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저한테는 완전히 럭키비키예요.” 25년 넘게 해 온 연기를 여느 때와 같이 한 작품 한 작품 고민하며 했을 뿐인데,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공개된 데다 좋은 평가를 받고 있어서 감사할 뿐이라는 문소리의 말이다. 2인극 <사운드 인사이드>에서는 문학교수 ‘벨라’로,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2>에서는 국가 시스템을 대표하는 듯한 정무수석 ‘이수경’으로, tvN 드라마 <정년이>에서는 ‘정년’(김태리)의 어머니 ‘서용례’이자 천재 소리꾼 ‘채공선’으로 1인 3색을 보여준 문소리다. 고집세고 주관도 확고해 보이지만, 은근히 겁이 많고 정이 많아서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한다는 문소리를 만났다. 인생의 재미는 돈으로 따질 수 없으니, 큰돈을 받는 작품보다 또 가성비가 큰 작품보다, 깊은 밤 하늘의 별이 떨어지는 것 같은 아름다운 순간을 선사하는 작품이 중요하다는 그의 말을 들어본다.
<정년이> 때보다 한층 젊어진 것 같다! (웃음)
정년 엄마인 ‘서봉례’(문소리)는 많이 고생한 역할이고, 그 시기에 마침 <폭싹 속았수다>에서 노년 역할을 하고 있어서, ‘마음껏 늙어보자’ 이런 심정으로 임했다. 그렇게 3월 초까지 촬영하고 <정년이> 에서 부르는 ‘추월만정’ 녹음을 4월에 해서 끝냈는데 그러고 나서 보니 너무 늙어 있어서 깜짝 놀랐다. 준비하면서 유튜브로도 매일 요양원, 노인정, 양로원 같은 시설을 찾아봐서 그런지 사람이 쪼그라든 것 같더라. 단계적으로 변화하기 마련인데 이 시기가 늙는 시기인가 생각하던 참에 연극을 하게 됐다. 오전에 운동, 요가, 피부과, 한의원, 치과 등등 젊음에 도움되는 루틴이 생기며 활력이 붙고 3kg 정도 체중이 빠지는 등 공연하는 동안 주변에서 얼굴이 좋아졌다고 하더라. 얼마 전에도 특별 출연 촬영이 있었는데, 7살 아이가 와서 ‘정년이 엄마가 이렇게 젊냐’면서 놀라는데 연극공연이 적절한 시기에 도움이 많이 됐다.
연극 <사운드 인사이드>,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2)>, tvN <정년이>까지 매체와 장르를 넘나들며 다채로운 역할을 소화했는데, 그간 연기 변신에 갈증이 있었던 건가.
비슷한 시기에 오픈돼 그렇게 느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건 아니고, 효과가 배가 되는 것 같아 감사할 뿐이다. 연기는 25년 이상 해온, 일이라 어찌 보면 일상이라 할 수 있다. 한 작품 한 작품 고민한 시간들이 좋은 평가를 받고, 공교롭게 같은 시기에 나왔길래 ‘럭키비키잖아!’ 했다. (웃음)
‘추월만정’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준비는 어떻게 했는지.
봉례(어릴 시절 채공선)가 ‘강소복’(라미란)을 만난 후 돌아가는 장면을 영화 <서편제>에 나온 길에서 찍었는데 억새, 코스모스가 있고 너무 아름다운 길이었다. 청산도가 멀어서 가기 힘들지만, 서편제 길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촬영하면서 정말 좋았다. ‘추월만정’은 나중에 다이어리를 보니까 레슨, 연습, 마지막 녹음까지 거의 1년이 걸렸더라. 추월만정 도입부가 소리하는 분들께 굉장히 어려운 대목이라고 한다. 판소리 장단 중에서도 제일 느린 진양조장단으로, ‘추~~월’ 하고 시작하면서 자기 소리 공력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단이기 때문이다. 쉽게 흉내 낼 수 있는 가락이 아닌, 정말 실력이 있어야만 그 노래의 맛을 낼 수 있다고 한다. 다행히 이십대 중반 판소리를 배운 경험이 많이 도움됐다.
