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7년간 전쟁을 치르면서 어마어마한 스트레스가 있었을 거예요. 난중일기를 보면 간혹 수하들과 술 한잔하려고 하면 꼭 비가 왔다고 해요. 때론 밤에 나가 활을 쏘았고, 그래도 힘들면 글(시)을 쓰셨다고 합니다. 전투에 임하는 장군이 일기와 시를 썼다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한산>을 준비하면서 가져가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보다 젊은 이순신으로 분한 박해일은 단연코 올해 여름을 가장 뜨겁게 보내는 배우라 할 만하다. <헤어질 결심>에서 붕괴됐던 남자는 압도적인 승리를 향해 말없이 나아가는, 그간 경험하지 못한 색다른 이순신으로 관객 앞에 섰다.
사실 박해일이 이순신을? 하는 시선도 있었다. 제안받고 망설임은 없었나.
많이 받은 질문이다. 김한민 감독님과는 <극락도 살인 사건>(2007)으로 처음 만나 <최종병기 활>(2011)을 거쳐 이번이 세 번째 작업이다. 그간 쌓아온 세월이 있기에 감독님이 (나에 대해) 아는 어떤 기질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적인 사실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한산: 용의 출현>(이하 <한산>)이 그리고자 한 이순신과 나를 매칭해 주셨다. 부담을 갖고 시작했지만, 촬영하면서 감독님이 크게 의지가 됐다.
<명량>(2014)이 유례없는 관객을 동원한 데다 최민식 배우의 이순신이 워낙 뜨거워서 그 뒤를 이어 연기하는 게 부담됐겠다.
초반에는 <명량>의 흥행과 캐릭터의 기운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던 게 사실이다. 한데 이순신이라는 굵직한 주제를 저마다 다른 결로 담았고, 이에 맞춰 캐스팅도 달리 가져갔기 때문에 촬영을 시작하고 나서는 한결 부담감이 사라졌다. 오히려 기술적인 측면과 환경적인 면에서 훨씬 발전한 시스템 안에서 촬영할 수 있었다. <명량> 때 참여한 스탭 대부분이 <한산>으로 옮겨왔고, 또 이분들이 <노량>에도 참여했기 때문에 크게 도움이 됐다. 최민식 선배는 실제로 배를 띄우고 촬영해서 한 번 들어가면 밤새 찍기도 하고, 혼자 있는 시간도 없었으니 물리적으로 아주 힘드셨을 거다.
완성본을 본 소감은.
처음에는 모든 부분이 한눈에 들어오지는 않더라. 다만 후반부의 압도적인 CG 결과물에는 놀랐다. ‘우리가 촬영한 것 맞아?’ 이런 의견을 주고받기도. (웃음) 엔딩 크레딧에 나오는 이름만 해도 엄청나지 않나. 그만큼 시간과 비용을 많이 들였다는 것인데 이에 상응하는 결과물이 나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안성기 선배님을 비롯해 변요한, 공명, 김성규, 김성균 등 조선군과 왜군 그리고 주역과 조·단역 할 것 없이 어떤 소명의식을 갖고 참여했다는 생각이다. 이건 현장에서도 느낀 부분이다. 코로나가 한창인 시기에 촬영했는데, 회차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방역에 철저하게 임한 덕분에 확진자가 많이 발생하지 않고 무사히 해낼 수 있었다.
<한산>의 이순신 장군은 워낙 말수가 적어서, (웃음) 캐릭터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데 고민했을 것 같다.
이번 연기 톤은 절제였다. 지금까지 작품 안에서 인물을 보여준 방식은 여러 가지였다. 대사로 풀어내든 감정적으로 표출하든 다양했는데, <한산>은 최대한 절제해서 한 마디 한 마디에 모든 기운을 실어 내고자 했다. 연기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연기를 (아예)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이 점에 신경 썼다. 별로 없는 대사 속에 감정을 실어 인물을 드러내는 게 숙제였다. 얼굴을 비추는 몇 초 안에 인물의 감정을 눈빛이나 짧은 호흡으로 표현하고, 때로는 서 있는 자세만으로도 상황을 보여주는 식으로 표현하려 했다.
