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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애들과 함께 본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이영순 칼럼 | 2004년 3월 25일 목요일 | 이영순 이메일

미국에 와서 영화를 보는 5년 동안 영화보다 관객들의 행동에 더 감동을 받은 건 처음이다. 밤늦은 영화관이라 그런지 관객들은 이십대 젊은층이 대다수였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은 야구장을 방불케 했다. 한쪽에선 왜 예고편 영화를 틀어주냐며 낄낄대면서 우우! 야유와 휙휙! 휘파람을 연신 불어댔다. 연인들끼리는 팝콘이 눈송이인줄 아는지 여기저기 집어던지면서 ‘러브 스토리’를 찍어대고, 그 요란한 복새퉁 속에서 코골며 잠에 떨어진 관객도 있었다.

그런데 영화상영이 시작되고 시간이 흐르자 영화관은 지하 병원에 차려진 영안실 같았다. 누군가는 흑흑 소리를 내며 울었고, 또 누군가는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잔뜩 겁먹은 얼굴이거나 오만인상을 다 쓰는 심각한 표정들 이였다. 드디어 영화가 끝났을 때이다. 영화가 한 사람만의 작업이 아님을 알려주는 길고 긴 자막도 다 올라가고 불도 환히 켜졌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망나니들은 꼼짝도 앉고 자리에서 엉덩짝을 띠지 않았다. 혹시 출입구가 너무 분비는 통에 못나가나 싶어 일어났다. 뒤 쪽 끝에 출입구는 열려져있고 몇몇은 총총거리며 나가고 있었다. 그럼 남은 이들은 뭐지. 로드 오브 링이나 매트릭스 때도 이 정도까지 사람들을 홀린 적은 없었다.

저 망나니들이 죄다 교회나 성당을 다니나. 사람들은 마치 십자가 옆에 매달린 죄수마냥 ‘주여 가능하다면 나를 기억해 주옵서서’라는 듯 묘한 침묵 속에서 꼼짝도 안했다. 그래서 영화관은 야구장에서 영안실로 다시 시골교회 예배당으로 변했다. 영화 한편이 이렇게 만들다니. 영화는 역시나 위대하단 말이야. 영화도 놀라웠지만 관객들 때문에 더 놀랐다. 그러다 잠시 후에 드디어 빠져나가면서 난처하게도 슬퍼졌다.

우리는 그렇게 사랑에 굶주리고 가난한가보다. 영화 속의 예수는 영화 속의 주인공일 뿐 실제가 아니다. 실제라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흔한 여관방만 가도 침대마냥 꼭 있는 게 성경책이다. 그 책은 전화번호부만도 못하고 멜 깁슨의 영화 한편은 멜 복음서라고 불리듯 미국사람들을 기적처럼 감동시켰다. 실제 영화 속에는 기적이 잘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 누군가는 영화를 보다가 심장발작으로 죽었고, 울음에 격분하여 난동을 부렸다. 한국에서는 <태극기를 휘날리면서>가 기염을 토할 때 여기서는 멜 복음서가 난리를 쳤다. 왜 일까.

이제까지 예수를 다룬 영화는 예수의 인성과 신성중 한 편을 좀더 조명한다. 마틴 스콜세지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은 성경적 사실보단 원작인 니코스 카쟌차키스가 만들어낸 욕망에 고뇌하는 인간적인 예수를 그려낸다. 인간처럼 연약하여서 십자가의 고통에서 스스로 내려오고 아름다운 여자와 사랑을 나누고 결혼생활도 한다. 성서속의 예수와는 거리가 먼 성서에 근거하지 않은 인간으로서의 예수이다.

<몬트리올 예수>는 모순된 인간들이 주인공이 되어 연극을 통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재현한다. 신성을 보여 주대 예수는 아니지만 그를 사모하는 인간의 나약한 한계성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제작부터 의도까지 애초부터 인성과 신성이라던 지 기적을 일으킨다던지 에 관심이 없다. 초점은 오로지 12시간동안 십자가에 매달리는 순간까지 예수가 얼마나 처절하게 고문당하는지 성경에 기초한 사실적인 사실과 장면을 보여줄 뿐이다. 십년간 영화를 준비해왔다는 멜 깁슨의 의도이자 노력이다.

