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먼저 ‘진인사’고, 그 후는 ‘대천명’이다” 흥행 부담감을 묻자 김한민 감독은 이렇게 답한다. 즉 최선을 다했으니 흥행은 하늘의 뜻이라는 의미다. <명량> 이후 8년 만의 후속작 <한산: 용의 출현>이 마침 한산대첩 430주년에 관객을 찾는다. 김 감독은 <명량>의 이순신이 불이라면, <한산>의 이순신은 물과 같다고 차이점을 짚는다. 한산대전이 지닌 여러 속성에 맞는 개연성을 찾아가다 보니 이순신 장군의 물처럼 포용하고 그 존재감이 스며드는 모습과 함께 그의 주요한 덕목인 유비무환, 성실, 집중력, 소통력이 자연스럽게 드러났다고 전한다.
<한산: 용의 출현>(이하 <한산>)과 <노량>을 연이어 제작한 거로 알고 있다. 너무 이른 질문이지만, <노량>은 언제 개봉할 예정인가. 또 각각의 제작비 수준은.
<한산> 끝내고 두 달 반 정도의 정비 타임을 거쳐 <노량> 촬영에 들어갔다. 제작비는 편당 300억 원 수준으로 거의 비슷하고, 연이어 촬영해서 제작비를 줄일 수 있었다. 촬영은 이미 끝났고, 내년 초 정도 개봉을 목표로 준비 중인데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다.
<명량> 최민식, <한산> 박해일, <노량> 김윤석, 세 배우가 이순신을 연기한다.
처음부터 다른 배우로 가겠다고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3부작을 통해서 이순신이라는 인물을 다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명량>의 용장, <한산>의 지장, <노량>의 현장까지 각기 다른 이순신 장군을 만날 수 있을 거다.
박해일 배우와 이순신이 언뜻 잘 연결되지 않는다는 일부의 시선도 있었지만, 의도대로 어디든 스며드는 물 같은 면모를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다.
이순신 장군은 판단에 있어서는 밸런스를 갖고,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했던 인물이다. 과묵하고 말수가 적지만, 신뢰할 만한 리더라 할 수 있다. 전세를 바꿔야 할 상황에서 장군이 얼마나 고민했을까. 공성도 수성도 아닌, 결국은 바다 위에 성을 펼친다는 개념으로 학익진이라는 절묘한 수를 고안한다. 그것도 왜군의 수장 ‘와키자카’(변요한)의 대승 전략을 역이용해서 말이다. 매우 지략적인데 이런 지장의 면모에 박해일 배우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명량>보다 5년이나 앞선 시기인 만큼 젊게 가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가벼운 질문이다. 이순신 장군에 꽂힌 계기는 뭔가. (웃음)
이순신 장군은 우리 역사에 있어 절묘한 포지션에 있다고 생각한다. 강감찬, 을지문덕 등과 같은 장군과 달리 좀 더 백성에게 밀착한 장수라고 할까. 올곧은 충성심은 물론이고 그만큼 백성을 사랑했던 인물이다. 지금 우리 시대에 필요한 정치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우리 시대에 재평가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강하다.
마침 한산대첩 430주년에 개봉한다.
장군은 가장 오염되지 않은 실존 인물로 우리 시대 필요한 통합과 화합의 아이콘이라고 생각한다. 나라를 구한 성웅으로서도 현 사회에 역할 하겠지만, 더욱 중요한 점은 당대에 장군이 가진 정신이다. 당시는 임진왜란을 단순히 왜국의 침략이 아닌 ‘의’와 불의’의 싸움으로 인식했고, 장군은 ‘의’를 실천했던 인물이다. 이를 <한산>에도 반영했다. 항왜(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귀순한 일본인을 지칭) ‘준사’(김성규)가 등장한 이유다. 그는 이순신에게 ‘부하를 방패막이로 삼던 주군과 달리 당신은 부하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앞장섰다’고 말하면서 투항한다. 대일항쟁기와 격변의 근현대사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런 정신이 우리 DNA에 각인해 있고, 그 중심에 이순신 장군이 있다고 생각한다.
1,761만 명을 동원한, 역대 박스오피스 부동의 1위로 자리잡은 <명량>(2014)의 저력은 무엇이라고 보나.
전혀 기대하지 못한 스코어였고, 지금도 미스터리다. 이런 흥행 이면에는 (기자간담회에서도 말했듯) 당시 사회적 분위기의 영향도 있을 거로 본다. 전 국민이 충격과 분노, 그리고 상처받았고 이에 어떤 위로가 필요했을 테니까. <명량>을 통해 <한산>과 <노량>으로 이어지는 3부작을 더 잘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느덧 8년이 흘렀지만, 그만큼 준비를 열심히 했다.
