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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화된 국민 엄마보다는 낯선 배우이고파” <내 이름은> 염혜란
2026년 5월 4일 월요일 | 박은영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은영 기자]

배우 염혜란이 다시 한번 제주의 품으로 돌아왔다.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에서 강인한 제주 엄마 ‘광례’ 역을 맡아 안방극장에 묵직한 울림을 전했던 그녀가, 이번에는 영화 <내 이름은>의 ‘정순’이 되어 4.3 사건의 비극 속에 박제되지 않은 한 여성의 삶을 그려냈다. 연달아 제주 엄마라는 설정을 마주했지만, 염혜란은 결코 전형적인 틀에 갇히지 않는다. 역사의 질곡을 통과하면서도 자신만의 꼿꼿한 춤사위를 잃지 않는 ‘정순’을 통해 인류 보편적인 사랑 이야기를 전한다. “국민 엄마 타이틀은 내려놓겠다”고 웃으며, 상징화된 국민 엄마보다는 낯선 배우이고 싶다는 염혜란을 만났다. ‘전성기’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장르를 횡단하며 활동하는 그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소재가 제주 4.3 사건이다 보니 정치적인 색을 완전히 배제하기 힘든 이야기다. 배우로서 출연 결정에 부담은 없었나.
부담이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다. 사회적인 목소리를 내는 배우로 이미지가 굳어질까 고민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배우로서 개인적인 목소리도 내야 하기에 출연을 결정했다. 다만 이미지 고착을 경계해서 시사 프로그램 등에는 나가지 않고 있다. 이 영화가 정치적인 논쟁보다는 좀 더 인류애적인 차원에서 이야기가 많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작품에 참여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배우는 직접 글을 쓰고 연출하지 않는 이상 본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하기가 힘들다. 그런 면에서 이 시나리오가 좋았고, 정지영 감독님이 하신다는 점에서 숙명처럼 느껴졌다. 우려했던 점은 이 영화가 문학적·서사적 재미가 없다면 단순히 ‘선동하는 영화’에 불과할 것이라는 점이었는데, 다행히 선동적인 면 없이 문학적인 이야기 그 자체로 다가왔다.

일반적인 상업 영화와는 주목도가 다를 것 같다. 개봉을 앞둔 소감이 남다르겠다.
관객들이 영화를 역사적 의미로만 접근해 보기 고통스러운 작품으로 여기실까 봐 걱정된다. <내 이름은>은 4.3의 고통에 집중하는 영화가 아닌, 엄마 정순과 아들 영옥의 이야기다. 영옥과 그 친구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그들의 이야기가 매우 흥미롭게 그려진다. 연기합도 훌륭하고. 실제 출연한 학생들도 촬영 전엔 4.3을 잘 몰랐다가 영화를 찍으며 찾아보게 됐다고 하더라. 이렇듯 젊은 세대에게 직관적이고 편하게 다가가면서 동시에 이 영화를 통해 역사를 알게 되는 기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제주 시사회 당시 분위기는 어땠나.
가장 감동적이었던 건, 너무 정치적인 목적으로 오신 분들보다 글을 쓰시거나 영화를 사랑하는 분들이 오셔서 나를 꽉 안아주고 손을 잡아주셨을 때다. 마음을 다해 손을 잡아주시는 온기가 너무 좋았다. 예민하고 어려운 이야기라 제주 도민들이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걱정이 많았는데, 그 따뜻한 응원에 큰 위로를 받았다.

지난 2월에 다녀온 베를린국제영화제 현지 반응도 궁금하다.
한국의 특수한 상황과 제주 사투리를 이해하실까 했는데 너무 좋아해 주셨다. "나는 소중한 사람을 잊지 않았고,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고 있다"는 리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해외에서는 인류 보편적인 사랑 이야기로 봐주셨는데, 국내 관객들도 그렇게 편안하게 봐주시면 좋겠다.

정지영 감독은 당신을 캐스팅하기 위해 ‘삼고초려’ 했다고 말씀하시던데. (웃음)
감독님과 내 기억이 서로 다르다(웃음). 영화 <소년들>에 짧게 출연했을 때 감독님과 더 긴 호흡으로 작업하고 싶다고 생각했고, 당시 감독님이 이 프로젝트를 계획 중이라 하셔서 너무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그동안 선이 굵은 남성 서사를 해오신 감독님이 그리는 여성 서사가 궁금하기도 했다. 감독님 말씀처럼 나를 캐스팅하기 위해 ‘삼고초려’를 하신 것까지는 아니다. (웃음)

캐릭터 준비는 어떻게 했나. 참고한 원작이나 자료가 있는지.
영화 <지슬>(2012)이나 한강 작가님의 ‘작별하지 않는다’ 등을 읽었다. 감독님은 이미 명확한 그림이 있었다. 제주 이야기가 독립영화로는 많았지만, 감독님은 확실한 ‘상업(대중) 영화’를 찍겠다는 의지가 강하셨다. 작가주의로 흐르지 않고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는 4.3 영화로 만들겠다는 방향성이 명확해, 기존의 독립 영화와는 결이 다른 작품이 나오겠다고 생각했다.

