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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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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취인 불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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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me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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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5-24 오후 1:02: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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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파란 대문'을 깨치고 '야생동물 보호구역'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악어'는 차디찬 똥꼬털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려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엽기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거칠것없이 까발리는 님의 이야기에 귀먹고, 반추상적인 님의 화면에 눈멀었습니다. 영화도 사람의 일이라 볼만 할 때에 미리 쉣스러울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쉣무비는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똥꼬는 새로운 낙담에 움찔거립니다.
그러나 쉣스러움이 쓸데없는 혹평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부딪쳐 넘어야 할 채찍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똥꼬아림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실제상황'에 똥침을 놓습니다. 우리는 볼만 할 때에 쉣무비를 염려하는 것과 같이 쉣무비일 때에 다시 걸작으로 승화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수취인 불명'은 님의 '섬'을 휩싸고 돕니다.
기본적으로 나는 김기덕에게 우호적이다. 물론 그의 영화에 우호적이긴 하지만, 그보다는 그의 영화작업에 더 우호적인 편인 것 같다. 그는 울나라에서 몇 안돼는 저예산 B급 영화의 기수로서, 여타의 허접무비들이 편집증적으로 집착하는 제작비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순전히 영화적 상상력과 쌩노가다로 묵묵히 자신만의 독특한 영화세계를 구축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김기덕의 영화는 관객에게 두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게 만든다고 한다. 광적으로 찬양하거나 질릴 정도로 씨바거리거나. 그래서 평론가들의 평가도 극과 극을 달린다.
그것은 김기덕의 영화가 가지고 있는 태생적 한계 탓이기도 하지만, 그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그가 택한 전술이 너무 충격적이며 엽기적인 탓이기도 하다. 건방지게도 나는 그의 화법을 충격적이며 엽기적인 '전술'이라고 했다. 이왕에 건방져진 것이니 좀 더 냉정하게 말한다면 지금까지의 그의 영화는 그 한계를 극복하려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고 좀 더 냉철하게 말한다면 그 과정이 그리 성공적이라고 할 수도 없다. <악어>를 비롯해서 개인적으로 가장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평가하고 싶은 <섬>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화는 줄기차게 강렬한 이미지와 독특한 실험정신으로 무장한 대안영화로서 자리매김은 했으나, 그 자리에서 일보도 전진하지 못한 채 허부적거리기만 했다.
아무리 강렬한 이미지와 독특한 실험정신으로 무장하였다 할지라도 그것 자체가 영화의 완성도를 담보할 수는 없다. 김기덕의 영화에서 결정적으로 부족한 것은 사실감이다. 엽기코드에 따른 비현실적 상황이 비사실적인 건 당근빠다구이지만, 그 비현실적인 것이 현실감있게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필연성이 이야기의 흐름속에 존재해야만 한다.
너무나도 고차원적인 단서라서 셜록 홈즈나 명탐정 포와르가 아니면 추리해내기 곤란한 인물들의 행동양식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리가 흔히 전문용어라고 지칭하는 씨바, 졸라, 10쒞이, 존나, 개쉐히 등 대부분의 사람들이 입에 달고 살면서 막상 그것을 철자에 맞춰 문자화하거나 격음, 경음, 연음화현상을 충실히 반영하여 발음하였을 경우에 경기들린 반응을 보이는 용어들의 지극히 사실적인 사용이 그 개연성을 대신해 주지는 못한다.