판소리와는 어쩌다가 인연이 닿았나.
당시 부모님이 연극하는 걸 반대하셔서, 학교에 복학했었다. 전공(교육학) 수업으로 학점을 따야 해서, 오전에 수업 듣고 하염없이 종로 거리를 걷다 보면 간혹 북소리가 들리곤 했다. 하루는 길 꼭대기에서 북소리가 들려서 뭐하는 곳인가 싶어서 올라갔었다. 가건물 같은 옥상에 할머니 한 분이 북채를 쥐고 앉아 계시더라. 나를 보시더니 ‘워매 춘향이가 왔네 그려, 뭐하러 왔냐 게 앉거라’ 물어서 “궁금해서요”하니 ‘소리가 하고 싶냐, 가르쳐 줄게’ 하셔서 배우게 됐다.
원래 뜻이 있었던 건가.
사실 고등학교때 바이올린을 배우다가 엄마가 그만두라고 해서 정년이처럼 이불 뒤집어쓰고 포기한 적이 있었다. (웃음) 대학교 가서도 관현악부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연극반을 했다. 왠지 그때는 부잣집 아이들과 대면하기 싫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거문고, 가야금, 해금 등 전통 악기 연주 동아리에 가입했고 그때 처음 전통악기를 접했는데 그 소리가 너무 은은하더라. 가야금을 연주하면서 민요를 꽤 배운 적이 있고, 또 마음도 적적한데 소리나 배우자 싶어서, 선생님의 산공부에 따라갔었다. 선생님과 제자들이 다 모여서 한달 동안 밥 해먹고 기거하며 종일 노래만 하는 수련회 같은 개념이다. 그러다가 졸업하고 멀어졌는데, 몇 년 뒤 연극하고 있을 때 선생님이 대금 연주자인 아드님과 찾아오셨었다. 이제 막 영화를 시작해서 정신없어 연락도 못 드리던 시기였는데 과일, 꽃 같은 걸 사 오셨다. 또 영화 <오아시스>(2002)를 아드님과 보러 갔다가, 내가 장애인으로 나오니까, 극장에서 벌떡 일어나 ‘우리 소리 병신 아니여!’ 하며 소리질러서 아드님이 말리고 하는 한바탕 소란이 있었다고 들었다. 무슨 인연인지, 나를 굉장히 예뻐해 주셨는데, 코로나 시기에 돌아가셔서 하필 제일 극심했던 기간이라 문상도 못 가서 너무 마음이 안 좋았다 <정년이>를 하면서 선생님 생각을 많이 했고, 배운 걸 극 안에 담을 수 있어서 너무 감사했다
김태리 배우의 간곡한 추천과 부탁으로 <정년이>에 합류하게 됐다고.
특별출연이니 뭐니 해도 너무 의미있는 작품이다. 시간만 된다면 1년만이 아니라 3년 정도 소리를 배우고 싶을 정도로 고마운 작품이다. 언제 또 이런 소재로 작품이 나올까 싶다. 태리와 개인적으로 친하다 보니, 태리가 (소리를 배운) 이런 사연을 알고 있었다. 내가 제주도에 머물고 있을 때 태리가 한번 놀러 온 적이 있다. 그때 자기 판소리 레슨받는다고, 언제 한 번 구경오라고 해서, 그래 갈게 했는데, 나중에 엄마 역할 해달라고 하더라. 태리 엄마를 전에도 한적이 있어서 (영화 <리틀 포레스트>) 자기가 떼쓰면 (내가) 거절하기 힘들 거라는 생각도 있었겠지만, 좋은 배우들과 같이하는 터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웃음)
곁에서 지켜본 김태리 배우는 어떻든가.
