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탈북 천재 수학자 ‘학성’(최민식)과 상위 1% 자사고 학생 ‘지우’(김동휘)와의 수학을 매개로 한 교감을 그린 영화다. 탈북자, 고교생, 수학이라는 이질적인 소재가 어색하지 않게 어우러져 어떤 지지와 격려를 전하는 따뜻한 결을 지닌 작품이다. 영화를 연출한 박동훈 감독을 만났다. 제목이 의미하는 ‘이상한’ 나라의 의미부터 캐스팅, 로케이션, 수학을 서사에 녹여낸 방식까지 감독과 나눈 대화를 전한다.
경쟁 사회 속에서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이때 잠시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며 어떤 긍정적인 휴지기를 가졌으면 하는 마음. 박 감독이 말하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의 출발점이다.
제목의 ‘이상한’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 사회에 N포 세대, 수저 계급론 등 포기를 종용하거나 포기를 암시하는 조어들이 계속 생성되고 있지 않나. 이런 이상한 나라인 남한에서 살고 있는 고등학생과 남한보다 훨씬 더 이상하고 괴상한 나라에서 탈출한 수학자의 이야기라서 ‘이상한’이라고 붙였다. 또 영화 제목에서 당연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책을 떠올릴 텐데 작가인 루이스 캐럴이 수학자였다. 소설에서 앨리스가 모험하듯이 우리 영화에서도 어떤 미지의 공간과 시간을 탐험하는 맛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에서 지은 중의적인 의미가 있는 제목이다.
힘든 순간이나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긍정적인 휴지기가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시작했다고 영화의 취지를 밝힌 바 있다. 이런 긍정적인 휴지기의 경험이 있다면, 들려 달라. (웃음)
휴지기보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위해 돌파를 했던 경험이 있다. 그러니까 22년 전 1999년 정도다. 내가 만드는 단편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뉘앙스의 말을 들었고 당연히 기분은 좋지 않았지만, 일리가 있다는 생각에 내가 응시하고 있는 주제나 소재의 방향을 바꾼 결과 괜찮은 평가를 받았다. 나름대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돌파했던 시기였다.
개봉 소감은.
촬영한 지 3년은 됐다. 참, 코로나 시기가 아니라면 ‘저희 영화 너무 좋으니 꼭 극장에 와서 봐주세요’라고 할 텐데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조금 달리 표현해야 할 것 같다. 얼마 전에 ‘우린 코로나 터널을 지나고 있다’라는 말을 접했는데 참 와닿더라. 처음에는 ‘조금만 더 있으면 터널이 끝나겠지’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으나 터널이 계속 자동으로 연장되는 아주 기분 나쁘고 불쾌하고 우울한 꿈을 꾼다고 할지 이런 상태가 유지되고 있는 것 같다.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가 이런 불쾌한 우울함을 조금 덜어낼 수 있는 역할을 하면 좋겠다.
사배자(사회적배려대상자) 전형으로 전국 단위 자사고에 입학한 ‘지우’는 선행 학습으로 무장한 학생들 사이에서 학업 특히 수학을 따라가기 힘들다. 학문의 자유를 찾아 탈북하여 남한에 정착한 ‘학성’은 신분을 숨기고 학교에서 수위로 일하고 있다. 상처받은 채 단절된 삶을 살던 학성은 자기보다 더 힘들어 보이는 지우를 만난다.
수학자 역할에 최민식 배우가 언뜻 연상되는 조합은 아닌데 후반부로 갈수록 연기력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최민식 배우를 캐스팅한 까닭은.
