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완전정복- 시대의 아이러니가 낳은 코메디
요즘 보면 영화보다 세상이 더 개그스럽다. 대통령의 재신임을 비롯하여 맨날 치고박고 싸우는 정치인들 하며, 찌라시들의 뻥튀기나 사회 면의 끔찍한 사건들, 전 대통령의 재산이 내 용돈만하다는 것이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 정말 웃기지 않는가? 영화의 유치함이나 허구성은 이런 현실에 비하면 충분히 눈감아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다소 빈약하고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개그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영화를 우리의 현실을 떠올리며 웃을 수 있다. 이 영화는 지금 우리네 현실을 너무나도 파고드는 극사실주의-_-코메디이기 때문이다.
평범한 공무원에게조차 들이닥친 영어열풍은 영화적 설정이 아니다. 그녀가 찾아간 영어학원에서 만나는 캐릭터들 모두 생생히 살아있다. 백화점에서 일하는 세일즈맨이나, 자식과 외국 여행을 가기 위해 영어를 배우는 엄마의 모습, 학원을 몇 군데나 옮겨다니는 학생도, 단어는 줄창 외워도 회화는 죽어라 안되는 과장님도, 정말 바로 옆집에서 볼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기본적 설정만 그러한가? 조금은 과장된 눈물과 감동을 안겨주는 소스인 입양아의 이야기나, 공무원이랍시고 좋아하시는 어머니의 모습, 사대주의에 빠져있음을 직빵으로 날리는 대사나 반말을 찍찍 하는 외국인도 딱 지금의 세상이다. 그래서 지금 영어학원을 다닐까 말까 고민하는 나에게도, 무시당하고 살지 않으려고 애쓰는 부모님 세대에도 이 영화는 똑같이 다가올 수 있다.
전반적으로 연애담을 지향하는 스토리이긴 하지만 봄곰에서의 그것처럼 줄창 그들 사이에만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들 사이의 관계의 진전이 목적이지만 - 그보다는 조금 더 깊은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어하기에, 그래서 그들 사이의 사랑은 주변 사람들과의 삶을 바탕으로 하기에 마지막의 그들의 애정행각조차 (앗 스포일러) 모두가 웃으며 지켜봐줄 수 있다.
영주가 고민하는 평범함에 대한 단상은 새삼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삶이 조금은 특별하길 바란다. 영어를 공부하는 것도 그 맥락 안에 있다. 그럼, 영어가 얼마나 우리를 특별하게 해줄까? 실상은 얼마나 필요한지도 모르면서, 어쨌든 다들 하니까. 못하면 쪽팔리니까! 영어를 해야만 살아남는 현실에서 그들은 그저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할 수 없이 영어를 공부한다. 평범한 것이 평균이 아니라 수준 이하가 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평범함을 알면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평범하지 않으려 하고, 광만 팔다 끝낼 인생이라지만 그 말을 들으면 판을 엎고 싶어진다. 어찌 아니겠는가. 항상 태클뿐인 나의 인생에서 색다른 무언가가 찾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로또 하나에 내 운을 맡겨보는 소시민들의 마음은 한결같은 것을. 영어든 사랑이든 정복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감이 아니던가. 그리고 그 자신감만 있다면야 영어쯤은 집어치워도 좋다.
역시 계속 떠오르지만 봄날의 곰처럼 영주라는 캐릭터는 흔한 순정만화의 주인공은 아니면서도 마냥 사랑스럽기 그지 없다. 그건 실제로 이런 캐릭터가 있다면 어떨 것이라는 상상보다는 이나영이라는 얼굴 작고 눈 크고 키 큰 멋진 배우를 빼놓을 수 없기에 여기서만큼은 리얼리티가 떨어진다-_- 그렇지만 영화만으로 볼 때 그렇게 덜 섹시하고 조금은 투박하고 아주 평범해서 매력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을 것 같은 검은 캔버스화를 신은 그녀도-속을 들여다보면 빨간 구두의 공주님처럼 매력적인 구석을 가졌다는 사실을 발견하라고 영화는 관객들에게 외친다. 외계인처럼 어이없고 때로는 집요하기까지 한 그녀의 사랑스러움을 발견하는 건, 작은 관심과 애정어린 눈빛만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나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은 그 매력을 무한대로 발산하게 만들어 준다.
이야기의 후반으로 갈수록 한국코메디 영화 특유의 신파의 바람으로 인해 이 일관된 교훈은 다소 타격을 받고 아침마당에서나 흘려야 될 눈물이 나오는 바람에 당황스러웠지만, 처음부터 문수가 영어를 배우는 목적을 분명히 함으로써 혼란스럽지 않게 찬찬히 진도를 달성해 간다. 물론 간간히 숨어있는 콩글리쉬 개그와 예측못할 상황에서 주인공들의 엽기적인 행동들은 끝까지 웃음으로 마지막을 장식하게 하기에 다행히도 코메디 영화다운 면모를 끝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 커다란 안경 속에 자신의 내면을 숨기며 9급공무원 다운 무난함으로 살아왔던 그녀, 사랑이라는 기회를 통해 새롭게 자신의 욕망을 분출하는 솔직한 모습은 참 귀엽다. 박문수(-_-)가 나영주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 같은 건 좀 생략된 감이 있지만, 어쩜 이렇게 우리의 일상을 즐겁게 담아냈는지 하는 생각에 그런 것 다 잊고 깔깔거리며 무릎을 치고야 만다. 당장 내일의 수업에서 내 신발을 신겨줄 신선한 로맨스를 기대하며 삶과 영화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만드는 이 영화의 현실성에 찬성 한표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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