예를 들면 녹둔도의 꿈을 꾼 후 혼자 진법을 연구하고 활을 쏠 때의 눈빛, 사천 전투에서 입은 총상이 채 회복되지 않아 한쪽 어깨가 구부정하게 앉은 뒷모습, 수성과 공성을 결정하는 짧은 순간의 현실적인 고민 등 인간적인 고뇌를 담으려 했다. 학익진을 고안하기까지 이순신의 인간적인 고뇌를 보여주지 않으면 이후 벌어지는 전투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리기까지의 과정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려 했다.
절제된 연기를 위해 특별히 노력한 부분이 있다면.
코로나 시기라 단체로 모일 수 없다 보니 숙소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이번은 다른 현장보다 좀 더 진중하고 절제된(?) 생활을 했다고 할지, (웃음) 중요한 전투(촬영)를 앞두고는 차분하게 준비했던 것 같다. 촬영을 준비하면서는 난중일기를 읽기도 했고, 촬영 시작하고는 콘티와 시나리오를 의지 삼아 시간이 날 때마다 자주 걸었다. 실내 세트장이 있는 강릉과 실외 세트장이 있는 여수 일대를 걸으며 잡념을 제거하려 했다. 또 숙소에서 시나리오 볼 때도 의자에 앉기보다는 (장군처럼) 양반다리를 하고 앉는다든지 하는 행동이 나름대로 수양에 도움이 된 것 같다.
이순신을 연기하면서 경계한 지점이 있다면.
감정의 과잉, 그러니까 너무 드러내서 보여주는 건 지양하되 충분히 그 감정을 전달하고자 했다. 절제된 감정이라는 표현이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절제된 가운데 기운은 충분히 느껴지기를 바랐다.
연기해 보니 이순신은 어떤 리더라고 생각하나.
흠결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실제의 나와 제일 간극이 컸던 지점이다. 이런 간극이 있는데 연기만으로 표현한다는 게 뭔가 거짓인 것 같더라. 그렇다고 간극을 좁히는 건 더 어렵고! <명량>에서는 명확한 리더라면 <한산>은 자기의 기운을 전면에 드러내기보다 휘하 장수를 독려하는, 그들이 제 역할에 맞는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리더라고 생각한다. 지금 시대가 바라는 리더상이 아닐까 한다.
김한민 감독이 언급했듯 <명량>이 맹장이라면, <한산>은 지장과 덕장의 면모가 부각됐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면인데 휘하 장수들을 한 명 한 명 떠올리면서 학익진을 짜는 장면에 잘 표현됐더라. 관련 비하인드가 있다면 들려 달라.
나 역시 좋아하는 장면이다. 붓글씨를 직접 쓴 건 아니고, 그런데 (나도) 필사하긴 했었다. 촬영 전에 그 장면의 내레이션을 핸드폰으로 녹음해서 감독님께 드렸고, 촬영하면서 그 오디오를 틀어 놓고 촬영했다.
이순신과 대척점에 있는 왜군 수장 ‘와키자카’(변요한)와는 촬영장에서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고. 생각해 보니 과연 두 사람이 직접 맞붙는 장면이 없더라.
조선군과 왜군, 팀별로 세팅한 후 촬영하기 때문에 그렇다. 조선팀이 들어와서 촬영하면 그 팀이 나가야 새롭게 세팅할 수 있거든. 들어오고 나가는 게 엇갈리다 보니 촬영장에서는 만날 틈이 없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근처 횟집에서 만났다. 그 친구(변요한)는 항상 일본어 선생님과 동행해 일본어 연습을 잠시도 쉬지 않았다. 직접 맞붙는 장면은 없어도 상대 진영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근황을 주고받았다. 직접 자주 못 만나도 장문의 문자를 주고받으며 서로 소통했는데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느껴져서 참 좋았던 기억이다.
후반부 해전 시퀀스가 시원시원하다. 특히 거북선이 등장할 때는 전율이었다. 거북선을 실제 크기로 만들었다고 하던데.