<터미네이터>나 <메트릭스>가 사실감을 획득한 건 단순히 테크놀러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테크놀러지가 꼭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 사용되었기 때문이고(우리는 테크놀러지의 과신에 따른 과잉이 결국 재앙의 쉣가루가 되어 천지를 뒤덮는 것을 <용가리>나 <리베라메>를 통해서 목격한 바 있다.), <샤이닝>이나 <배트맨>(물론 팀 버튼의 <배트맨>이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광기가 사실감을 획득한 건 단순히 상징이나 은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영화적 메타포가 영화의 내러티브안에 철저하게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김기덕의 영화에 테크놀러지는 없다. 엽기적인 상징과 은유를 그는 반추상으로 설명하려 하지만 내러티브안에서 유기적으로 살아있지 못한 그 반추상은 어거지처럼 들릴 뿐이다. 김기덕 영화 중 최고의 제작비를 들였다는 <수취인 불명>은 안타깝게도 그 어거지 역시 짜증스러울 만큼 유치찬란한 최고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가 김기덕의 영화를 보고 나서 늘 느껴왔던 그 찜찜함, 뭔가 절라 신선하고 실험적이며 깊이있는 영화를 본 듯 하기도 한데 역시 또 뭔가가 절라 얄딱꾸리한 느낌, 화장지도 없는 화장실에서 떵 때리고 나왔는데 손도 안 씻은 느낌의 정체를 까발려 버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김기덕의 영화를 봐야 한다. 왜... 일까?
도올 김용옥이 마침내 더는 티비를 통해서 논어강의를 하지 못하겠다면서 일본으로 출국해 버렸다고 한다. 나는 인간 김용옥에 대해서 잘 모른다. 개인적으로는 인간 김용옥에 대해서 더 잘 알 기회가 온다면 마다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인간 김용옥에 광분하는 빠순이가 되고 싶지도 않다.
항간에 떠도는 인간 김용옥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들을 접하기도 한다. 유학자이자 교육자로서 티비라는 대중매체를 통해서 천박하기 이를데 없는 언사를 남발하며 강의랍시고 혹세무민하는 행태를 들쑤시는 것에서부터 교육자 김용옥으로서 주장했던 '가르침'을 인간 김용옥으로서 스스로 실천하지 않고 있다는 정황 증거들을 들이대면서 과연 그 '가르침'이 얼마나 진실한가라는 냉소적 회의론과 유학자 김용옥이 주장하는 공자와 논어의 해석이나 그 이전에 노자의 해석에 대한 전혀 상반된 해석을 통해서 유학자 김용옥이 곡학아세하고 있다는 썰도 있다.
무엇보다도 도올 김용옥을 잡아 먹지 못해 안달을 하는 무리들은 기독교인들이다. 논어 강의를 시작하는 초기에 김용옥이 공자의 삶과 예수의 삶을 비교하면서 성경을 인용하다가 성모 마리아를 희화화해서 표현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렇잖아도 김용옥이 성경의 내용을 들춰내는 것에 쌍심지를 켜고 있던 기독교인들에게 기름을 붇는 격이 되어 버렸다.
결국 김용옥은 그 이후에 예수는 고사하고 성경의 성짜도 입에 올릴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가 예수뿐 아니라 성경을 모독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진위 여부를 떠나서 그는 더이상 서양의 역사와 동양의 역사를 비교 분석하여 공자와 논어가 가지는 가치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돼야 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게 되었다.
참으로 많이 답답한 세상이다.
그런데 이제 김용옥은 그 반쪽짜리 강의 마저도 더이상 하지 않겠다고 한다. 나는 인간 김용옥을 모르기 때문에 그가 어떻게 실제의 삶을 살고 있는지는 모른다. 그가 그렇게 욕을 먹을 만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위선의 덩어리요 독선과 독단으로 충만해 있는 가짜 지식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를 비판하는 모든 줄기가 결국에는 인간 김용옥에 대한 신랄한 욕으로 귀결된다는 점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든 그의 설명이 납득할 수 없다고 이의를 제기하든 그의 불완전한 사람됨에 대해서 주저리 주저리 늘어 놓든 결국 그 모든 것은 인간 김용옥이 얼마나 형편없이 나쁜 넘이냐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럴수도 있다. 그는 정말로 나쁜 넘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가 논어 강의를 통해서 전파하고자 하는 그 '가르침' 만큼은 우리 모두가 절실하게 받아들여야만 할 진실이라고 믿고 싶다.
