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영화 드라마 예능, 매체를 불문하고 종횡무진하며 대중과 친밀한 소통을 이어가는 장항준 감독이 <기억의 밤>이후 5년 만의 신작 <리바운드>로 관객 앞에 섰다. 가족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국내에서 ‘농구영화’라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안재홍 배우와 젊은 신예들과 뭉쳐 뚜벅뚜벅 전진했다. 쓰는 것도 말하는 것도 잘하는 탁월한 이야기꾼이자 독보적인 디렉테이너인 감독이지만, 뜻밖에도 예능은 소모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고. 가장 좋아하고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며 60대까지는 현장에서 뛰고 싶다는 감독을 만났다.
리바운드! 다시 기회를 잡다
농구계에서는 유명한 일화지만, 대중에게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이야기다. 영화의 메이드 과정을 간략히 소개한다면.
2012년 전국 고교농구대회에서 부산중앙고는 단 여섯 명의 멤버로 4강 진출이라는 돌풍을 일으켰다. 장원석 비에이엔터테인먼트 대표는 이 뉴스를 접하자마자 바로 수소문해서 학교와 강양현 코치에게 연락했다더라.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 영화로 만들겠으니 허락해주십사하고 말이다. 그렇게 허락받고 기획에 들어간 시점이 11년 전이고, 권성휘 작가가 쓴 시나리오가 내게 온 건 2018년이다. 글을 읽으니 어렴풋이 그 일화가 떠올랐다. 인터넷 등을 통해 좀 더 디테일한 사정을 알고 나니 정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일어난 거였더라. 투자받는 것도 만만치 않을 테고 캐스팅 역시 쉽지 않겠다는 걸 알았지만, 하고 싶었다. 아내인 김은희 작가도 시나리오를 보더니 ‘오빠가 했으면 좋겠다고’, 그 당시 어렸던 딸도 ‘아빠가 했으면 좋겠는데, 아빠가 하지 않는다 해도 누군가 꼭 만들면 좋겠다’고 하더라.
김은희 작가가 공동 각본으로 참여했다.
시나리오는 참 좋은데 수정할 부분이 조금 보인다고 자기가 해보겠다고 자청하는 거다! 당시 되게 바쁜 시기였는데 ‘웬 떡이냐’ 싶었다. (웃음) 이후 함께 실제 사건을 좀 더 취재하고 시퀀스와 신을 재배열하고 캐릭터를 좀 더 다듬었다. 권성휘 작가가 워낙 큰 틀을 잘 짜 놓아서 다듬기가 수월했다. 김은희 작가는 과연 명성대로 잘 썼더라! (웃음) 마지막으로 내가 한 번 손을 보고 촬영에 들어갔다.
만약 가족이 반대했다면, 접었을까? (웃음)
반대했어도 했다. 아내 친구 딸 부모님 등등 여러 사람의 조언을 귀담아듣지만, 판단은 내가 내린다. 어른이니까! (웃음) 연출할지 말지 판단의 기준은 ‘내 피를 끓게 하느냐 하지 않느냐’이다. 평생을 그렇게 살았으니 말이다. 어릴 때 어머니가 바이올린을 배우게 하려고 선생님과 상담하는 중에 혼자 집으로 도망갈 정도로 하기 싫은 건 못 하는 성향이다.
다듬는 과정에서 처음과 크게 변화한 점이 있다면.
초점의 문제다. 관계와 사람보다는 당시 그들이 난관을 극복하고 뚫고 나가는 데 포커싱했다. 누군가 왜 ‘채소연’(만화 <슬램 덩크>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 같은 캐릭터는 없냐고 묻는데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실화에도 등장하지 않을 뿐더러 예전부터 (이런 캐릭터의 활용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본질을 왜곡하고 등장시켜 봤자 병풍에 불과하다는 생각에서다.
한 번 제작이 무산됐다가 ㈜넥슨이 투자를 결정하면서 작업이 재개됐고, 지난해 초에는 부산중앙고 6인방 중 핵심 멤버인 천기범 선수가 음주운전으로 퇴출당하는 악재가 발생했다. 실화가 담보하는 감동이 있는 만큼 관련 추문은 이를 희석할 수밖에 없는데 당시 심경은 어땠나.
나도 그랬지만, 제작진과 배우진 모두 멘붕이었다. 하지만 젊은 시절부터 업계에서 일하다 보니 작품 하나가 완성되기까지 얼마나 수많은 난관이 있는지 알고 있기에 그나마 곧 극복할 수 있었다. 작품의 수장이니 내가 흔들리면 안 된다는 생각과 동시에 원래의 의도를 더욱더 굳혔다. <리바운드>는 꿈을 잃어버린 스물다섯 청년과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여섯 소년이 떠난 여행으로 접근했고, 어느 한 명의 이미지에 좌우되기보다는 묵묵히 제 갈 길을 가겠다고 생각했다.
‘강양현’(안재홍)과 아이들!