단순한 모형이 아니라 바로 바다에 띄워도 될 수준으로 만들었다. 거북선의 용두가 무엇보다 인상적인데 그간 드라마와 영화에 등장한 용두의 얼굴과 비교해 보는 맛도 있을 것 같다. 거북선은 단순한 배가 아니고 이순신 장군이 펼치는 전술과 전략에 필수요, 제2의 캐릭터 같은 존재다. 한국사람이라면 거북선에 관해 기본적으로 느끼는 정서가 있을 거다. 조선을 지키는 바다의 수호신 같은 느낌 아닌가. 해전 시퀀스를 보면, 조선 수군과 왜군은 배의 구조도 무기를 활용하는 방식도 다르다. 판옥선이 주류인 조선 수군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전법을 운용한다면, 좀 더 작은 안택선이 주력인 왜구는 어린진 같은 일자 전법과 백병전에 유리한 전법을 사용한다. 두 배의 속도 차이에 따라 활과 포를 쏘는 타이밍도 달라진다. 장수들이 이를 인지하여 다발적으로 전략을 구사하면서 펼치는 전투가 영화의 백미라 하겠다. 관객이 즐길 또 하나의 포인트하고 생각한다.
후반부 해전이 전부 CG 작업이라고 해서 놀랐다. 상상해서 연기했을텐데 경험해 보니 어떻든가.
처음에는 난감했다. <괴물>(2006) 때 상상으로 연기한 적이 있지만, 그때는 하나의 크리쳐에만 집중하면 됐었다. 한데 이번에는 신경 쓸 요소가 여럿이었다. 물살의 흐름, 적선과의 거리, 수세와 공세 등의 전세 상황 판단까지 이에 맞춰 감정을 잡고 연기해야 했다. 동영상 콘티를 보며 상황을 파악해 연기 톤을 정한 후 상대 배우와 합을 맞춰야 했다. 그래야 정교하게 CG를 입히는 작업이 좀 더 수월해지고, 배우의 감정과 CG가 따로 놀지 않게 된다. 강릉 실내 스튜디오 안에 판옥선, 안택선 등 여러 배들이 세팅돼 있고 사방은 그린메트로 둘러싸여 있는 게 마치 최소한의 세트로 연극을 하는 듯한 원초적인 느낌이 들더라.
호평으로 입소문 난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과 이번 <한산> 그리고 개봉 준비 중인 임상수 감독의 <행복의 나라로>까지 제2의 전성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코로나 시기에 운이 좋게도 개성과 결이 다른 세 감독님과 작업했다. 이 모든 작업이 진귀한 경험이었고, 관객이 온전하게 영화를 즐겼으면 한다. 제2의 전성기라는 표현은 솔직히 체감되지 않는다.
<헤어질 결심>의 형사 ‘해준’과 <한산>의 이순신은 완전히 다른 모습인데 동시에 개봉해서 한편으로는 우려도 있겠다.
일단 코로나를 겪으며 기다리고 기다리던 영화가 개봉하게 돼서 기쁘다. 그 시기를 내가 조율할 수는 없으니 즐기자는 마음이다. 또 잘 보면 흥미로운 지점도 있다. <헤어질 결심>의 해준은 해군 출신에 바다에서 엔딩을 맞지 않나. 문학적인 말투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순신 장군은 시도 쓰고, 해군이고 더불어 둘 다 공무원(?)이기도 하고, 이런 식으로 비교해 보면 재미있지 않을까!
가벼운 질문이다. 흥행 스코어에 대한 기대는.
인터뷰하는 이 순간조차 이순신 장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버겁고, 다른 어떤 영화보다 조심스러운 게 사실이다. 그래서 스코어에 관해 이야기할 입장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관객이 만족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한다. 다만 올여름은 일주일 단위로 한국 영화 대작이 개봉하는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팬데믹 이전처럼 많은 관객이 다양한 색깔의 영화를 재미있게 즐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진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2022년 8월 3일 수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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