그가 티비를 통해서 강의하고 있는 그 순간에 흘리고 있었던 그 땀의 의미를 나는 믿고 싶다. 우주적 테크놀러지와 광속으로 치닫는 세상의 변화 속에서 이천 오백여년 전에 세상으로부터 왕따 당했던 한 유학자의 '가르침'이 의미하는 바를 절절히 상기시키느라고 쉬어 터져가는 그 목소리의 진실성을 믿고 싶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진실성보다는 그의 강의가 '권력화하고, 찬반의 희롱물이 되어가고, 시세의 상품이 되어가며, 반복의 나락 속으로 떨어져' 가게 팽개쳐 둠으로써 '도올 김용옥이라는 인간'을 '소외'시키고야 말았다.
논어 강의를 하는 중에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이 거론된 적이 있었다. 해월 최시형의 인간 됨됨이를 소개하면서 우리는 그렇게 훌륭한 사람들을 박해해 왔다는 이야기를 하는 중에 해월의 말년 사진이 화면에 등장한 적이 있었다. 깡말라 비틀어져서 피죽도 못 먹은 듯한 처연한 모습의 할아버지가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그 가련한 할아버지를 우리의 역사는 목을 잘라서 반역자라는 이름으로 효수해 버렸다. 그가 주장한 것은 사람을 사람답게 대우해 달라는 것 뿐이었는데... 그가 실천한 것은 그 스스로가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타인을 먼저 사람으로 예우해 준 것 뿐이었는데...
참으로 참으로... 많이 답답한 세상이다.
<넘버 3>의 감독 송능한은 <세기말>에서 영화 평론을 업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영화를 밥그릇으로 보지 말고 진실한 애정을 가지고 대하라는 요지의 직격탄을 날리며 개기다가 십자포화를 두들겨 맞았다. 송강호의 '배.. 배신이야'만을 기대했던 철없는 관객들 역시 <세기말>을 '소외'시켜 버렸다.
얼마 전에야 송능한이 캐나다로 이민 가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불현듯 씨랜드 참사로 금쪽같은 자식을 잃고 나머지 자식들 마저 잃고 싶지 않아서 이민 가 버린 어느 올림픽 메달리스트 어머니가 생각이 났다.
왜 우리는 아까운 사람들을 우리 곁에서 떠나 보내기만 하는가?
개인적으로 나는 기록적인 대박을 터트리고 있는 영화 <친구>가 그처럼 논란의 예민한 귀두가 돼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 상대적으로 저평가되었으나 상대적으로 잘 만들어진 영화 <파이란>이 상대적으로 '소외'당하고 있는 것이 더욱 내 심사를 불편하게 하여 상대적으로 <친구>에게 더 냉소적인지도 모른다.
바로 이 지점의 나에게 김기덕의 <수취인 불명>이 덩그라니 놓여 있다. 시사회를 통해서 인간 김기덕을 만날 수 있었다. 열심히 찍었으니 재밌게 봐 달라면서 살짝 웃는 인간 김기덕의 진실성을 나는 믿는다.
비록 그의 영화에 리얼리티가 떨어지고 5편의 장편 극영화의 관객수가 <친구>의 일주일 관객수보다 적지만, 그의 영화는 언제나 그 어떤 영화 못지 않은 치열한 고민과 방황의 흔적이 있다. 이런 영화가 계속 살아남지 못한다면, 김기덕과 같은 사람이 더이상 영화를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쉬리>와 <공동경비구역JSA>그리고 <친구>로 이어지는 기록적인 숫자헤아리기의 강박증에서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어떤 영화를 봤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다양한 영화가 우리의 극장에 간판을 거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나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좀 더 다양한 영화가 끊임없이 배출되기 위해서는 아까운 사람들이 영화판을 떠나는 것을 방치하는 관객들의 직무유기가 수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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