어떤 준비인지 구체적으로 소개한다면.
사실 <명량>때는 맨땅에 헤딩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한 시간 분량의 해전을 구현한다는 게 정말 힘들었다. 물을 표현하는 CG 기술력이나 시뮬레이션 R&D 가 지금보다 훨씬 발전하기 전이라 그렇다. 당시 해외 전문가는 이 예산으로 하기 힘들 거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감행했지만, 어려움이 많았다. <한산>과 <노량>은 좀 더 연구해서 사전 준비를 한 후 들어가고자 했다. 그래서 사전시각화 작업에 시간을 많이 할애했다. 기존의 콘티 개념이지만, 거의 애니메이션 수준으로 만들었다. 보통은 프리비주얼 작업이라고 해서 액션이나 다이내믹한 장면은 동영상 콘티를 만드는데, <한산>은 이를 넘어 버추얼 프로덕션으로 작업했다고 할 수 있다. 쉽게 설명하자면, 스튜디오 안에서 크로마키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콘티로 활용했다고 보면 된다. 해보니 한 70% 정도는 성공적이었고, 나머지 30%는 앞으로 남은 숙제다.
<명량>과 달리 배를 한 척도 띄우지 않고 촬영했다고 들었다. 이런 방식을 선택한 이유와 그 장점은.
사전시각화를 한 이유이기도 하다. 주 52시간 근로 시간 준수는 영화업계와 현장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제작비가 상승한 만큼 효율적인 스케줄과 회차 관리가 필요해졌다. 감히 바다에 배를 띄우고 (날씨 등) 천운에 맡기며 촬영하는 건 무리였다. (웃음) 설사 그렇게 한다 해도 좋은 영상이 담보되는 것도 아니라 직접 배를 띄우지 않기로 했다. 대신 평창 동계올림픽 때 사용한 스케이트장을 활용해 3,000평 규모의 VFX스튜디오를 만들었다. 이곳에서 <노량>까지 촬영했다. 특히 <노량>은 밤 전투 장면이 많아서 밤과 낮의 조명을 수시로 바꿀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했다. 바다에만 안 띄었을 뿐, 판옥선 등은 모두 만들었다.
<명랑>과 <한산>의 차이점을 짚는다면.
우선 해전의 성격이 다르다. <명량>은 뜨거운 역전승이라면 <한산>은 수세 국면을 전환한 모멘텀을 마련하기 위해 차가운 판단하에 전략적으로 접근한 전투다. 그렇기에 두 해전에 임하는 이순신 장군 역시 다른 면모를 보인다. <명량>이 불굴의 의지를 지닌 고독한 장군에 집중했다면, <한산>은 이순신과 그 주변 장수들에 초점을 맞춘다. 물처럼 포용하고, 그 존재감이 스며드는 모습이다. 반면 <명량>의 장군은 뜨거운 불처럼 격정적이다. 불과 물의 차이라 하겠다.
한산해전은 조선의 일방적인 승리라는 인식이 강하다. 드라마틱한 면이 떨어진다고 볼 수도 있는데…
바로 그 점이 <한산>을 만든 이유다. 사람들은 익히 아는 전투라고 생각한다. 학익진과 구선(거북선)의 활약으로 대승을 쉽게 거뒀다고 말이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학익진을 실전에서 처음 펼치는 데다 문제가 있어 출정하지 못한 구선이 다시 출정하기까지. 또 왜군을 한산 앞바다로 끌어낸 유인전도 결코 쉽지 않았다. 이런 총체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이순신 장군과 그 휘하들이 뜻을 모아 힘겹게 일군 승리라는 걸 알리고 싶었다.
초중반부는 전략과 전술전에 집중했다면, 후반부는 해전이 몰아친다. 연출적으로 신경 쓴 부분은.
조선군과 왜군, 서로가 치열하게 고민할 지점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왜군 수장인 ‘와키자카’는 매우 고민이 많았을 거다. 야망을 펼치기 위해 승리가 꼭 필요할 뿐 아니라 왜장 간의 경쟁 구도도 만만치 않으니 말이다. 이순신도 마찬가지다. 압도적인 승리가 필요한 상황인데, 원균 같이 반기를 드는 장수도 있다. 첩보, 탐색, 디테일한 전술 싸움이 <한산>의 특색이라고 생각했고, 이순신의 이런 면이 보여야 관객이 기꺼이 공감하고 동의할 거로 생각했다. 무엇보다 개연성을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후반부 해전의 연출 포인트를 짚는다면.