간혹 멜깁슨이 독실한 카톨릭 신자여서인지 예수가 마리아와의 어린시절을 회상할 때나 예수 앞에 엎드려 자신도 죽고 싶다거나, 보다 무거워진 마리아의 역할을 빼고는 성경에 충실하다. 그래서 장면은 잔인하다. 고문과 형벌이 2시간 6분중 2시간이 넘게 나오는 케찹바다다. 메저키스트들이보면 매우 즐거워할 것 같다.

그런데 어째서 사람들은 쉽게 영화관을 뜨질 못했을까. 주마다 달마다 대작부터 B급 영화까지 감동을 주는 너무도 사실적인 영화가 얼마나 많이 쏟아져 나오는데 이 망나니들이 이렇게 얌전해졌을까.

영화관이 왜 교회 예배당으로 변했을까가 놀랍고도 신기했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나까지 하도 울어서 내가 왜 이렇게 울까 생각할 정도였다. 옆 사람에게 ‘근데요. 댁은 왜 우세요?’ 묻고 싶어서 혼났다.

영화는 단지 십자가사건만을 다룬다. 일대기가 아니다. 왜 꼭 십자가 사건만 다뤘을까.
폭력적이고 강렬한 장면들을 줄창 보다보니 애초에 게셋마네 동산에서 사탄이 예수에게 딴죽을 걸던 질문이 들었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리스도는 저리 당하고만 있을까. 그럴 가치가 있기나 한걸까. 여기에 예수는 말한다. ‘너의 적을 사랑하라. 내가 너를 사랑함같이 서로 사랑해라.’였다.

영화를 나서 집에 오면서 독일영화 < 독일인 자매들 The German Sisters > (1977)가 생각났다. 그 영화를 볼 때도 섬?거리며 울었다. 감동과는 다른 눈물이었다. 두 영화에서 나오는 인간들의 몸은 난도질된 몸이고 피범벅여진 고깃덩어리 취급이다. 한편은 고문하고 한편은 그 고문, 배신, 모욕을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나약함을 뒤로 순순히 받아들인다. 손바닥에 대못이 박힐 때 본능적으로 파르르 떨며 거부하던 예수의 손과 죽음 앞에서 파랗게 질린 테러리스트 마리안의 얼굴표정이 겹쳤다. 왜 그들은 기꺼이 그 길을 갔을까. 사랑 때문이다.
다 찢겨진 피범벅인 된 아들을 감싸 안은 마리아를 보면서 어느 해 고문 받고 죽어간 운동권 아들의 시체를 엄마의 고통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그때는 사람들이 많이 죽어갔다. 자살했고 타살 당했으며 그들은 순순히 목숨을 내어놓았다. 지금도 그렇다. 그들에게 조국은 사랑하는 대상이며 그 안에서 복작이고 살고 있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예수가 흘린 피처럼 진하고 고귀했다.

온갖 재롱을 다 떨던 망나니들이 자리를 뜨지 못한 건 그게 진짜든 거짓이든 영화를 보고난 후 자신을 위해 고통을 참는 누군가의 사랑을 느껴서라고 본다. 적어도 영화가 끝난 순간만큼은 그게 사실이라고 모두 다 믿는 듯 보였고 흠 없고 순결한 어린양 들이였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권력이 아닌 사랑이 아닐까. 권력은 인간을 독하게 만들뿐 사랑만이 인간을 바꾸게 하고 변화시킨다. 그리고 그 사랑은 자발적인 희생이 아니라면 자뻑의 변태일 뿐이다. 가난할 지라도 거짓사랑에 목말라하거나 속지 말자. 이 넓은 세상에 단 한 사람은 나를 위해 울고 있을 터이니.

3 )
apfl529
좋은 글 감사~   
2009-09-21 18:29
qsay11tem
기사 잘 봄   
2007-11-27 13:07
sweetybug
음.. 잘읽었습니다.   
2005-02-13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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