀다도 테레사도 아닌 어린 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아버지에게 남겨져 있다.
이 정체에 대한 해결 방향은, 두가지로 제시되고 있다. 그 하나는 여진의 꿈이다. 여진을 죽여 땅속에 묻고, 이제 자신도 체포되어 사형당하길 기다리는, 다시말해 가족의 와해와 파괴다. 하지만 이러한 영기의 행위는, 정죄자로서의 모습과, 여진과 재영을 이해하지 못한 채 나올 수 있는 결론에 다름아니다. 여진을 죽이는 것은, 정죄자로서의 행위의 느낌을 지울 수 없으며, 땅속에 묻은채 헤드폰으로 음악을 틀어주는 행위는, 아끼고 보호해야하는 존재로서의 자기딸을 인식하고 있음-그래서 정죄가 가능한-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산소’와 ‘시골’은 영기를 변하게 했고, 그래서 이러한 해결은 한 어린아이의 철없는 꿈이 불과하다. 그것도 파란 배경의 슬픈.
그래서 영기는 두 번째 해답을 제시한다. ‘살아가게,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자수한 채, 남은 시간을 여진에게 운전을 가르치는 일에 헌신한다. 이는 전형적인 사랑의 아버지의 모습일 뿐더러, 더군다나 하나의 인격체로서 딸이라는 타인을 대하려는 인간적인 자세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상황을 이끌어내는, 영기의 인식이다. 사회 내에서 정죄자나 피정죄자의 위치가 아닌, 보다 근본적으로, 아버지와 딸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로서, 서로를 바라보고, 판단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거다. 이는 곧, 영화가 주는 주요한 메시지이다.
0. 가야할 길
마지막에 영기를 뒤따라가는 장면은, 그 의미가 다소 복합적인 듯 하다. 즉, 차를 몰다 바퀴가 빠져버린 상황은, 원조교제라는 죄를 진, 여진의 상황으로 해석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이야기의 흐름에 맞지 않는 뜬금없는 결론에 다름아니다. 그래서 다른 해석이 필요하다. 일단, 장면들을 살펴보면, 영기가 사라지고, 저기 지프가 한 대, 이곳을 떠나가는 모습을 보자, 여진은, 그 지프에 영기가 있음을 직감한다. 그래서 차를 몰아 지프를 따라가려 하는데, 나가는 모습을 보면, 영기가 만들은 ‘길’을 따라서 간다. 그냥 바로, 길로 직행해도 되는 것을, 여진은, 굳이 영기가 만든 길을 달려서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지프를 따라가면서, 마주 달려오는 지프를 피해 돌아간다. 그리고, 중간에 진흙땅에 바퀴가 걸려, 더 이상 지프를 따라가지 못한다.
일단은, 여진이, 차를 몰 수 있는,하나의 성장한 인간으로 보아야 하며, 영기가 체포되어 있는 지프나, 마주오는 다른 지프는 ‘정죄’라는 개념이자 주체들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즉, ‘정죄’라는 것은, 더 이상 반복되지 말아야할-영기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처럼- 무엇이기도 하고, 다시는 자신이 ‘피정죄자’가 되지 말아야할-마주오는 지프를 피하는 것처럼- 무엇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조교제에 대한 비판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인가하는 질문이 남는다. 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질문에, 재영의 바수밀다, 영기의 여진과 재영에 대한 이해, 그리고 시골 산장 밖에서의 여진의 울음으로, 대답하고 있다. 그리고 오히려, 내가 말하려던 것은 그게 아닌데,라고 말하는 감독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것은 원조교제라는 것에, 바수밀다라는, 정말 상반되는 개념을 넣어 버무린 것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도 있다.
정말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러한 ‘잘못’이라는 것들에 대한 변명도, 새로운 인식도, 그래서 나오는 새로운 윤리적 기준도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것들을 자신의 기준으로서 바라보고, 하나의 ‘죄’와 ‘더러움’으로 치부해 버리고, 처벌하려하는, 사회의 우매하고 상처주는, 인간으로서 주제넘는 시선이, 얼마나 부당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런 시선이, 재영과 남자들을 죽게 만들고, 여진을 홀로 남겼으며, 영기 자신이 자신을 파멸로 이끌지 않았냐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재영이, 상처를 받아, 병리현상에 집착하는 남자들을, 안아 위로하려는, 바수밀다적인 자세는, 그 남자들에 대해서, 철저히 정죄의 칼을 휘두르는 영기의 태도에, 완벽히 상반된다. 즉, 재영의 섹스에 대한 몰이해를 통해, 우리의 일반적 몰이해에 대한 회의를 이끌어내며, 영기의 정죄, 나아가, 인간의 정죄가 얼마나 잔인한 것인가를 드러내기도 하고, 오히려, 이러한 정죄의 시선을 위로하기도 한다. 그래서, 영기도, 테레사 수녀를 성녀로 ‘인정’한 바티칸 성당이 될 수 밖에 없다. 재영의, 다소 난해한 섹스에 대한 견해는, 이런 식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견해는, 영기의 정죄의 시선에 대한 방향성을 가질 뿐, 자체로서는, 원조교제라는 것에 대한 이해 코드가 될 수 없다.
본 글에서 하도 인간, 인간 했기에, 그렇다면 정죄는 오히려, 신이라는 절대적 존재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며, 극단적으로, 인간은 절대 정죄해서는 안돼,라는, 다소 무정부주따위를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는, 정죄의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나에게, 너에게, 그 사람에게, 어떠한 포즈를 갖춰야 하냐는 것이다. 영화는, 그 질문과 함께, 여러 꺼리 들을 제시했다. 자,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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