한산해전은 전 세계사적으로도 당대에 전무후무한 해전이다. 체계적인 진법, 정교한 유인술, 구선의 등장 등 그렇게 적을 포위해서 궤멸한 사례가 없다. 자긍심을 가지기에 충분한데 이를 제대로 구현하려면 스펙터클과 더불어 정교한 전술이 필요했다. 해전을 치열하고 엣지있게 표현한 건 자긍심의 문제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를 통해 이순신의 면모를 드러내야 했기 때문이다. 장군이 지닌 주요한 덕목인 솔선수범, 유비무환, 성실, 집중력, 소통력 등을 전쟁 수행을 통해 보여주려 했다.
바다의 질감, 화포술, 긴박한 추격전, 구선의 결정적인 등장 등을 통해 한산해전답게 보여주려 했다. 스케일이 크고 속도감이 있어야 했고, 이를 끌어올리는 사운드 역시 중요했다. 무엇보다 리얼함을 확보하기 위해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했다. 바로 화포가 영향을 발휘할 거리의 문제였다. 왜장들이 포가 가까운 거리에서 효과를 발휘한다고 의논하는 장면이 있다.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 역시 학익진을 매우 근거리에서 펼쳤겠더라. 왜군의 전술도 근거리까지 최대한 빠르게 접근한 후 월선을 시도할 거로 생각했다.
해전 시퀀스에서 일본어 대사뿐만 아니라 한국어 대사도 자막을 넣었다.
고뇌(?)에 찬 결단이었다. (웃음) 전쟁의 밀도감은 제대로 보여줘야 하는데 자칫하면 사운드에 눌려 대사가 안 들리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시대가 과거라고 하지만, 한국어 대사에 한글 자막을 넣는 건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고민하다가 그래도 전쟁의 생생한 밀도감을 전하는 편을 선택했다. 나름 용기 낸 거다. <한산>의 관객 반응과 결과를 보고 <노량>에도 적용할지 결정할 것 같다.
조선군과 왜군 구분 없이 배우들의 발성과 발음이 명료해서 좋더라. 모두 사극 톤에 걸맞은 발성이었다.
그렇지? 다들 그렇지만, 원균을 연기한 손현주 선배의 딕션이 정말 좋지 않나. 사실 원균을 부탁하면서 (선배의 위상이나 연기력을 보면)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이순신에 팽팽하게 맞서는 안타고니스트 역할이라 (선배가 해줘야) 캐릭터의 무게와 비중이 채워질 거로 생각했다. 흔쾌히 수락해줘서 기뻤다.
유일한 여성 캐릭터 ‘정보름’에 김향기 배우를 캐스팅했다.
일본 장수를 수발하는 기생이면서 동시에 세작인 캐릭터가 한 명 정도 있으면 했다. 가련해 보이지만, 내면은 매우 강한 여성 말이다. 처음에 소속사에 제안하니 담당자가 ‘향기가 어떻게 그런 역할을 하겠냐’고 하더라. 아마 정통 성인 연기로는 첫 역할일 거다. 그래도 한번 의견을 물어나 봐 달라고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일주일 정도 후에 연락이 왔다. 향기가 역시 선구안이 좋다! (웃음) 보름은 훗날 <명량>의 ‘정씨’ 여인(이정현)이다.
<명량>때보다 전 세계적으로 한국 영화를 비롯해 k-콘텐츠가 주목받고 있다. 필름메이커로서 그만큼 책임감도 클 것이다.
한국 콘텐츠가 주목받는 것은 소중하고 멋진 일이다. 장르를 이용하는 대중 상업영화로서 한국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와는 다른 면이 있다. 장르적 문법과 더불어 플러스알파가 있다는 것이다. 한국 특유의 플러스알파가 장르와 결합할 때 힘을 받는다고 본다. 이점이 K-콘텐츠의 차별점이자 강점이다. K-콘텐츠가 글로벌 콘텐츠로 롱런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게 역할 할 덕목이다. 이런 면에서 <명랑>도 사랑받았고, 소신을 갖고 <한산> 역시 이의 연장선에서 만들고자 했다.
근 10여 년을 이순신 장군과 함께한 소회 한 말씀!
지난 10년 동안 영화를 어떻게 구현할지에 집중하다 보니 바빠서 그런지 크게 스트레스 받거나 하지는 않았다. 간혹 답답하고 힘들 때, 이상하게 ‘난중일기’를 보면 마음에 위안이 되더라. 남의 일기장을 훔쳐보듯이 수시로 봤다. 불면증에도 도움된다. (웃음) 이순신 3부작이 빡빡한 오늘을 사는 국민에게 위로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진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2022년 7월 27일 수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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