그렇게 노력하는 배우는 오랜만에 본 것 같다. 너무 큰 짐을 지고 가는데도, 분명히 너무 힘들 게 눈에 보이는 데도 씩씩한 기운으로 전체 팀을 이끌어 준다. 어제 같이 모여서 방송을 봤었는데 대단하다고, 존경한다고 했다.
촬영지는 경상남도 고성이라고.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나.
고성까지 멀기도 하고 시간이 오래 걸려서 전날 가서 해질 때 리허설하고 잠깐 쉬다가 새벽 3시에 모여서 일출을 기다려서 촬영하는 식이었다. 추월만정을 찍을 때, 이미 환해졌는데도 해가 뜨지 않아서 결국 포기하고 철수하려는데 이만한 붉은 해가 올라오더라. 카메라 철수하지 말라고 소리지르고, 나도 막 뛰어가서 태리랑 앉자마자 ‘추~~월’하고 소리 부르기 시작했다. 여러 앵글로 뒷모습 위주로 촬영했는데 정말 스릴 넘치는 하루였다.
넷플릭스 <지옥2>에서는 정무수석 ‘이수경’ 역을 맡았다. 시스템을 연기했다는 칭찬이 많다. 캐릭터를 어떻게 입체적으로 다듬어 나갔는지.
캐릭터화 되는 것이 어딘가 방문을 열고 들어간다고 한다면, <지옥2>는 문고리가 어디 달려있는지 모르겠는 경우였다. 그 해답을 시나리오 전체나 감독님을 통해 찾기 위해 여러 고민을 하게 됐다. 리얼하게 실제 정치인처럼 접근할지, 판타지 장르물의 악랄한 빌런처럼 접근할지 처음에는 모호했었다. 극 전체에서 ‘이수경’의 역할이 무엇인지, 마치 장기라 치면 판을 깔고 말을 놓으면서 캐릭터의 모양을 만들어 갔던 것 같다. 부활자인 ‘박정자’(김신록) 와 ‘정진수’(김성철)를 맨 앞에 두고 ‘민희진’(김현주), 햇살반 선생(문근영)과 그 남편(임성재) 캐릭터는 어디에 놓을지, 그리고 이수경은 이 판의 어느 지점에서 등장해야 할지 고심했었다. 이수경은 <지옥2> 세계관 밑에 은은하게 깔려 있는 캐릭터이지만, 결국에는 컨트롤러를 쥐고 있는 인물이다. 직접 행동하지 않아도 그의 말이 모두를 지배하는 느낌이 필요했다. <정년이> 용례에 접근한 방식도, 또 연극 <사운드 인사이드> ‘벨라’를 구축하는 방식도 모두 달랐다.
캐릭터라이징 하는 방식은 경우마다 다르다 해도 공통점이 있을 것 같다.
강박증처럼 계속 생각하는 것이다. 내 방식은 얼마나 많은 질문을 끌어낼 것인가, 각(극)본을 받으면 답을 찾으려 한다기보다 질문을 찾아내려 한다. 질문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거든. 질문하고 답을 찾으면서 연결하고 연결이 안 되는 지점은 버리고 하면서 만들어 나간다.
질문이 떠오르지 않는 캐릭터가 진짜 어려운 역할일 것 같다.
질문이 없는 작품보다 힘든 건, 질문하지 말라는 감독님이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만, 가끔 질문을 힘들어하는 연출자가 있다. 25년 넘게 연기하다 보니 당장 답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대화하자는 의도로 묻는 것인데도 당장 대답해주지 못함에 부담스러워하는 감독이 있다.
