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이금용 기자]
<오징어 게임>으로 세계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가운데 첫 연출작으로 관객을 찾게 됐는데.
<오징어 게임> 이후 해외에 가면 다들 알아봐주신다. 길을 걷고 있으면 어깨를 툭 치면서 다음 작품은 언제 나오냐 묻는 외국 분들도 있다. 해외에서 작품 제안이 들어오고 있는데 언젠가 좋은 작품을 만나면 해외 진출할 의향도 있지만 지금은 <오징어 게임>처럼 한국 콘텐츠를 잘 만들어서 해외로 수출하는 게 더 좋지 않나 싶다.
사실 <관상>(2013) 때 제2의 전성기가 온 건가 싶었다. 그런데 제2의 전성기가 온다 한들 그 인기를 계속해서 이어나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나름대로 그런 걱정이 있었는데, 첫 연출작이 칸과 토론토 영화제에 진출을 하게 됐다. 관심 가져 주시는 많은 분들께 참 감사하다.
영화는 80년대 삼엄한 군부 독재 시절, 내부 스파이를 색출하기 위해 서로를 의심하고 파헤치는 안기부 국내팀 ‘김정도’(정우성)와 해외팀 ‘박평호’(이정재)의 이야기를 그린다. 개봉에 앞서 지난 5월 제75회 칸국제영화제에서 프리미어로 공개돼 많은 화제를 모았는데.
칸에서 공개된 이후 로컬 색이 진하고 80년대 한국사를 몰라서 ?아가기 힘들다는 반응이 꽤 있었다. 그걸 보고 해외 관객뿐만 아니라 10~20대의 젊은 국내 관객도 이해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칸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부터 각색을 다시 했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새로 촬영하는 건 어려웠고, 배우들의 입술이 보이지 않는 장면에 후시녹음으로 수정된 대사를 삽입해 이해도를 높였다.
연출 욕심이 전혀 없다고 밝혔는데, 어떻게 직접 연출을 맡게 됐나.
아무도 안 맡아주니까! (웃음) 사실 각색 전 원안에는 액션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 스파이물이 흥행하기 어렵지 않냐’부터 ‘액션을 추가한다 한들 그 많은 제작비는 어디서 투자 받을 수 있겠냐’까지 많은 감독님들이 정말 다양한 이유로 이 작품을 연출하길 거절하셨다. (웃음) 그래서 생각한 게 시나리오부터 바꿔야한다는 것이었다. 배우로 30여년간 지내면서 시나리오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다. 시나리오가 탄탄하다면 감독님들의 생각도 달라지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4년에 걸쳐 각색 작업을 했고 결국에는 직접 연출하게 됐다. (웃음)
각색은 어떻게 진행했나.
원안은 액션 없이 서스펜스가 중심이 되는 작품이었지만 서스펜스와 함께 볼거리가 풍족하다면 더 많은 관객을 모을 수 있을 거 같더라. 한편으로는 막대한 제작비에 대한 부담도 있었다. 그래도 제작비를 최대한 확보하고 그 이상의 효과를 보여주는 게 우리가 30년 동안 모아온 노하우를 최대한 활용하는 거라고 생각해서 규모를 줄이려고 하지는 않았다. 각색을 하면서 배우로서 쌓은 경험을 시나리오에 많이 녹여냈다. 내가 액션 연기를 했을 때, 또 서스펜스 영화에 참여했을 때 어떤 방식으로 연기하면 더 좋았는지를 아니까 그런 기억을 많이 반영했다.
각색을 하면서 우여곡절이 많았다. 짧은 이메일이나 써봤지 이렇게 긴 글은 써본 적이 없어서 문서 프로그램을 쓰는 것도 처음이었고 모든 게 미숙하다 보니 한두 달 동안 쓴 글이 날아간 적도 있었다. (웃음) 되돌아 보니 내가 4년 동안 일곱 작품에 참여했더라. 연기를 하면서도 이동할 때나 촬영 전 잠깐 준비 시간이 있을 때 조금씩 글을 썼고 짬이 나면 휴대폰 메모장에 아이디어를 적었다. 현대 버전으로도 쓰고 80년대 버전으로도 쓰고, 그러다 글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엎거나 수정하고 이런 과정의 연속이었다. 사실 글이 잘 써질 때보다 안 풀릴 때가 훨씬 많았다. (웃음)
80년대 버전을 채택한 이유는 뭔가.