캐릭터 한 명 한 명을 향한 애정이 느껴지더라. 분량도 배려한 것 같고. (웃음)
머릿속으로는 누군가의 원맨쇼가 아니라 ‘강양현과 아이들’이라고 생각하고 만들었다. 사실 스포츠 실화 영화는 완성된 인격체의 스승이 질이 좋지 않은 학생들을 교화시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우리 영화의 차별점은 코치인 강양현 역시 완성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농구 선수로 실패한 스물다섯의 청년, 앞으로 무슨 일을 할지 막막한 그가 코치를 맡게 된다. 자기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무리수를 두지만, 이러한 시행착오를 거치며 (아이들과) 동반 성장해 나간다.
안재홍 배우와 실제 강양현 코치는 싱크로율이 높더라.
외양도 그렇지만, 워낙 독보적인 배우다. 가만히 있는 호흡에서도 코미디가 완성된다고 할까. 개인적으로는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정봉’이 학교를 졸업하고 공익근무하다가 코치가 된 느낌이었다.
강 코치가 초반에 무리한 욕심에 독단적으로 행동하고, 이후 아이들에게 무릎 꿇고 사과하는 장면이 있다. 그의 진정성이 전달되며 비로소 한팀으로 뭉치게 된다. 잘못을 인정한다는 게 참 쉽지 않은데 말이다.
실제로도 그랬다고 하고 돌이켜 보면 나도 참 많이 사과하며 산 인생이다. (웃음) 딸에게도 잘 못한 일이 있으면 진심으로 사과한다. 평소에 어떤 이유로든 특혜나 특권을 누리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촬영 현장은 밥 먹을 때 계급장 떼고 먹자고, 무조건 선착순으로 식사하는 걸 원칙으로 했다. 그런데 내가 특혜를 받은 부분도 있다. 용산고 코치로 출연한 장현성 배우 덕분이다. 관록있는 코치로 미친 듯한 승부욕이 있지만, 그러면서도 매너를 잃지 않는 캐릭터인데 이를 소화할 배우가 많지 않았다. 대사는 몇 마디 없지만, 10회차나 촬영해야 해서 여기저기 제안해보니 ‘돌았니, 나보고 병풍을 서라고?’ 뭐 이런 반응이 대부분이었는데 장현성 배우만 선뜻 하겠다고, 특혜 맞다. (웃음)
강양현의 내적인 성장은 알겠는데 코치의 기량면에서 성장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의 승리 전략이나 전술 등은 드러나지 않는데 이유가?
전술적으로 무엇이 달라졌는지 표현하지 못한 부분은 아쉽다. 이런 부분을 다 반영하면 글이 너무 길어져서 아예 시나리오 단계부터 빼 버렸다. 그냥 대충 넘어갔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외에도 편집에서 덜어낸 부분도 꽤 있다. 한 70% 정도만 살린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촬영했는데 잘려 나간 배우분들에게 미안한 면도 있다.
‘미친 고증’이라는 소문이던데. (웃음)
<리바운드>가 한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실화를 다룬 것도 아니고, 열 명 중 한 명도 기억하지 못할 사건이겠지만, 그래도 영화를 통해 이런 소년들이 있었다는 걸 한 번 돌이켰으면 했다. 우리가 톱스타가 출연하는 영화도 아니고(feat. 안재홍은 대단한 스타!) 대부분이 신인이라 내세울 건 ‘리얼’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실제와 같게 하겠다는 거지. 혹자는 한준영 선수의 경우, 너무 작위적인 설정이 아니냐고 반문하는데 실제 인물에 실제 상황이었다. 하여튼 선수들 이름도 그대로 사용했고, 실제로 부산중앙고에서 촬영했다. 10여년이나 흘러서 학교의 문이 새 걸로 교체된 바람에 양해를 구하고 뜯어 예전 걸로 교체한 후에 촬영했을 정도다. 손목 밴드, 운동화, 농구공 같은 관객이 알아채기 힘들 작은 부분까지도 당시를 재현했다. 그래서 영화를 미리 본 하승진 선수가 ‘고증 미쳤다’고 하기도. 캐스팅도 마찬가지였다.
캐스팅에서 가장 중요하게 살핀 포인트는.
일단 실제 선수와 신장과 체격 등이 흡사하고, 농구도 어느 정도 잘하면서 연기까지 되는 ‘젊은’ 배우를 찾는 게 쉽지 않았다. 처음 오디션은 국가대표 코치를 역임한 조상현 감독과 같이 치렀는데 그때 한 500며 명 되는 배우가 왔다. 그러다가 제작이 무산되는 바람에… 여튼! 2차 오디션을 통해 지금의 배우진이 꾸려졌다. 농구 명문 휘문고 선출인 김택 배우는 신장에 걸맞게 ‘순규’를 맡았는데, 그가 농구 초짜라는 설정이라 초반에는 못 하는 척하느라 힘들어했다. (웃음)
윤종신이 임보하고 김은희가 입양한 눈물자국 없는 말티즈
감정 과잉으로 흐르지 않는 담백한 연출이 좋더라. 군더더기가 없다.
