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영화 <문경>은 쉴 새 없이 달려오다 번아웃된 직장인 ‘문경’(류아벨)이 충동적으로 여행을 떠난 경북 문경에서 만행 중인 비구니 ‘명지스님'(조재경), 그리고 떠돌이 개 ‘길순’과 만나 2박 3일 동안 함께한 특별한 동행을 담은 작품이다. <방문자>(2005), <반두비>(2009), <컴, 투게더>(2017) 등 관습적인 문법과 거리를 둬왔던 신동일 감독의 신작이다. “좀 더 대중적으로 다가가고 싶었다”고 작품 의도를 전한 신동일 감독을 만났다. 지난 5월 열린 전주국제영화제 상영 당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하나 들려준다. <문경> 시놉시스만 보고 30대 여성 감독을 예상했다는 어느 관객의 말을 전하는 신동일 감독. 좀 더 대중적으로 다가가려 한 노력이 관객에게 어필된 것 같다며, 소통에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아 기분 좋다고 진솔하게 말한다.
<문경>은 번아웃 된 직장인 ‘문경’(류아벨)과 만행길에 처음 오른 명지스님(조재경), 주인을 잃어버린 ‘길순’의 우연한 동행을 그린 이야기다. 여자와 여자의 관계를 다뤄보고 싶었다고.
그간 해온 작품을 보니 여자와 남자, 남자와 남자의 관계는 다뤘는데 여자와 여자의 관계는 없더라. 그래서인지 문득 주인공이 두 여성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성에 관해 인지나 이해가 부족한 부분은 공동 각본가인 이애리 작가가 필터링하면서 보완해 주었다. 이 작가와 본격적으로 작업한 건 이번 <문경>이 처음이지만, 평소 그에게 신뢰가 있어 도움을 요청했고 다행히 흔쾌히 수락해 주었다.
<문경>은 좀 더 대중적인 이야기를 지향했다고 밝힌 바 있다. 어떤 의식의 변화가 있던 건가.
큰 틀에서는 크게 변화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 작가는 예술성을 추구하기보다 일반 드라마를 쓰고 보는 작가라 대중적인 이야기가 좋겠다 싶었다. 관람 등급과 같이 12세 이상이면 누구나 이해할 이야기를 만들고자 했다.
<방문자>(2005), <반두비>(2009), <컴, 투게더>(2017) 등으로 꾸준히 관객을 찾았다. 전작들이 어느 부분에서 대중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지 문득 궁금하다. (웃음)
그게… 전작들은 관습적인 부분을 배제한 부분이 있다. <문경>을 예로 든다면, 문경과 명지스님의 동행 과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겪는지를 표현하느냐 미지의 영역으로 놔두느냐의 차이일 거다. 이번에는 좀 더 드라마적으로 풀었다고 생각하고, 화면(그림)도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갔다. 문득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희생>(1986)이 떠오른다. 관람에 상당한 인내를 요구하는데 (웃음) 이를 대중적으로 풀었다면 훨씬 쉽게 다가갔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은, 감독의 의도가 있지 않을까.
<희생>이 4K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재개봉했다. 언제 이 영화를 봤는지, 당시 감상은?
대학 졸업 후 영화학교에 다닐 때였던 것 같다. 시네필 성향이 있는 데다 또 당시 예술 영화 붐이 일어났던 시기라 타르콥스키의 <희생>, <거울>(1975) 같은 영화를 봤는데 어렵고 지루했었다. <희생>보다는 상대적으로 쉬운 <파리 텍사스>(빔 벤더스,1984)가 대학교 1학년 때인 1987년 개봉했는데, 보고 나서 역시 ‘예술영화는 이렇게 지루한 건가 보다’라고 생각했었다. 그랬는데, 영화 지식을 쌓고 감상 훈련도 하고 또 단편도 만들며 한 10년쯤 지나서 보니, <파리 텍사스>가 얼마나 깊게 인간의 심연을 다루었는지 보이더라. 주인공과 감정의 교류도 생기고 말이지! <희생>도 아마 다시 본다면 예전과 다르게 느껴질 것 같다. 참고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 배용균)은 내게 난공불락의 영화다. 극장에서 보다가, 또 비디오로 보다 가도 끝까지 다 못 봤다. (웃음) 한데 지금 보면 또 달리 보일지도.
영화 준비를 위해 불교 교리와 관련 지식을 배우고자 정토불교대학에 1년간 다녔다고.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잘 모르기 때문에 만들게 되는 것 같다. 알아가는 과정을 즐긴다고 할지… <방문자>는 여호와의 증인이 주인공이었다. 신도들을 리서치하고 인터뷰하면서 알아가는 희열이 있었다. <반두비> 같은 경우는 이슬람교도가 주인공이라, 이슬람사원을 방문하고 그들의 생활 관습을 배워가면서 촬영했었다. 당연히 그 문화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영화에 담았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대중이 쉽게 이해하도록 불교 용어보다는 일상에서 쓰는 쉬운 언어로 표현하려 했다. 개인적으로 변증법이라는 단어를 좋아하는데 불교에도 이런 면이 있더라.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는 인연설이나 상호의존관계의 연기설 등과 같은 교리가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종교가 있나.
냉담 중인지 꽤 됐지만, 본투비 가톨릭이다. (웃음) 아버지도 독실한 신자시고 딸 이름도 가톨릭에서 따왔다. 하지만, 타종교에 대한 거부감은 전혀 없다.
불교를 접한 후 변화된 부분이 있나.