현대 사회에서 민족이 분단된 채 갈등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내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신념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이념 전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가 80년대였기 때문에 이 의문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지 않는다면 80년대 배경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와는 달리 영화에선 미얀마가 아닌 태국을 배경으로 하지만 아웅산 폭탄 테러를 떠올리게 하는 테러 사건이 주요 소재로 나온다.
시나리오 원안에는 아옹산이라는 지명이 명시돼 있었다. 당시엔 직접 연출할 생각은 없었고 제작에만 참여하려 했지만 아웅산 사건 부분은 반드시 빼야겠다고 생각했다. 희생자가 많은 사건이라 영화로 보여주는 게 걱정스러웠고 그로 인해 남은 유족들이 받을 상처도 걱정됐다. 때문에 느낌만 비슷하게 담았다. 극중 희생자를 줄이기 위해 내빈들을 버스에 태워 피신시키는 장면을 넣었다. 이를 강조하기 위해 버스 안에서 공격받는 장면을 찍기도 했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2009)을 보면 실제 역사와 다르게 역사를 비틀었는데도 많은 관객들이 이해하고 동의해주지 않나. 그런 걸 참고했다.
동료로서 보는 모습과 연출자로서 보는 배우들의 모습에 차이가 있던가.
보통 나처럼 좀 오래 연기 생활을 하다 보면 연기를 보고 그 사람의 성향을 짐작할 수가 있다. (웃음) 정우성 씨야 워낙 가까운 사이니 잘 알지만 전혜진 씨, 허성태 씨가 의외였다. (웃음) 허성태 씨와는 <오징어 게임>에서 만났는데, 첫인상은 되게 남성적일 거 같았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태도와 마음이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다. 전혜진 씨는 굉장히 진솔하고, 예술 분야에 있어 관심사가 다양하다. 또 그런 것들을 남들과 같이 대화하는 걸 좋아한다. 분명 좋은 동료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이 오더라. (웃음)
그리고 우성 씨는 평소에 가깝게 지내고 사무실에서도 자주 만나지만 현장에서 만난 건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계속해서 둘이 같이 작품 한 번 하자는 말을 했었고 실제로도 여러 번 성사될 뻔하다가 무산됐다. 그러다 결국 남이 아닌 우리가 만드는 작품에 함께 출연하게 됐다. 현장에서 캐릭터를 시종일관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에서 30년의 내공이 보이더라. (웃음) 최근엔 <헌트> 홍보활동을 함께하고 있는데 둘 다 영화 일을 오래하다 보니 뭔가 새로운 걸 시도해보고 싶은 마음이 늘 있었다. 홍보할 때도 기존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가는 게 아니라 관객들이 좀 더 즐거워할 수 있는 방식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누구 한 명만 그런 노력을 하는 게 아니라 양쪽 모두의 생각이 같기 때문에 동질감을 많이 느끼고 있고 함께 좋은 쪽으로 발전해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연출과 연기를 동시에 하는 건 어땠나.
해서는 안되는 작업이구나 싶더라. 체력이 모자랐다. (웃음) 연출을 하지 않았다면 연기에 좀 더 신경 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다. 반대로 내가 연출자이니 누구보다 연출자의 의도를 잘 알지 않겠나. 그래서 연기할 때 도움을 받은 것도 있고. 장단이 있는 거 같다. (웃음) 성격 상 모든 걸 꼼꼼히 짚고 넘어가야 했는데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했다. 연기자가 연출을 하는 것에 리스크가 크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서 그 편견 때문에 책임감도 컸다.
제작, 연출, 각색, 주연까지 전 제작 과정에 참여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게 많을 거 같다.
연기자로 일할 때는 현장밖에 몰랐다. 그런데 프리 프로덕션이 그렇게 치열한 줄 처음 알았다. (웃음) 5개월 가량의 프리 프로덕션 과정과 사운드 믹싱, 색보정, 편집 등의 포스트 프로덕션 과정을 경험하고 그간 내가 현장에서 연기한 건 정말 맛보기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향후에도 연출 계획이 있을까.
지금은 연기를 더 하고 싶다. 배우로서 더 많은 캐릭터를 해보고 싶은 욕심이 아직 크다. 어쩌다 좋은 소재, 좋은 이야기가 떠올라 연출을 또 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어디선가 의뢰를 받아서 연출만 할 일은 없지 않을까 싶다. (웃음)
사진제공_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