실화가 아니라면 클리셰 범벅에 극적인 전개에 오버라고 생각할 여지가 있는 ‘불가능’에 도전한 이야기 아닌가. 그래서 오히려 힘을 빼고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 한편 드라마틱한 장치를 걷어냈다. 담백하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배우들에게도 절대로 울지 말라고 했다. 연기하다 보면 저절로 눈물이 날 수 있어서 ‘당시 선수들은 자기 감상에 취할 시간도 여력도 없었을 거다’라고 하며 절제를 부탁했다. 마지막 경기를 끝까지 보여주지 않은 것도 많이 고민한 결정이었다. 경기 종료까지 촬영은 다 했는데 편집하면서 컷했거든. 편집실에서 결단을 내기기까지 참… 힘들었다. (웃음)
코믹과 유머도 곳곳에서 읽힌다. 웃음을 설계하면서 주안점은.
코미디라는 게 의도가 읽히는 순간 외면 받는지라, 그래서 코미디가 어렵다. 이번에는 캐릭터로 하여금 웃음을 유발하도록 했다. 이 인물이라면 이렇게 행동할 법하다고 납득시킨다고 할까. 배우에게 각자 애드립을 생각해 오라고 해서 나한테만 얘기해 달라고 했다. 서로 미리 알면 더 이상 애드립이 아니니 말이다. 그러면 내가 쓱 가서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하는 식으로 힌트를 줬다.
농구 경기 시퀀스가 기대 이상으로 다이내믹하던데 연출 노하우가 궁금하다. (웃음)
나를 포함해 스탭들 모두 ‘농구영화’라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이라 처음에는 막막했다. 농구라는 스포츠가 구기 운동임에도 불구하고 운동장(코트)이 생각보다 작다. 끝에서 끝까지 가로지르는 데 채 10초도 안 걸린다. 이 좁은 공간에서 스피디한 움직임을 보여야 하는데 이를 관객이 과연 인지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몇 달 전부터 배우들과 (농구) 코치진이 합숙하면서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각 경기당 맞춰 놓은 30여 개 합 중에 어느 걸 쓸지 계속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다. 예를 들면 ‘안양고 14번 합’ 이러면, 배우들이 알아서 움직이는 식이었다. 연습할 때는 원래의 속도보다 60~70%만, 촬영에는 제 속도로 스피드를 최대한 끌어올려 찍었다. 또 부감샷보다는 아이레벨샷으로 현장성을 높였고, 1초에 800프레임까지 촬영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6인방의 현주소를 보여주는데 뭉클하더라. 실화만이 전할 수 있는 감동이 아닌가 한다.
역시 넣을지 말지 고민이 많았던 부분이다. 마지막에 보여주지 않으면 실화라는 걸 까먹을까 봐 넣었다. (웃음) 농담이고, 현재진행형인 분들이라 그들의 근황을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자칭 ‘윤종신이 임보하고 김은희가 입양한 눈물자국 없는 말티즈’라는 꿀팔자에 영화까지 잘 만들면 반칙 아닌가. (웃음)
하하 “장항준 시대가 오나요?” 농담이고! 영화 <라이터를 켜라>(2002)는 중박 정도였고, 그러다 잘 된 작품이 드라마 <싸인>(2011)이다. 이건 사실 당시 메가히트작인 게 방송 3사 미니시리즈 중 최고 시청률을 경신했거든. 그런데 너무 바쁘고 정신이 없어서 그 기쁨을 하나도 즐기지 못했었다. 이번에는 시사회 평도 좀 찾아보면서 개봉 준비하는 과정을 좀 즐기고 있다. <리바운드>는 ‘강양현이라는 그릇에 장항준이라는 음식을 넣고 안재홍이 먹었다’고 할 정도로 팀의 역할이 크다고 하겠다.
유작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고 너스레를 떨었는데 <리바운드>를 통해 감독으로서 생긴 목표 혹은 방향성이 있다면.
영화에도 나오지만, 운동선수는 부상당하거나 이유도 없는 슬럼프에 빠지면 헤어 나오는 게 쉽지 않다. 극단적으로 ‘끝났다’고도 할 수 있는데 영화감독도 마찬가지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지나고 보니 끝이었다는 걸 나중에서야 인식하게 될 수도 있다. 지금은 60대까지 현장에 있는 게 꿈이다. 예능을 하고 있지만, 촬영하러 가면 웃기고 재미있게 하려고 열심히 할 뿐 그 자체를 크게 좋아하는 건 아니다. 무의미하게 소모된다는 느낌에 별로…그런데 영화는 정말 재미있고 하고 싶은 일이다. 오래 하고 싶다.
마지막 질문이다. (시사회) 반응을 좀 살피고 있다고 했는데 가장 기쁜 평은 뭔가.
음… ‘최근 몇 년 동안 본 한국 영화 중 제일 좋았다’는 평이다!
사진제공. 미디어랩시소
2023년 4월 7일 금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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