불교의 자비와 가톨릭의 사랑이 본질적으로 같다고 느꼈다. 가톨릭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불교의 보상을 바라지 않고 베푸는 ‘무주상보시’의 개념이 유사하고, 친근하게 다가왔다. 1년간 정토대학에 다니면서, 당시 코로나 시기라 줌으로 수업했는데, 함께 공부하는 도반과의 교류가 굉장히 좋았던 기억이 있다. 또 불교를 접한 후 집착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한다고 할지, 그런데 이런 노력조차 집착일 수 있다. (웃음) 인연이란 것이 억지로 되지 않는다는 걸 깨우친 것 같다. 극 중 문경과 가은(명지스님) 중 누구라도 길순을 외면했다면 그들의 인연은 시작하지 않았을 거다. 평소의 패턴 혹은 습관에서 벗어나 행동했기 때문에 어떤 스파크가 일면서 인연이 생겼고, 그 인연의 소중함을 깨우치게 된다. 결국 억지 인연이 아닌 자연스러운 맺음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게 아닌가 한다. 물론 이런 일이 꼭 불교라서 가능한 일은 아닐 거다.
‘문경’ 역의 류아벨, 명지스님 역의 조재경, 유랑 할매 역의 최수민. 캐스팅 비하인드를 풀어 놓는다면. 조재경 배우는 이번이 첫 작품이고, 베테랑 성우이자 배우 차태현의 어머니이기도 한 최수민 배우 역시 첫 연기 아닌가.
최수민 배우의 아들이 차태현 씨인 건 전혀 몰랐다. <문경>을 준비하면서 우연히 그분의 프로필을 보고 마음으로는 결정했지만, 제작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라 생각만 하던 차였다. 나중에 시나리오를 보내니, 좋다고 하시더라. 명지스님의 경우 삭발을 해야 해서 처음부터 신인을 캐스팅하려 했다. 활동 중인 배우가 삭발하면 1년 이상 다른 배역을 맡기 힘드니, 선뜻 나설 배우가 없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조재경 배우를 만났는데 마침 친구와 낙산사에 가서 ‘장편 영화에 캐스팅되게 해달라’고 빌던 중에 오디션 연락을 받았다는 거다 (웃음) 이게 다 인연이라며 웃었던 기억이 있다. 류아벨 배우는 원체 독립영회씬에서 독보적이기도 하고, 처음부터 ‘문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제작사 이름이 ‘비아신픽처스’다. 무슨 의미일까.
딸 이름인 ‘신비아’를 외국식으로 표기한 이름이다. 예전에 칸국제영화제에 단편(<신성가족>, 2001)을 출품한 적이 있다. 그때 프로덕션을 써 내야 해서 즉흥적으로 만든 거였다. 운이 좋게도 초청받았고, 지금도 비아신픽처스라는 이름으로 영화를 제작하고 있으니 인연이라면 인연이다. (웃음)
독립영화는 한국영화의 저변을 확대하고 다양성을 높이는 원동력이지만, 여러모로 지원이 아쉬운 현실이다. <문경> 제작 과정도 만만치 않게 험로였을 것 같은데, 어떤가.
그렇지. 영진위(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이 없으면 불가능했다. (지원받기까지) 그 관문을 통과하기가 진짜 힘들었다. (웃음) 투자자 입장에서는 당연히 자본의 논리로 개입하게 되고, 감독으로서는 자본에 매몰되면 영혼을 파는 것과 마찬가지라, 공적인 지원이 없으면 창작을 이어가기 힘든 현실이다. 더욱이 나같이 중견 감독, 그러니까 연식이 좀 있는 감독은 좀 더 힘든 면이 있다. 아무래도 신진 감독을 밀어주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인데, 한편으로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후반부의 힘있는 서사를 좋게 평가해서인지 지원작에 선정됐고 개봉까지 하게 됐다. 또 문경시의 도움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7년 주기로 한 편씩 만들게 되는 것 같다.
문경시와는 어떻게 인연이 닿았나.
5월에 열린 전주국제영화제 기간 중 문경시에서 먼저 연락해 왔고, 이후 문경에서 두 번 상영회를 가졌다. 개봉 전날인 27일에도 문경시에서 특별 시사를 진행한다. 영화 제목이 ‘문경’이니, 지자체 홍보와 팩키지로 연결해 문경에서 장기 상영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당신 필모에 <문경>은 어떻게 남을 것 같은가.
대중적인 시선을 지닌 작가와 처음으로 작업한 결과물이고, (말했듯이) 대중과 좀 더 소통하려고 노력한 작품이다. 몇 차례 시사회를 진행해 보니 노력한 부분이 관객에게 어느 정도 어필된 것 같더라. 전주국제영화제 때 어느 대학교 1학년생이 <문경>을 보고 이런 후기를 남겼더라. ‘시놉시스만 보고 30대 여성 감독을 예상했는데 GV 때 보니 50대 중년 남성 감독이라 놀랐다. 자신이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 죄송하다’는 내용인데, 이 후기를 보고 소통에 어느 정도 성공한 느낌이었다. <문경>은 남성이나 여성을 떠나 서로의 언어와 생각을 이해하고, 소통하려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한 작품이 아닌가 한다.
내 인생의 명장면을 꼽는다면
너무 많이 생각나는데… 지금 순간 스쳐 지나가는 장면은 동탄시 노작홍사용문학관에서 <컴, 투게더> 상영회 때이다. 시사회에 참석한 이애리 작가가 내게 질문했는데 이 만남이 인연이 되어 친구가 됐고, 공동작가로 <문경>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관객과 감독으로 만나 함께 영화를 만들었으니, 명장면이 맞는 것 같다.
사진제공. 비아신픽쳐스/ <문경> 스틸
2024년 8월 29일 목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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