영화는 역사적 비극보다 일상적이고 작은 관계에 집중하는 느낌이다. 그 지점이 좋았다. 보편적인 인류애의 이야기가 되려면 역사적 영웅이나 전형적인 피해자만의 이야기가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인물들의 스토리와 사연, 그리고 아들 ‘영옥’(신우빈)과의 정다운 관계가 만들어내는 모습이 우리가 4.3을 바라보는 자세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우빈과도 우리가 정말 친구처럼 다정하게 보였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감독님께 계속 제안하며 시나리오보다 풍성하게 채워나갔다.

고백하자면, 너무 내 의견을 피력한 것 같아서 나중에 감독님께 ‘내가 너무 건방졌던 것 같다’고 사과 문자를 보내기도 했다(웃음). 감독님은 늘 열려 있는 분이다. <소년들> 때는 너무 거장이라 의견을 못 냈는데, 나중에 말씀드리니 “왜 그때 말 안 했냐”고 하시더라. 이번에는 시나리오가 집에 쌓일 정도로 수정을 거듭하며 감독님과 치열하게 소통했다. 조연출 등 스태프들의 의견까지 수용하시는 분이라 나 역시 연극 무대 경험을 살려 자유롭게 의견을 낼 수 있었다.

정지영 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나.
정말 거장이신 게, 생각이 크고 두려움이나 망설임이 없으시다. 나는 늘 갈팡질팡 고민하는데, 감독님은 오로지 이 영화가 세상에 나와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여든이 넘은 나이에(나이 언급을 좋아하시진 않는다!)(웃음) 직접 투자까지 유치하셨다. 의무감이 아닌 순수한 재미로 이 영화를 볼 수 있게 하려는 열정이 정말이지 대단하셨다.

투자와 배급 과정이 쉽지 않았다고 들었다.
사실 <내 이름은>을 제안받은 건 꽤 오래전이다. 평소 이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고, 정지영 감독님이 메가폰을 잡으신다니 투자와 배급이 바로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고 힘들더라. 아마도 제주에서는 한 집 건너 한 집이 피해자 혹은 경찰 가족일 정도로 꺼내기 힘든 이야기라 더욱 그런 것 같다. 78년이 지났음에도 왜 이 이야기를 하는 게 특정 색깔로 비치는지, 왜 꺼려지는지 생각해보면 오히려 더더욱 해야 할 이야기고 필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폭싹 속았수다>의 ‘광례’에 이어 두 번째 제주 엄마고, <마스크걸>에서도 강렬한 엄마였다. 추구하는 ‘엄마상’이 있나. (웃음)
사실 나는 ‘국민 엄마’라는 타이틀을 얻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보통 그 수식어가 붙으면 자애롭고 인내하며 희생하는 상징처럼 여겨지지 않나. 특정 인물 혹은 이미지로 상징화되기보다, 배우로서 나쁜 엄마를 포함해 아주 다양한 엄마가 되고 싶다. 그래서 ‘국민 엄마’ 타이틀은 내려놓고 싶다. (웃음)

연달아 제주 엄마를 연기하며 캐릭터 차별화를 위해 노력한 점은.
그 시대 어머니들이 질곡의 역사를 관통해 왔다는 점은 공통점이지만, ‘정순’을 단순히 역사 속 사실적인 희생자로만 보이지 않게 하고 싶었다. 정순은 아들에게만 올인하는 엄마가 아니다. 자기 생활과 삶이 있는 ‘쿨함’이 매력이다. 아직도 열심히 춤을 추는 선생님이고, 의상도 궁상맞지 않고 멋스럽다. 꼿꼿한 신체적 특징을 보여주기 위해 자세나 동작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무엇보다 정순이 한국 현대사를 몸으로 체험한 강인한 엄마라는 점보다, 현재를 사는 한 인간이라는 점이 좋았다. 어린 시절 커다란 고통을 겪었고 그 고통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사는데 큰 불편을 못 느끼지 않는 상태 아닌가. 덕분에 캐릭터에 짓눌리지 않고 나만의 해석을 담을 수 있었다.

가벼운 질문이다. (웃음) <폭싹 속았수다>의 ‘광례’가 <내 이름은>의 ‘정순’을 만난다면 어떤 말을 할까.
광례가 정순을 부러워할 것 같다. 어쨌든 자식과 오래도록 곁에 있을 수 있으니까. 비록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자식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행복이라는 이야기를 해주지 않을까 싶다.