우선 아주 오래전부터 최민식 배우의 굉장한 팬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잘 모르는 그의 작은 연기나 대사, 컷 등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못 해낼 연기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2000년대 들어서는 그를 뜨거운 혹은 센 배우라고 많이들 표현하는데 과거 <넘버 3>(1997)나 <해피엔드>(1999)를 보면 특히 <해피엔드> 중 다용도실에 슬리퍼 신은 채 쭈그려 앉아서 우유팩을 정리하는 장면이 있다. 아주 디테일하게 생활연기를 펼치는데, 현재의 최민식이라는 배우에게서 잘 떠오르지 않는 모습이지만, 생활 연기를 정말 잘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경비복을 입고 고등학교에서 재활용품을 정리하고 지우와 수학에 관해 얘기하는 등 아름다운 배석을 한다고 상상하니 몹시 흥분됐었다. 캐스팅을 수락하실 때 기대 이상으로 감격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상대역인 ‘지우’ 역의 김동휘 배우는 스크린 데뷔작으로 대선배를 상대로 대등한 연기를 펼치더라. 두 배우가 처음 만났을 때 기류랄지 분위기는 어땠나.
최민식 배우와 함께 오디션을 봤고 의견이 일치했었다. 동휘 배우 입장에서 얼마나 떨렸을까 싶은데 그 와중에도 견고함이 느껴졌다. 자기중심을 잃지 않으려는 품격이랄지, 최소한의 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당당한 그 모습이 마침 지우한테 필요했던 모습이기도 하고. 또 대사나 연기를 잘한 건 당연하다.
‘지우’의 친구인 ‘보람’역의 조윤서 배우는 캐릭터를 너무 잘 소화해서 진짜 고등학생인 줄 알았다. (웃음)
처음 봤을 때 그냥 ‘보람’이었다. 사실 지우와 학성에 비해 분량이 작아서 짧은 시간 안에 설명 없이도 이 친구가 어떤 캐릭터인지 이미지적으로 증명하는 배우를 캐스팅해야 했다. 고민하던 중 거의 막판에 조윤서 배우를 만났다. 첫 미팅 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마음속으로 ‘보람이네’ 했었다.
지우와 학성은 서로에게 그리운 존재를 연상시키는 대상이다. 지우는 아버지를, 학성은 아들을 떠올리겠지. 둘이 함께하는 시간을 보면 부자지간 같은 느낌인데 이 부분이 좋더라. 분위기와 톤을 어떻게 끌고 갔나.
최민식 선배는 워낙 알아서 잘하니 그냥 시간 조절과 동선 정도에 관해 이야기했다. 반면 동휘 배우와는 장면마다 굉장히 많은 이야길 나눴다. 신의 목적, 동선과 행위 등에 대해 말이다. 이때 너무 감성적으로 감정을 폭발하지는 말자고 방향을 정했다. 자칫하면 지우라는 캐릭터를 평면적으로 만들어 버릴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최민식 배우의 연기야 두말하면 잔소리고, 이번 작업을 통해 ‘인간’ 최민식을 발견한 점이 있다면.
음, 선배(최민식)와 함께 영화 홍보를 진행하면서 말씀하시는 걸 보고 이제 좀 알겠다 싶은 지점이 있다. 최근에 느낀 건데 자기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한 경계선이 너무나 누구보다 명확한 분이다.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누구보다도 자기한테 솔직한 분이다. 자기한테 솔직하다는 게 살다 보면 엄청나게 힘든 거지 않나. 스스로 거짓을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에 진짜 같은 연기가 나온다고 본다. 듣기로는 20대부터 쭉 그렇게 살아온 분이라고. (웃음) 자기한테 극한으로 솔직하다는 것, 바로 이점이 오랫동안 지탱할 수 있는 원천이자 최민식이라는 사람이라는 걸 이제 좀 알게 됐다.
학성이 수학에 뛰어난 실력을 지닌 걸 알게 된 지우는 수학을 가르쳐 달라고 조른 끝에 허락을 맡는다. 수업료는 딸기 우유 한 팩, 장소는 B103이다. 주황빛 조명으로 감싸인 부드럽고 따뜻한 분위기, 투명 칠판과 피아노가 있는 B103호에서 늦은 밤 만난 두 사람은 수학으로 대화하고 음악으로 마음을 나눈다
배경이 상위 1%만 입학한다는 동훈고등학교다. 전주 상산고에서 촬영했다고.