이런 면에서 연상호 감독님은 질문을 아무리 많이 해도 재미있게 받아주는 분이다. 덕분에 텐션이 떨어지지 않고 끝까지 잘 할 수 있었다. 대사를 칠 때도 감독님과 상의를 많이 했다. 아무리 딕션이 좋고 또박또박 전달한다 해도 커뮤니케이션의 90% 이상이 비언어적 요소라 생각한다. 해당 씬의 공간, 분위기, 동작과 움직임, 대사의 강약조절, 문장순서, 질문까지도 연상호 감독과 함께 고민하며 만들어 나갔다. 아침에 가면 빨간 펜, 파란 펜 그어가면서 ‘들어봐요, 감독님’ 하면서 정무수석이 말을 시작하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못하는 힘있는 씬이 되도록 노력했다.
‘연극 무대가 보약같다’고 밝힌 바 있다. 어느 점에서 그럴까.
한 편의 연극이 끝나고 나면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는 걸 느낀다. 연극은 사람들과 더 깊은 관계를 쌓을 수밖에 없다. 상대 배우들, 스탭들과 같이 보내는 시간이 많아서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지 않으면 힘을 받기 힘들다. 그래서 최대한 소통하려고 노력하고, 그 사이에서 얻어지는 따뜻함, 우정, 인간애가 생겨서 참 좋은 과정인 것 같다. 드라마틱한 순간이 아님에도, 시답잖은 대화하며 낄낄거리면서 아, 너무 소중하고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 생각하게 된다.
<사운드 인사이드>는 철학적인 2인극에 주인공 ‘벨라’가 대학교수라 대사량이 많아 고생했겠다. 또 상대 배우와 호흡은 어땠나.
연출하는 분이 번역도 직접해서… 그.대.로 대사를 쳐달라고, 소설 한 권을 그대로 읽어주듯이 해달라고 하셔서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웃음) 그래도 덕분에 작품하면서 여러 미국 작가의 소설을 접할 수 있어 너무 좋았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마음이 힐링되고 편해지는 시간이었다. 상대역인 ‘크리스토퍼’는 이현우, 이석준, 강승호 배우의 트리플 캐스팅이었는데, 현우 씨는 첫 연극이었고, 석준 씨는 뮤지컬은 많이 했지만 역시 연극은 처음이었다. 승호 씨는 영상 매체로 영역을 확장하려는 친구라, 공연 기간 중 주연한 영화 <장손>이 개봉하기도 했다. 스스럼없이 친하게 지냈고, 그 친구들이 먼저 찾아와 고민이나 질문을 하기도 했었다.
25년 차 연기자다. ‘커리어하이’의 순간을 꼽는다면.
어젯밤에 해남 막걸리 한 잔에 목포 홍어를 먹으면서 <정년이>를 다 함께 봤다. 조그마한 케익을 앞에 두고 (시청률을 예상하며) 초를 14개 할지, 15개 할지 웃고 이야기하고 했는데, 한작품하고 이렇게 오봇한 정과 삶을 나눌 수 있는 것, 이런 순간이 커리어하이가 아닐까.
작품 선택 시 우선적으로 보는 요소가 있다면.
내가 고집이 세고 주관도 확고해 보이지만, 사실은 은근히 겁이 많고 정이 많아서 끈질기게 부탁하면 거절을 못 한다. 덕분에 매니저가 고생하기도. (웃음) 내 인생의 재미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것이니 가성비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돈을 많이 받고 마음이 힘들면 그건 더욱더 지옥일 것 같다. 때문에 오히려 깊은 밤에 하늘의 별이 떨어지는 것 같은, 돈으로 살 수 없는 또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순간을 맛볼 수 있는 것 같다. 연극무대 같은 경우가 특히 그렇다.
차기작은 어떻게 되나.
앞으로 들어갈 구체적인 작품은 없어서 한가한 시간을 즐기려 한다. 언제 바빠질지 모르니 그간 밀렸던 공부도 하고, 딸과 시간도 보내며 쉬면서 무대든 드라마든 영화든 다 열어놓고 다음 작품을 정하려 한다. 또 넷플릭스 <폭싹 속았수다>가 릴리즈 예정이라 그때 다시 인사드릴 것 같다.
사진제공. 씨제스스튜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