엔딩곡을 직접 불렀다. 김민기 선생의 ‘친구’를 부르게 된 배경은.
처음 감독님이 추천하셨을 때는 싫다고 했다. 너무 명곡이라 선율이 흐르는 순간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어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유족분들이 흔쾌히 사용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내 식대로 불러보자 결심했다. 멋 부리지 않고 최대한 담백하게 불렀다. 막상 불러보니 젊은 세대 중에는 이 노래를 모르는 분들도 많아 내 걱정이 기우였음을 알았다. (웃음) 가사가 영화와 너무 잘 맞아 역시 감독님의 선택이 옳았다고 느꼈다.

얼마 전 개봉한 <매드 댄스 오피스>에서는 플라멩코를, 이번에는 한국 무용을 선보인다. 춤 연습이 힘들지 않았나.
배우가 힘들수록 관객은 즐겁게 보신다는 믿음이 있다. 춤을 배울 기회가 있으면 제대로 하고 싶지만, 짧은 시간 안에 정서를 담아내기란 참 어렵더라. 한국 무용은 플라멩코와 달리 템포가 아주 느린데, 나는 4.3의 전형적인 ‘살풀이’와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가고 싶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춤 장면이 어떤 몸짓 같은 춤사위로 남은 것 같아 만족스럽다.

그 마지막 춤사위에 어떤 감정을 담으려 했나.
진혼과 위로의 마음을 기본으로 가지고 갔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플러스 마이너스’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이야기가 과거에만 머물지 않고 젊은 세대가 앞으로 4.3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그 방향성을 품었으면 했다. 그저 슬프기만 한 진혼이 아니라, 우리가 이 사건을 이야기하는 새로운 태도에 대한 바람을 담았다.

다작 행보를 이어가며 ‘제2의 전성기’라는 평이 많다.
그간 전성기가 아니라고 부정해왔는데, 이제는 맞다고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아니라고 하면 욕심 많다는 소리를 들을 것 같다(웃음). 그런데 전성기라는 체감은 나중에 시간이 흘러 조금 힘들 때 진심으로 느끼게 되지 않을까 싶다. 사실 조연일 때는 <더 글로리>와 <폭싹 속았수다>처럼 겹치기 촬영이 가능했다. 분량이 크지 않아 잠깐씩만 가서 촬영해도 큰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주연은 오롯이 한 작품에만 집중해야 한다. 어떤 핑계도 댈 수 없고 모든 책임이 내게 돌아오니 부담이 크지만, 그만큼 집중해서 연기할 수 있다는 점은 좋다. 돈도 많이 주니까 책임져야지.(웃음).

필모가 워낙 다양한데, 터닝 포인트가 된 작품을 꼽는다면.
배우는 무엇보다 좋은 작품을 만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좋은 작품은 내가 대단한 걸 하지 않아도 큰 나무에 붙은 담쟁이처럼 그저 매달려 있기만 해도 된다. (웃음) 대중이 나를 처음 알아봐 준 작품은 <도깨비>였다. 비중이 적었는데도 미용실에서 알아봐 주시는 걸 보고 TV의 힘을 실감했다.

최근 AI 영상에 본인의 이미지가 무단 도용된 사건이 있었다.
내게 이런 일이 있다는 게 충격이었고, 공중파 뉴스에 나올 정도로 예민한 문제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처럼 기술 습득이 빠른 나라에서, 이런 상황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게 아차 싶기도 하더라. 덕분에 배우로서 기술이 구현할 수 없는 독창적인 연기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결국 관객과 직접 대면하고 숨결을 느끼는 연극 같은 현장이 더 중요해지지 않을까 한다. 기술이 못 하는 걸 해야 하니 말이다.

연기에 대한 생각이나 고민이 시기별로 다를 것 같은데, 지금은 어떤가.
고정되는 것을 싫어한다. 새로운 도전을 통해 깨져보고 싶기도 하다. 지금은 운 좋게 아직 들키지 않아서(?) 관객들이 좋게 봐주시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웃음) 혹시 내가 연기에 어떤 정답을 정해놓고 옷장에서 옷을 꺼내 입듯 매너리즘에 빠진 건 아닌지 늘 경계한다. 내가 모르는 인물에게 진심으로 다가가는 노력을 기본으로 하되, 관객의 예상을 벗어나는 지점에 닿기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다.

실제로는 어떤 엄마인가.
딸은 나의 가면 벗은 모습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친구다. 내가 결코 완벽하거나 훌륭한 사람이 못 된다는 걸 세상에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친구이기도 하다(웃음).



사진제공. 아우라픽쳐스



2026년 5월 4일 월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무비스트 페이스북(www.facebook.com/imov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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