일부만 그렇고 그 외 여러 학교에서 촬영했다. 지우와 보람이 앉아 이야기 나누는 교정의 계단, 외관, 교문은 상산고에서 촬영했다. 지우와 학성이 수학을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야기를 나누며 다리를 건너는 장면과 지우가 박카스를 들고 경비실 앞에 쭈뼛쭈뼛 서 있는 장면은 서울시립대에서 촬영한 거다. 또 선생님들이 모여 차를 마시는 한편에 학성이 재활용품을 수거하는 장면은 분당의 한 외국어고등학교에서, 학교 내부의 복도와 교실 등은 대전에 있는 국제고등학교에서 촬영했다.
지우와 학성이 한밤중에 수학 공부하는 B103호는 일반 교실과는 전혀 다른 따뜻하면서도 감성적인 느낌의 공간이다.
경비실 내부와 B103은 전부 세트로 만들었다. 이때 콘셉트가 일반적인 교실과 교실이 만드는 정서와 또렷하게 대비를 만드는 거였다. 그렇게 콘셉트를 잡고 카바라조 등 바로크 시대 화가들의 그림을 보며 명암대비와 입체감을 살리는 데 참고했다. 교실이 다소 차갑고 평면적이고 채도가 낮고 획일적인 느낌이라면, B103은 학성과 지우가 어떤 교류를 하면서 상처가 치유되고 더불어 수학의 아름다움이 담긴 느낌을 전하고자 했다. 조금 과장한다면 작은 기적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 좋은 어떤 작은 사고(해프닝)가 일어날 가능성이 가득 찬 공간으로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어둡지만 온화하고 온기있고 동시에 입체적으로 가져갔다. 마치 ‘당신도 여기 오고 싶죠, 와서 같이 놀고 싶죠’라며 공간이 관객에게 말을 건네는 것처럼 말이다.
엔딩에서 지우가 외국에 있는 한 수학연구소에 정착한 학성을 찾아간다. 실제 있는 기관인가.
(기억하기로) 1940년대부터 있는 굉장히 유명한 수학 연구소다. 자막으로 명칭이 나오는데 한국 발음으로 하기가 힘들다. (웃음) 지금도 세계 여러 나라의 수학자들이 모여 연구하고 학술 토론을 하는 곳이다. 촬영은… 현지 로케이션은 못 했고 전주 근처에서 진행했다.
애니메이션을 활용하는 등 수학이 귀엽고 말랑말랑하게 서사 안에 잘 녹아 들었다. 그 중 파이송이 특히 눈에 띈다.
파이송은 원래 시나리오에 있던 부분보다 많이 확장했다. 학성 지우 보람 그리고 공간까지 동기화돼 관객들이 그들과 같은 공간에서 파이송을 듣고 있는 느낌, 즉 같이 동참하고 있다는 기분 좋은 착각을 주는 게 포인트였다. 그래서 원래는 음악실이 배경이었는데 오일러 공식을 비롯한 수학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던 분위기를 이어 가기 위해 B103으로 변경했다.
준비 중인 작품이 있다면.
꼭 만들어 보고 싶던 걸 준비 중이고 긴 시놉시스(혹은 짧은 트리트먼트)가 나온 상태다. 근 미래의 이야기로 한반도가 쑥대밭이 된 상황에서 임신한 여성이 자신과 아기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하고 대한민국을 탈출하는 이야기다. 스케일이 크다면 크지만, 오밀조밀하고 귀엽게 만들려고 한다.
수학을 주요 소재로 했다. 혹시 추천하고 싶은 도서가 있다면.
꼭 말하려 했다. 김민형 교수의 ‘수학이 필요한 순간’이다. 학생과 교수의 대담 형식으로 쓰인 책인데 굉장히 흥미롭다.
사진제공_(주)쇼박스
2022년 3월 18일 금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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